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히데요시의 도발이었다
[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침공
임진왜란은 16세기 세계에서 둘째로 사상자가 많았던 전쟁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 대륙을 침공했는지에 관한 정설은 아직 없다. 일본 통일 이후 남아돌던 군사력의 배출, 1591년 아들 쓰루마쓰의 급사에 따른 보상심리, 명나라와의 무역 문제 등이 거론되어 왔다. 일본 주재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Luís Fróis)는 히데요시의 개인적 공명심에 주목하기도 했다.
16세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한 프랑스 종교전쟁처럼 이 전쟁의 배후에도 관념의 충돌이 존재했다. 현세(現世)나 후세(後世)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생사를 건 전쟁으로 이어졌다. 관념의 차이는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들에 반영되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만력제 시대의 조선전쟁)이라는 명칭은 조선과 명(明)나라의 유교 성리학적 관념을 반영한다. 베이징의 황제, 즉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질서를 평화로 보는 관점이다. 전쟁을 일으킨 왜(倭)는 1635년까지 존속한 북원 몽골이나 만주의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난적(亂賊)에 불과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분로쿠 시대의 전쟁)라고 부른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관은 거부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히데요시를 가리켜 “저 대물(大物)은 명과 인도를 정복하라고 명령하더라도 거절하는 일은 없을 기성(氣性)”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고 했던 것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다. 어떤 경우든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다.
예수회와 오다 노부나가의 그레이트 게임
16세기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를 통한 교류는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유럽에서는 1517년 기독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판을 통해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가톨릭은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유럽 전역에서 종교전쟁은 1648년까지 지속되었다.
전직 군인이었던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1540년 창립한 예수회(Societas Iesu)는 절대 청렴, 절대 순복의 정신으로 가톨릭이 유럽에서 상실한 것 이상의 교세를 유럽 이외 지역에서 만회한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오늘날 아메리카는 유럽보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갖게 되었다.
예수회 창립 회원이었던 하비에르(F. Xavier)는 1549년 규슈에 상륙했다. 그의 상륙은 1543년의 조총(鳥銃) 전래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가톨릭을 통해 군사화된 일본의 종교 조직들을 견제하고, 새로운 문물을 수용했다. 일본의 기리시단(吉利支丹, Christian)은 1583년 200개 교회 약 15만 명, 1591년 20만 명에 육박했다.
노부나가의 부하 히데요시는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과 필리핀 마닐라의 에스파냐인들을 통해 세계 정세를 파악했다. 1579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는 마카오에 있는 포르투갈인들이 왜구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1576년 마닐라를 거점으로 명을 침공하는 계획이 세워졌었다. 에스파냐의 왕이자 포르투갈의 왕인 펠리페 2세의 마닐라 총독 산데(Francisco de Sande)는 수천 명의 에스파냐인들에 더해서 명나라 내의 반도(叛徒)들과 일본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 히데요시도 1586년 3월 예수회 신부 코엘료(Gaspar Coelho)에게 대륙 침공을 위해 포르투갈의 배와 승무원을 요청했다. 1586년 예수회 신부 산체스(Aloso Sanches)는 필리핀 주둔 에스파냐인들과 본국에서 지원되는 약 1만2000명, 인도인 약 5000명, 그리고 일본인들로 구성되는 정복군을 구상했다. 이 계획은 같은 해 4월 마닐라 총독과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본국에 건의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뒤 유럽에 더 골몰했다.
히데요시의 새로운 세계 인식과 망념(妄念)
예수회 선교사 발리그나노(Alessandro Valignano)는 예수회 신부들이 정치 활동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탁발 선교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런 방식은 유럽 문명에 대한 무시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발리그나노는 유럽 문명을 일본에 보여주고, 예수회의 선교 성과를 유럽에 알리고자 했다.
기리시단 다이묘(지방 영주)들의 친척과 측근 소년들로 구성된 천정견구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 1582년 2월 유럽에 파견되어 펠리페 2세,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 등을 알현했다. 8년 뒤인 1590년 7월 귀국한 사절단은 이듬해 3월 히데요시를 만났고, 유럽에서 가져온 책, 천체관측기, 지구본 등과 함께 유럽 문명을 소개했다. 1587년 히데요시가 가톨릭 금교령을 선포한 지 4년 뒤의 만남이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사절단원들은 명나라가 넓다고 해서 강한 나라는 아니라고 보았다. 아메리카나 아프리카가 더 넓다고 해서 에스파냐나 이탈리아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니듯이 국력은 영토나 인구의 크기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럽 문명과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지리정치적 인식을 갖게 된 히데요시는 16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상륙 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수도인 베이징에 거소를 마련하고 누군가를 (그곳에) 앉혀둔다. …가능한 한 천축(天竺·인도)까지 빼앗는다.” 히데요시의 부채에 그려져 있던 지도는 조선 중후기에 유행했던 천하도(天下圖)에 비해 훨씬 정확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조선의 저항과 명의 대응을 과소평가했다.
평민 출신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낸 영웅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히데요시의 이름은 침략 전쟁의 대명사가 되었다.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이나 신성로마제국을 끝낸 나폴레옹처럼 되지도 못했다. 결정적으로 히데요시는 전쟁의 명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근대 국제법이 성립되기 이전이었다 하더라도 왕릉 도굴, 민간인 살해 및 납치, 도자기 약탈 등 더러운 전쟁을 7년 동안 이어갔다. 히데요시가 1598년 9월에 죽자 전쟁은 끝났다. 유라시아대륙 반대편에서 명나라 정복을 꿈꾸던 펠리페 2세도 불과 닷새 전인 9월 13일 숨을 거뒀다.
전쟁 이후 조선에서 더 강해진 유교 성리학
16세기 말 명의 만력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기 전에 파병하여 조선반도에서 싸우는 것이 상책이었다. 조선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와의 유교 성리학적 유대도 두터웠다.
19세기 말까지 쇄국을 고집하다 망국을 초래했던 유교 성리학에 대한 21세기의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조선은 유교 성리학에 기대서라도 나라를 지켜야 했다. 바다에서 일본군의 병참선을 끊었던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나 행주대첩을 이끈 충장공 권율(1537∼1599)의 충군애국(忠君愛國) 정신도 유교 성리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이 양명학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성리학에 대한 조선의 집념은 유별났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유교 성리학적 관념의 재생산이 필요했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1주갑(周甲, 60년)이 되는 1704년(숙종 30) 조선왕실은 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구원군을 보내 조선을 다시 만든 만력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감사하는 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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