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옷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동물에서 사람이 되었던 날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 그 날
감추어야 할 곳을 알게 된 그 날
옷은 그로부터 넌지시 위계를 가리키는
헛된 위장의 무늬로
입고 벗는 털갈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진화하였다
우화羽化의 아픈 껍질을 깨고
비로소 하늘을 갖는 나비를 꿈꾸며
나는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옷을
벗고 또 벗었으나
그 옷은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주었던
그 누구의 눈물과 한숨일 뿐
내 마음이 허물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가만히 내리는 빗소리
나를 대신하여 허물을 벗는 이의
아픈 발자국 소리로 사무쳐 오는 밤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옷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싶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가장과 위선의 허물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문신으로
나를 향해 먼 길을 오는 이의 기쁨으로
이름 짓고 싶다
'안부 (2021.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6 (0) | 2023.11.17 |
---|---|
천국 (0) | 2023.11.13 |
탑이라는 사람-선림원지 3층 석탑 (0) | 2023.10.30 |
반골 反骨 (0) | 2023.10.26 |
고시원 (0) | 2023.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