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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달려온 K지하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8. 13. 14:40

북한보다 출발 늦었지만 … 고속철 수출길 연 지하철
중앙선데이
입력 2024.08.10 00:01

업데이트 2024.08.11 15:13


50년 달려온 K지하철

8월 15일은 여러 기억으로 남는다. 광복절(1945년)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육영수 여사 서거(1974년)도 이날이다. 육 여사가 쓰러진 직후엔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50년은 그렇게 출발했다. 이후에도 새로운 노선으로 이어지며 7.8㎞ 종로선에서 1335㎞ ‘수도권 전철’로 거듭난 지하철 반세기의 어제와 오늘·내일을 서울교통공사 공모 수기 입상작 등을 통해 들여다봤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직후 열린 지하철 1호선 종로선 개통식. [사진 서울기록원]
 
# 1971년 4월, 서울시청 광장에선 지하철 1호선 착공식이 거행됐다. 합창단 일원으로 ‘지하철의 노래’를 불렀다. ‘지하철이 뚫린다/600만 시민의 안전과 평화와 부푼 꿈으로/지하로 뻗어가는 겨레의 70년대/또 하나의 기적을 이룩해보자.’ 그리고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이 열릴 예정이었지만….(이선숙씨·69세)

사진 한 장이 있다. 1974년 8월 15일 찍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 구간(종로선) 개통식 장면이다. 대한민국 지하철 시대의 개막이었다. 테이프 커팅 참석자들 위의 시계는 오전 11시16분을 가리키고 있다. 당초 이날 개통식은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해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을 찍기 53분 전인 오전 10시23분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 29주년 행사 도중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졌다. 지하철 개통식은 급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974년 3월 일본에서 건너와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지하철 1호선 열차. [사진 서울기록원]

우리나라 지하철은 100년 전에 ‘생길 뻔’했다. 전차가 깔려 있던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본 민간업체인 조선철도주식회사가 사업 타당성을 조선총독부에 타진한 뒤 부설권을 얻었다. 이후 청량리~서울역 구간이 검토됐지만 자금난으로 결국 ‘없던 일’이 됐다. 그리고 50년 뒤인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로 물러난 김현옥 서울시장에 이어 양택식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지하철 건설은 드디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도 이때 들어섰다.

다시 한 장의 사진을 보자. 1974년 3월 부산항에 입항하는 전동열차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일본 히타치사에서 제작해 통째로 조립한 6량이 먼저 도착했다”고 전했다. 당시엔 일본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1호선 노선도 일본 자문단 의견을 반영했다. 일본으로부터 고금리인 4%대 이자로 8000만 달러도 빌렸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은 개통됐다. 아시아에서 네 번째다. 일본은 1927년, 중국은 1969년 지하철 시대를 열었고 북한은 우리보다 1년 앞선 1973년 9월 평양에 천리마선 봉화역~붉은별역 구간을 개통했다. 우리나라 종로선 개통 당시 운임은 30원.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 고2 여름방학. 순간 누군가 말했다. “서울 가보고 싶다.”…“얘들아. 너희 서울이 처음이니?” 중년의 여성분이 다음 역에서 같이 내리자며 말을 걸어왔다. “아닌데요?” 내가 대답했다. 말끝이 올라가는 ‘완벽한’ 서울 악센트였다. 이제 지하철 2호선은 중년이 된 나를 태우고 달린다. 이 순환선이 어린 날의 꿈을 싣고 멀어져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을 나는 안다.(이정숙씨·45세)

1970년 10월 정부가 발표한 ‘1호선 건설 계획 및 수도권 전철 계획’ 노선도. 1~5호선이 지금과 다르다. [사진 서울교통공사]

이씨가 상경해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처음 타본 건 1996년. 순환선은 12년 전인 84년 완성됐다. 2호선 건설이 구체화한 건 1971년 6월이었다. 그런데 자금난과 육 여사 서거로 1~5호선 일정이 전면 조정됐다. 1호선 개통 당시 미리 완공해둔 신설동의 예비 승강장이 ‘유령 승강장’이 된 이유다.

이후 1975년 구자춘 서울시장은 서울을 구도심(사대문 안)과 영등포·영동 등 세 핵으로 나누는 ‘삼핵 도시론’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2호선은 김포공항~을지로~개포동을 제안한 일본 자문단의 구상과 달리 세 개 도심을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바뀌었다. 통상 대도시 지하철은 방사형이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 이를 보조할 수단으로 순환선 건설이 이어지는데 ‘삼핵 도시론’이라는 서울 도시개발의 특성상 순서가 뒤바뀌게 된 것이었다. 2호선이 본격 추진되면서 3호선과 4호선 건설도 다시 순항을 시작했다.

#대학교 논술시험을 보러 혼자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아무리 지하철을 기다려도 대화행·구파발행만 오고 동대입구역행 열차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단정한 교복 차림의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여학생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이 자리에서 타면 돼요.”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학생의 이름은 잊을 수가 없다. 왜냐면 주민등록등본의 내 이름 밑 배우자란에 적힌 이름이기 때문이다.(변기돈씨·37세)

                      서울교통공사 지하철 사진 공모전 입상작인 유근찬씨의 ‘황금빛 출근길’. [사진 서울교통공사]

2호선을 보조하는 3호선과 4호선은 한 세트로 기획됐다. 서울을 X자 형태로 분담하며 옛길을 따른다. 3호선 구파발 방면은 의주대로, 양재 방면은 영남대로, 4호선 수유 방향은 경흥대로, 사당 방면은 삼남대로와 겹친다. 그래서 두 노선은 서울 한가운데 충무로역 단 한 곳에서만 만난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금난이었다. 정부 주도(서울시 지하철본부)에서 대우그룹을 끌어들인 사설 철도로 전환했지만 1979년 2차 석유 파동을 뚫을 수 없었다. 이때 대우그룹을 주축으로 한 합작회사 형태로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지금의 서울교통공사 전신이다.

3호선은 유독 난공사가 많았다. 특히 무악재 구간은 악명이 높았다. 1982년 4월 8일 암반 구간에서 다이너마이트 발파 충격으로 상수도관이 파열돼 복공판이 600여 장이나 무너지면서 11명이 사망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사망 192명) 등과 함께 피해가 컸던 지하철 사고로 꼽힌다. 이 같은 난관을 뚫고 3호선과 4호선은 1985년 10월 18일 완전 개통했다. 이렇게 ‘1기 지하철’이 완성되면서 서울을 넘어 ‘수도권 전철’의 탄탄대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8월 15일. 그날은 내게 아침마다 청파동에서 종로5가로 향하는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날이기도 했다. 탑승한 아이들은 전철이 지하철로 바뀌는 남영과 서울역 구간의 신비로움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감지한 순간, 나는 자랑스럽게 잠수함 입수와 같았던 장관을 침을 튀기며 설명했고….(한기조씨·61세)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서울 인구는 650만 명. 서울 전차는 이미 1968년 사라진 뒤라 버스는 늘 북새통이었다. 지하철 건설엔 버스 이용 승객을 분산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두 개의 대중교통은 경쟁과 협력을 이어갔다. 2004년 7월 1일 환승요금제와 더불어 버스 중앙전용차로제가 도입됐는데, 같은 날 지하철 최고 속도를 시속 80㎞에서 90㎞로 높인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중앙전용차료제로 버스 운행 속도가 오르니, 지하철의 속도도 높인 것이다. 교통카드 빅데이터 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6월 서울의 도시철도(지하철) 이용자는 1억5913만 명(외국인 제외). 공항·광역·시내·마을 등 모든 버스 승객 1억4340만 명보다 많다.

                               지난해 12월 개통한 연천역 창 너머로 옛 연천역의 급수탑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한씨가 ‘전철이 지하철로 바뀌는’이라고 표현했듯 최초의 종로선 7.8㎞는 기존 철도망과 연결하면서 시작됐다. 50년 뒤인 지금은 지하철과 기존 철도 구간, 새 노선 등을 합쳐 ‘수도권 전철’로 부르고 있다. 최남단 신창역에서 최북단인 38선 너머 연천역까지 24개 노선 786개 역에 총 길이도 1335㎞에 달한다. 수도권 전철이 방대해지다 보니 환승역도 116곳이나 된다. 김포공항역은 5개 노선이나 겹친다. 환승역이 많다보니, 비환승역과의 차별화가 적어져 지난해 1월 기존의 ‘얼씨구야’에서 ‘풍년’으로 바뀐 환승 안내 음악이 무색할 정도다.

                             자전거도로로 바뀐 옛 신창역 앞 장항선 철로. 영화 ‘종착역’에도 나온다. 김홍준 기자

수입에 의존하던 지하철 전동열차도 1977년 국산화에 성공(대우중공업)했고 1990년대부터는 수출(현대로템)을 시작했다. 이는 지난 6월 우즈베키스탄과 첫 고속열차(KTX) 수출 계약으로 이어졌다. 서울교통공사의 지하철 운영 시스템도 호주·필리핀·인도네시아 등으로 진출했다.

                  미래의 대중교통 수단으로 꼽히는 GTX가 수서역 구간을 달리고 있다. [연합뉴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서울과 달리 수도권 지하철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실정이다. 김포골드라인의 출퇴근 지옥철이 대표적이다. 한우진 교통평론가는 “9호선처럼 완행과 급행열차 비율을 일대일로 하는 게 효과적이지만 기존 노선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현재 건설 중인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등이 향후 50년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 2일 서울 양천구 서울교통공사 신정차량사업소. 반세기 전인 1974년 8월 15일 처음 운행했던 그 1호선 열차가 1998년 은퇴한 뒤 이곳에서 쉬고 있다. 이후에도 지하철은 수많은 ‘빌런(악당 승객)’과 이동상인의 본거지였으며 ‘노인 냄새 난다’는 근거 없는 민원의 진원지였다. 역무원들이 산모의 아이를 받아낸 용산역과 아이를 구하다 역무원이 다리를 잃은 영등포역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배경도 이곳이었다. 말은 할 수 없는 차가운 기계지만 따뜻하고도 뜨겁게, 한국의 지하철은 그렇게 지난 50년을 달려왔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9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