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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수에즈운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6. 15. 14:20

[숨어있는 세계사]

아시아·유럽 잇는 최단 해로… 기원전 2000년 첫 건설 시도

입력 : 2023.06.1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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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운하

                                                        ▲ 수에즈운하의 모습. /브리태니커

 

이달 초 모래 폭풍이 이집트 카이로를 덮쳤습니다. 거대한 붉은 모래 벽이 수에즈운하를 집어삼키고, 일부 항구는 폐쇄됐다고 해요. 중동에서는 매년 이맘때쯤 모래 폭풍이 불지만, 올해는 그 강도가 더욱 높아 우려가 큽니다. 게다가 세계 물류의 약 10%가 지나는 수에즈운하가 폐쇄되면 경제적 손실도 막대할 거예요. 실제로 2021년 3월 화물선 에버기븐호가 모래 폭풍에 좌초돼 6일간 수에즈운하를 막았는데, 600억달러(약 75조9000억원)어치의 화물이 정체됐다고 해요.

수에즈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해로(海路)예요. 이집트 시나이반도 서쪽에 길이 164㎞(현재는 193㎞)로 건설돼 지중해 포트사이드 항구와 홍해 수에즈 항구를 연결하고 있답니다. 누가 처음 이곳에 땅을 갈라 운하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고대 수에즈운하 건설 시도

이집트에 운하를 건설하면 물자 교류가 편리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고대부터 있었어요.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통로를 뚫지는 않고, 이집트의 물자가 집결하는 나일강의 삼각주 지역에서 홍해로 통하는 수로를 내려 했어요. 최초로 운하 건설을 시도했던 사람은 기원전 2000년쯤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로 추정됩니다. 그는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려 했지만, 홍해까지 운하를 파는 것은 실패합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600년쯤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코 2세가 나일강 삼각주의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 건설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부정적인 신탁(神託)을 받아 공사를 중단했다고 해요.

기원전 525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기원전 550?~기원전 330)가 이집트를 정복합니다. 이때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열었던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가 운하 공사를 재개했어요.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 1세가 완성한 운하는 폭이 넓어서 삼단노선 두 대가 노를 펼친 상태에서 쌍방 통행이 가능했고 횡단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고 묘사했어요. 수에즈운하 근처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념한 비석 파편들이 발견됐어요. 여기엔 이렇게 적혀 있어요. '왕 다리우스가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에서 출발해 이집트를 정복했다. 나는 이집트의 나일강에서 페르시아의 바다까지 운하를 파라고 명령했다. 내가 명한 대로 이 운하를 팠더니 배들이 이집트에서 운하를 거쳐 페르시아로 갔다.' 다리우스 1세가 운하 건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걸 알 수 있죠.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56~기원전 323)의 제국을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기원전 30)의 지배를 받게 되고, 프톨레미 2세가 운하를 다시 정비했어요. 이후 1000년간 운하는 파괴됐다가 재개통하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8세기에는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만수르가 반란군을 막기 위해 운하를 완전히 메워버렸지요.

측량 실수로 미뤄진 운하 건설

수에즈운하에 다시 관심을 가진 국가는 중세 시대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베네치아 공화국입니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 아프리카 남쪽 끝 희망봉에 도달했어요. 아프리카의 끝을 알게 됐으니 인도양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건 시간문제였죠. 베네치아 공화국은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게 될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이집트에 운하를 파자는 아이디어를 건의했고 진지하게 논의됐지만, 비용 등 문제로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18세기 말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고대 운하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측량을 실시했어요. 측량사는 홍해의 수위가 지중해의 수위보다 높다고 착각해 운하 건설을 반대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이 조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운하 건설은 반세기 후로 미뤄지게 돼요.

수에즈운하 둘러싼 소유권 분쟁

19세기에는 운하에 대한 연구가 다시 이뤄져 지중해와 홍해 간 수위 차이가 거의 없다는 걸 알아냈어요. 1854년 이집트 태수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게 운하 건설 특허권을 줬어요. 1858년 레셉스는 '만국 수에즈 해양 운하회사'를 세우고 주식을 판매합니다. 운하 소유권은 개통 후 99년 동안 회사가 갖다가 이후 이집트 정부에 이양하기로 했어요.

운하 공사는 1859년 시작돼 10년 넘게 걸렸어요. 개통 이후 세계 무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죠. 수에즈운하 덕분에 영국 런던~싱가포르 항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을 거칠 때 2만4500㎞였던 것이 1만5027㎞로 줄었어요. 런던~인도 뭄바이 항로는 1만9800㎞에서 1만1600㎞로 단축됐답니다.

1875년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집트의 새로운 태수 이스마일 파샤는 주식 지분을 매각했어요. 당시 인도로 가는 항로가 절실했던 영국의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국제적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400만파운드를 빌려 이집트 지분을 모두 사버려요. 이후 이집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1882년 영국은 수에즈운하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침공해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었어요. 서양 열강들은 영국이 자유로운 항행을 방해할까 우려했죠. 1888년 튀르키예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모여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합니다. 군함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선박이 수에즈운하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고, 운하에서의 적대 행위나 요새 건설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어요.

1952년 이집트의 장교 나세르가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1956년 대통령이 된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해요. 운하에 대한 지분을 잃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제2차 중동 전쟁(수에즈 전쟁)을 일으켰어요. 하지만 국제연합(UN)의 개입으로 군대를 철수하면서 결국 수에즈운하는 완전히 이집트 소유가 됐답니다. 다만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따라 수에즈운하는 모든 국가에 항상 개방돼 있어요.

 2016년 미항공우주국(NASA)이 촬영한 수에즈운하 항공 사진. /미 항공우주국(NASA)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식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만국 수에즈 해양 운하 회사'를 세운 페르디낭 드 레셉스. /이집트 수에즈운하 관리국
 수에즈운하 주식을 영국에 매각한 이스마일 파샤. /이집트 수에즈운하 관리국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