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 ‘흰 바람벽이 있어’ 바구지꽃의 정체는?
[김민철의 꽃이야기]
<2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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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함께 시인의 절창 중 하나로 꼽힙니다. 흰 바람벽이 화자 의식의 스크린 구실을 하는 절묘한 착상으로 쓰여진 시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인데, 이 시 마지막 부분에 생소한 ‘바구지꽃’이 나옵니다.
◇바구지꽃, 시인이 높이 여긴 4가지 중 하나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중략)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 4가지 중 하나로 바구지꽃을 든 것입니다. 시인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외롭게 눈을 맞고 서 있는 갈매나무로 표현했다면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바구지꽃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구지꽃은 백석의 다른 시 ‘야우소회(夜雨小懷)’ 끝부분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정다운 것들 가지, 명태, 노루, 뫼추리, 질동이, 노랑나비, 바구지꽃, 메밀국수, 남치마, 자개, 짚세기, 그리고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밤이로구나>
바구지꽃이 나오는 대목은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에 비슷한 톤으로 나오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백석의 시는 ‘문장’ 1941년 4월호에 실렸고 윤동주의 시는 같은 해 11월 쓴 것이라고 합니다.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 전체를 원고지에 필사할 정도로 시인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별 헤는 밤’에 백석의 영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박꽃이냐 미나리아재비냐
그런데 시에서 ‘바구지꽃’은 어떤 꽃일까요. 2007년 나온 책 ‘방언 이야기’에 들어있는, 유종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논문 ‘시와 방언’엔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유 교수는 이 글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바구지꽃은 박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유 교수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백석 시에 나오는 여러 시어 풀이를 대조한 책 ‘다시 읽는 백석 시’를 보면 ‘정본 백석 시집’ 등 5권의 책이 모두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 평론계에서는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석 평전’을 쓴 안도현 시인은 여러 기고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에 나오는 ‘바구지꽃’은 박꽃이 아니라 미나리아재비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백석의 다른 시 ‘박각시 오는 저녁’에 나오는 ‘바가지꽃’은 박꽃이 맞지만, ‘바구지꽃’은 미나리아재비꽃이라는 것입니다(한겨레신문 2013년 기고 등). 흰 박꽃과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의 이미지 차이는 큽니다.
이 주장은 무시할 수 없는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물들을 정리해놓은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미나리아재비를 찾아보면 북한명이 ‘바구지’라고 나옵니다. 아마 안도현 시인은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후 바구지꽃을 미나리아재비로 해석해놓은 글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습니다.
다만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바구지꽃을 미나리아재비로 해석하면 좀 생뚱맞고, 박꽃으로 보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바구지꽃 바로 앞에 나오는 것이 ‘초생달’이라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고, 백석 시에 나오는 다른 시어들도 다 흔하고 토속적인 것들이라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나리아재비는 주로 산지의 볕이 잘 드는 풀밭에서 볼 수 있지만 논·밭둑에서도 자라기 때문에 토속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독초의 하나여서 박꽃처럼 우리 생활에 밀접한 식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네이버 등을 검색해보면 다시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해석해놓은 글들이 늘고 있습니다. 고교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흰 바람벽이 있어’를 해석해 놓은 천재교육 문학 자습서 등 참고서들도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정본 백석 시집’의 저자인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백석이 시에서 나열한 초승달, 바구지꽃, 짝새, 당나귀 등 4가지의 공통점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 사람들 눈에 잘 띠지 않으면서도 헌신적이고 조용히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임을 고려했을 때 바구지꽃을 박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백석 시에서 바가지, 바구지 식으로 같은 대상을 여러 가지로 표기한 경우는 적지 않다”면서도 “하지만 절대 미나리아재비는 아니라고 반박할 근거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정확한 것은 시인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백석은 해방 후 북한에 잔류했다가 계급성과 사상성이 부족하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59년 ‘삼수갑산’의 오지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으로 ‘유배’를 가서 여생을 양치기로 살다 1996년 사망했으니 물어볼 길도 없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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