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다섯 시간의 행군… 그는 횃불과 줄 하나를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⑩ 제주 만장굴 발견한 부종휴
1969년 6월 1일 자 조선일보는 다소 특이한 결혼식을 보도했다. 그 전날 5월 31일 지하 10m 동굴에서 결혼식을 올린 부종휴에 관한 기사였다. 이 굴은 만장굴로, 현재는 제주를 대표하는 용암 동굴이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다. 부종휴는 1946년 만장굴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름 지은 사람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만장굴은 잊혔고, 1967년부터 조금씩 공개되었지만 그해 만장굴을 다녀간 사람은 127명에 지나지 않았다.
부종휴는 어떻게든 자신이 발견한 만장굴을 알리려고 결혼식을 만장굴에서 열었다.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 행사에 수많은 하객과 기자들이 몰리며 이를 기점으로 만장굴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방문객은 폭발적으로 늘어 1975년 한 해 방문객이 11만 명을 돌파하고 1980년대에는 무려 100만을 넘어서며 유네스코가 주목한 제주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부종휴가 만장굴을 발굴하고 알린 것은 과학이 어두운 시대를 밝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난 부종휴는 1945년 3월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가 김녕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같은 해 일본이 패망하자 19세 청년 부종휴는 해방된 조국에 과학자, 음악가가 필요하다고 소년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과학반과 음악반을 만들어 현미경을 사고, 자기 바이올린을 내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얼마 전까지 황국신민 교육을 받던 학생들에게는 파격적이었고, 불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부종휴를 믿고 따르게 된다. 한 발 더 나가 이들 초등학생과 과학 탐사를 시도한다. 그는 ‘꼬마탐험대’로 이름 붙이며 동굴 탐험을 위해 안전교육과 기초 훈련을 했다.
1946년 4월, 부종휴는 어린이들을 이끌고 제주에서 아무도 가지 못했던 미지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굴의 길이에 놀란 그는 일단 철수하고, 더 철저한 준비를 했다. 충분한 횃불과 길이를 측정할 긴 줄을 가지고 동굴 끝까지 갈 계획을 세운 그는 1946년 가을 재도전했다. 무려 다섯 시간의 어둠 속 행군 끝에 기적적으로 지상으로 통하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측정된 길이는 7㎞. 동굴 끝에서 발견한 이 구멍은 오래전부터 ‘만쟁이거멀’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새로 발견된 동굴의 시작점으로 확인되었다. 1947년 2월 24일, 부종휴는 김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 동굴의 이름을 ‘만장굴’로 발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부종휴는 “처음에 만장굴을 답사할 때의 사회란 해방 후이고 보니 이만저만 시끄러운 때가 아니었다. 좌우가 충돌하고 국민들은 방향을 못 찾고 있던 때”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랬던 이 시절에 굳이 과학 탐사를 했던 이유는 아이들 손을 잡고 어두운 동굴을 한발 한발 전진하며 그 끝에서 발견하게 될 빛을 희망으로 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며칠 뒤 제주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 제주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가두시위로 시민이 여러 명 사망한다. 이를 기점으로 소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해 1948년 4월 3일, 제주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제주 4·3 사건이라고 한다.
4·3 사건은 제주를 초토화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어 1954년에야 마무리되었다. 김녕초등학교를 떠나 제주농업학교, 신성여고, 제주사범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부종휴는 과학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제주경비사령부는 폭도를 진압한다며 제주 중산간 거주민들을 해안 지역으로 강제로 소개하는 조처를 내려, 이 무렵 제주도에서 산간 지역을 들어간다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었다. 누구도 나서지 않던 이때 부종휴가 당국의 협조를 받아 제주 산간 지역 탐사에 나선다
그는 수백 회에 걸쳐 한라산을 오르며 수많은 제주도만의 식물종을 발견하는 성과를 이룬다. 서울대 연구원으로 식물 연구를 이어가던 부종휴는 1962년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며 다시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 학계와 벌였던 왕벚나무 원산지 논쟁에 쐐기를 박는 상징적 사건이다. 후속 연구로 제주도에 자생하는 왕벚나무는 일본 왕벚나무와는 다른 종으로 판명되어 원산지 논쟁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아직 일본에서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부종휴는 4·3 사건으로 묻힌 만장굴을 알리기 위해 사방으로 뛰었다. 1966년에는 일본 지하수학회와 공동 발굴 연구를 했고, 이어진 연구로 1968년 만장굴이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동굴임을 발표한다. 이에 만장굴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기획한 이벤트가 1969년 만장굴 결혼식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제주의 지질을 연구하기 위해 동굴 탐사를 이어갔다. 1970년에는 성산읍 수산굴, 1971년 서귀포 미악 수직굴을 발굴했다. 1971년 다시 한번 세계가 놀랄 발견을 했다. 당시 세계 최장이던 길이 11. 7㎞에 달하는 빌레못동굴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속 탐사에서 구석기로 추정되는 유물도 발견되어 당시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1976년 부종휴는 신설된 제주대 식물학과 교원이 되어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다. 1980년 11월 22일 새벽,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그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향년 54세였다. 한라산 자락에 묻힌 부종휴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산과 식물, 커피와 파이프, 브람스와 카메라, 그리고 한라산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분”.
[노인이 된 꼬마 탐험대원은 선생님을 기리며 바이올린을 들었다]
2016년 만장굴 발견 70주년 행사에
탐험대원이었던 생존 노인 3명 참석
선생님에게 배운 바이올린 연주
제주는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화산 지형과 이에 따른 다양한 자연환경 및 식생을 가지고 있다. 이에 주목한 유네스코는 2002년 제주도 절반에 해당하는 면적을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고 2009년 다시 유네스코는 제주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오래전부터 제주를 과학적으로 탐사하고 세계에 알리려던 부종휴가 있었다.
1980년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선구적 업적을 알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나섰다. 특히 부종휴와 손을 잡고 만장굴을 발견한 꼬마 탐험대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늘 부종휴와 함께했던 그들은 1969년 만장굴에서 열린 부종휴의 결혼식에도 장성한 청년으로 참석해 행사를 도왔다. 제자들은 선생님과 함께한 강렬했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했고, 이들의 감동적인 증언이 결국 세상을 움직였다. 그렇게 부종휴는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6년 제주에서는 만장굴 발견 70주년 기념행사에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70년 전 부종휴의 손에 이끌려 만장굴을 발견한 어린이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세 명의 노인이 참석했고, 부종휴가 가장 좋아했던 ‘브람스 교향곡 3번’이 행사장에 울려 퍼졌다. 배고팠고 어렵던 시절, 부종휴는 있는 힘을 다해 아이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었다. 제막식 식전 행사로 80대 노인이 바이올린으로 서툰 연주를 했다. 김녕초등학교 시절, 이 노인은 부종휴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노인은 비록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이날 다시 바이올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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