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 조경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에서 촬영 중이다. 색도 키도 다른 꽃과 나무들에는 곧 저마다 이름표가 붙을 예정이다. 김상선 기자
광릉수목원, 대전엑스포 정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국립중앙박물관 정원, 호암미술관 ‘희원’, 선유도공원, 청계광장, 제주 오설록 티 뮤지엄, 경춘선 숲길, 서울식물원,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공중정원… 뭔가 남다른 정원이다 싶은 곳은 모두 그의 손길이 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정원들을 마주하고도 이곳을 꾸민 이가 누굴까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앞서 예를 든 곳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의 대표 작품들이다. 그 외에도 일일이 꼽기 어려운 공간들이 그의 손을 거쳐 명품으로 재탄생했다. 정씨는 국내 1호로 국토개발기술사(조경)가 됐고, 분야를 통틀어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기술사 자격을 딴 사람이기도 하다.
4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서울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가 개최된다.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반세기 동안 성실하게 걸어온 정씨의 조경 활동을 총망라한 자리다. 60여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아카이브 대부분이 최초로 공개되며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각종 기록자료 5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서 전시회, 다큐 영화 개봉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전경(2023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4월 17일에는 5년간 정씨의 사계절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도 개봉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친숙하고도 아름다운 공간들로 채워진 영상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미술관 전시장에서, 영화 시사회에서 두 번에 걸쳐 정씨를 만나 ‘자연과 사람 사이 다리 역할을 하는 조경가’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제1호 졸업생(1975년)이십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할 게 없어서 ‘주부생활’ 기자를 했어요. 그러다 늦게 대학원이 생겨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죠. 아주 어릴 때부터 꽃과 나무를 좋아했어요. 아버님이 기독교 계통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학교 안에 선교사들이 만든 정원이 있었고 아버지도 사택 정원을 직접 가꾸셨죠.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꽃 심고, 물 주고, 돌 나르고, 낙엽 치우는 일이 내 몫이었어요.”
영화에서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사과꽃 흩날리는 풍경이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고 회상하시던데.
“대구에서 멀지 않은 경산의 낮은 산 밑에 과수원이 있었어요. 새들이 와서 사과를 따 먹으려고 하면 할아버지 방에서 줄을 당겨 방울 소리를 울리게 했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아서 내 영감의 원천이자 꿈에도 못 잊는 곳이죠. 그렇게 토속적인 시골 정원과 서양식 정원을 두루 접하면서 자랐고, 언제부턴가 나의 정원은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으면(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포항에 있는 개인 주택 정원. 정 조경가는 자연과 벗삼아 걸으며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한다. [사진 영화사 진진]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의 아름다움을 일찍 배운 소녀는 백일장을 휩쓸 만큼 시를 잘 썼다. 부모님과 주변에선 시인이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소녀는 자연을 가꾸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왜 대학을 농대로 가신 건가요?
“꽃 심고 나무 심는 정원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서였는데 막상 가 보니 벼농사, 고구마농사, 약초 키우기만 가르치더라고요.(웃음) 결국 혼자 공부했어요. 학교 농장 꽃 가꾸는 것을 함께 했던 선배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랜드 스케이프 아키텍처(미국에서 조경가를 일컫는 명칭)’ 관련 서적을 많이 보내줬죠.”
시인 박목월 선생이 평생의 은인이라고.
“아버지와 평양에서 같이 공부하신 친구분이에요. 인생의 갈림길마다 큰 도움을 주셨죠.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요. 경북대학교 영문과에서 특채로 4년 장학금을 준다고 했지만 서울대 농대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거든요. ‘가난한 선비 집에서, 그것도 동생이 네 명이나 있는데 4년 장학금을 뿌리치고 농대가 웬 말이냐’며 엄마는 나를 방안에 가뒀고, 나는 나대로 금식하면서 버텼죠. 어느 편도 못 들던 아버지가 박목월 선생님께 의논했고, 박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이 애는 뭘 하더라도 영문과 가서 시 쓴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니 원하는 걸 하게 하자’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무시로 문인들이 모이는 다방 같은 데로 불러 커피를 사 주시면서 ‘술 마시지 마라. 남학생들 조심해라’ 등등 여러 가지를 조언하셨어요. 시를 쓰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시고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죠. 박 선생님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어요.”
경춘선숲길 철교 전경(2018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목월 선생의 ‘선견지명’이 맞았다. 소녀는 결국 땅에 꽃으로 나무로 시를 쓰는 사람이 됐다. 86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정부는 국제 행사를 충분히 치를 만큼 풍요롭고 세련된 풍경이 필요했다. 국립공원을 비롯해 문화유적지·고속도로·주거지역 주변에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고, 대학원 졸업 후 정씨의 손길이 차곡차곡 전 국토를 수놓기 시작했다. 물론 ‘조경’이라는 말조차 생경했던 시대라 매번 일이 녹록지는 않았다.
공원 작업 설득 땐 김수영 시인 ‘풀’ 읊기도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작업 때 공무원들 앞에서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읊으며 그들을 설득하셨다죠.
“공무원들이 엉뚱한 트집을 잡으니까요. ‘물길 하나 내놓고 이게 무슨 공원이냐. 세금 낭비다’ ‘목조 다리가 썩으면 어떡하냐’ ‘공원에 왜 화장실이 없냐’ 등등. 어떤 분은 억새를 심는다니까 ‘남녀 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냐’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웃음)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지역 주민들이 반대할 거다 했는데 웬걸요. 정작 주민들은 매일 나한테 고맙다면서 커피를 갖다 줬어요. 대한민국 공무원들 벽이 두꺼워서, 그 벽을 뚫느라 욕 좀 봤어요.(웃음)”
용인 호암미술관의 정원 ‘희원’ 작업이 큰 전환점이 됐다고요.
“개인 프로젝트를 처음 했던 곳이에요. 책장 하나가 자료일 정도로 오랜 시간 걸쳐 해낸 일이죠. 오픈식 때 홍라희 여사님 손님으로 왔던 분들이 회사·집·별장·연구소 등의 정원도 맡아달라고 해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죠. 이건희 회장님은 제 의견이면 뭐든지 믿어주셨어요. 당신이 지나가면서 하던 말도 다 기억한다고 제 별명을 ‘컴퓨터’라 부르셨죠.(웃음)”
‘
희원’을 보면서 ‘한국의 정원’의 특징들이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산악국가라 집 뒤에는 산이, 앞에는 강물·논밭이 있었죠. 담은 야트막해서 집밖의 산천이 다 내 것처럼 보여요. 자연을 빌려온다는 ‘차경’이죠. 뒤뜰에는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화계(花階)형식’ 정원이 있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땅에 경사가 있으니까 돌로 단을 만들고 꽃을 심은 거예요.”
용인 호암미술관 내 정원 ‘희원’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나리아재비’ 꽃이 시그니처 식물이라고 하던데,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요.
“초심을 잃지 말자는 거죠. 대학시절 학교 연습림 밖 축축한 땅에 미나리아재비 밭이 있었는데 그 길을 걷기를 좋아했어요. 소설 『빨강 머리 앤』에서 앤이 교회 가던 길에 모자가 너무 심심해 보인다면서 모자를 장식했던 길가 꽃도 미나리아재비였으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요. 지금의 내가 있게 도와준 선배와 함께 식물 이야기를 하며 걷던 길도 미나리아재비 밭이었죠.”
한국에서 자생하는 야생화를 이제는 만나기 어려운가요.
“계절마다 온천지에 우리 야생화가 잔뜩인데 관심이 없으니 꽃의 이름도 아름다움도 모르는 거예요. 다들 자극적인 외래종 꽃만 알고, 우리 들판에 피는 꽃들에는 무심하죠.”
조경가는 사람과 자연의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걸으면서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하이데거 등 많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명상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했죠. 우리나라는 공원을 만들어 놓으면 운동하는 사람밖에 없어요.(웃음) 나 죽기 전에 내가 조성해 놓은 자연과 벗하는 길에서 훌륭한 시인이 한 명 나왔으면 좋겠어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