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희 ‘모닥불’ ‘방랑자’ 담은 음반… 1970년대 학생들 소풍때 부르던 단골노래
[나의 현대사 보물] [50] ‘목마와 숙녀’ 가수 박인희
가수 박인희(78)에게 광화문은 잊히지 않는 장소다. 1970년대 신문로 파출소 인근 레코드방 ‘박인희의 집’은 지갑 가볍던 청춘들이 마음껏 노래를 듣는 사랑방이었다. 박인희 자신에겐 DBS(동아방송), MBC 등을 누비며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중 꿀 같은 쉼터이기도 했다. “청계천 거리에서 파는 해적판 말고는 레코드 원판을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었죠. 미국 살던 오빠를 통해 희귀 레코드를 공수해 가게 앞 스피커로 종일 틀었어요. 버스 기다리는 척하며 가게 처마 밑에 많은 청년이 머무르다 갔죠. 방송국 PD들, 연예인도 자주 왔고요.”
◇최초의 창작 포크송 앨범... 뚜아에무아
박인희(78)는 1969년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프랑스어로 ‘너와 나’)로 데뷔했다. 1집 ‘약속’은 국내 최초로 창작 포크송을 앨범에 실은 사례다. 박인희가 쓴 지적인 가사에 이필원이 붙인 멜로디가 호평을 받았다.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던 당시 청년 문화를 이끌었다.
정작 스스로 품은 정체성은 가수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라 중·고교 내내 수학여행도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마이크 앞에만 앉으면 말이 술술 나와 방송인이 될 줄 알았어요.” 고교(풍문여고)·대학(숙명여대 불문과)에서 잇달아 방송반 부장을 지냈다.
한때 연극인의 꿈도 품었다. 여고 2학년 때 전국 연극 경연대회에 학교 대표이자 ‘춘향전’ 주인공으로 참가하게 됐다. 당시 고3 선배이던 배우 김을동이 방자 역할로, 손숙이 조연출을 했다. 훗날 손숙과 결혼한 고(故) 김성옥이 총연출을 맡았다. “나중에 들으니 손숙 선배가 그때 춘향 역을 하고 싶었는데, 밀양 출신이라 사투리가 심해서 못 한 게 한이 됐대요. 그게 연극계로 나가는 계기가 됐다고…. 정작 저는 부모님 반대에 부딪혀 연극은 포기했어요.”
대학 졸업 후 1970년대 음악 인재들의 집합소인 명동 ‘미도파 살롱’에서 운명이 바뀌었다. 지인이 운영하던 이곳에서 노래 행사 MC를 맡아 한두 곡 부른 것이 이필원의 눈에 들었다. 쎄시봉이 윤형주, 이장희 등 통기타 본진이었다면 미도파는 윤항기, 최헌, 신중현 등 록그룹 본진이었다. 이필원도 전언수, 이태원 등과 록그룹을 하고 있었다. “미도파 백화점 맨 위층을 빌려 DBS, CBS 등이 공개방송 홀처럼 쓰던 곳이었죠. 단골 방문객이던 이해성(DBS 세 시의 다이얼), 조용호(TBC 쇼쇼쇼), 김진성(CBS 세븐틴) 등 엘리트 PD들이 저희 노래를 듣게 되면서 방송 스카우트가 이어졌고요.”
◇듀엣 해체 후 ‘모닥불’ ‘얼굴’ 솔로 1집
하지만 혼성 듀엣을 오해한 염문설이 퍼지면서 팀 해체를 맞았다. 1971년 뚜아에무아가 TBC 가요대상을 받던 당시 국내 1호 라디오 DJ로 이름 날리던 최동욱을 둘러싼 경쟁이 벌어졌다. 결국 TBC에서 그를 데려갔고, DBS는 그의 간판 프로이던 ‘0시의 다이얼’엔 윤형주를, ‘3시의 다이얼’엔 박인희를 급히 섭외해 진행자로 앞세웠다. 이후 방송가에선 “윤형주와 박인희를 듀엣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러다 뚜아에무아 해체 기사가 났어요. 여러 차례 주변에서 재결성 제의를 받았죠. 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남는 게 아름답다 생각했습니다.” 1972년 솔로로 데뷔했고 1976년까지 앨범 6장을 냈다. 솔로 1집에서 직접 멜로디를 붙인 ‘모닥불’과 ‘돌밥’을 비롯해 ‘방랑자’ ‘봄이 오는 길’ 등 노래는 젊은이들이 소풍 때마다 불 피워 놓고, 수건돌리기 놀이 할 때 트는 필수곡이었다. 하지만 박인희는 1981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하루 6시간씩 라디오 생방송을 하던 생활에 매너리즘이 찾아왔다”고 했다.
◇여중 동창 이해인 수녀와 ‘단짝’
박인희는 시집 두 권과 이해인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로 수필집(1989년)을 내기도 했다. 이해인 수녀는 풍문여중 시절 단짝이다. 솔로 앨범에 실은 ‘얼굴’은 친구 이해인 수녀를 떠올리며 직접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등에 멜로디를 붙인 ‘시 낭송 곡’들도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타임지나 시집 한 권은 옆구리에 꼭 끼고 다니고, 시 하나쯤은 외워야 하던 시절이었어요.”
2016년 35년 만에 가수로 복귀한 계기도 그 시절 청년 팬 때문이었다. 박인희는 “1994년 미국 새벽 시장에서 마주쳤던 한 팬이 위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그 친구가 내 라디오에 보냈던 엽서도 남아 있더군요. 생전 제 노래를 다시 못 들려준 게 어찌나 속상하던지….”
박인희는 6월 14일 서울 연세대 대강당에서 8년 만의 콘서트를 개최한다. “누군가의 젊은 날 속에서 저는 그들의 베르테르였고 로테였대요. ‘그날이 언제일까/ 우리 다시 만날 날/ 가슴에 문을 열고 너를 반겨 줄 것을’(자작 시 노래 ‘재회’ ). 그때는 멋모르고 썼던 시들이 지금 콘서트 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게 신기하죠. 내 세월의 역사가 그때의 청춘을 떠올리는 무대로 계속 오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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