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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도봉구 ‘양말 메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6. 30. 16:01

4년 새 25% 줄폐업…구형 기계 탓 중국에 밀린 양말산업

중앙선데이

입력 2023.06.24 00:01

업데이트 2023.06.2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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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도봉구 ‘양말 메카’

21일 경기도 양주 영성산업사에서 한 관계자가 생산된 양말을 정리하고 있다. 이 기계는 폐기물을 최소화한 친환경 기계다. 최기웅 기자

“드르륵, 드르륵” 건물 지하에선 미싱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양말 시야기 하실 분’, ‘양말 부업 모집.’ 골목 어귀마다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동네. 하지만 이곳은  ‘양말 생산의 메카’다. 전국 양말 생산량의 40% 차지하는 서울 도봉구다. 양말의 왕국이다.

1970년대 대형 양말공장 두 곳이 먼저 터를 잡았다. 당시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았던’ 도봉구 창동 일대는 임대료가 비교적 저렴해 도시형 소규모 공장에 최적화된 입지였다. 미싱은 동대문이요, 양말은 도봉이라던 시절이었다.

 

내수시장 한계 있어, 출혈 경쟁 심해

 

44년째 양말을 만드는 강대훈 대운섬유 대표는 “1990년대 후반 대형 공장들이 규모를 줄이면서 갈라져 나가 건물마다 작은 양말공장이 들어섰고, 자연스레 이 일대가 양말의 왕국이 된 것”이라며 “첨단기술처럼 떼돈을 벌어다 준 건 아니었지만 서울의 소공인들을 떠받쳐온 산업”이라고 소개했다. 강 대표는 양말 수십만 켤레를 팔았지만, 대박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부심 하나로 버텼다.

 

그러던 그의 양말 인생은 2019년 큰 위기를 맞이했다. 양말이 사양 산업으로 취급되며 문을 닫는 업체는 간간히 있었지만, 업체들이 연달아 폐업한 건 처음이었다. 2019년 302개였던 도봉구 양말 제조업체는 올해 초 228개로 4년 새 25%가 사라졌다. 강 대표는 “기존 수출업자들의 발길이 뚝 끊기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한번 떠난 수출업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없다 보니 속은 타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시름만 깊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인근에서 양말 제조업체를 운영하던 동료는 사업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약 1억 달러 흑자였던 양말류 무역수지는 2018년 적자로 전환된 뒤 지난해에는 4406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한번 끊긴 수출 물량은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봉구의 S 제조업체 섬유 대표는 “매출의 50%를 차지하던 수출이 10% 수준으로 줄어들어 이익보다 지출이 많아지고 있는 상태”라며 “내수 시장은 한계가 있는데, 적은 파이로 국내 업체끼리 출혈 경쟁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수출업자들은 왜 갑자기 발길을 끊었을까. 강 대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도봉지역 양말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인근 양말 제조업체들과 도봉양말협동조합을 만들고 함께 원인 분석에 나섰다. 재료비·인건비 상승, 구인난 등도 맞물렸지만 핵심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중국 양말 제조업체에서 사용하는 친환경 기계에 눈길이 갔다. 기존 기계에서는 양말 한 짝당 3g씩 나오던 봉제밥(산업폐기물)도 나오지 않고, 양말 제조 공정 중 3개의 공정을 자동화할 수 있어 생산성도 높았다. 강태환 태환강직 대표는 “수출 물량이 끊이지 않는 업체를 찾아가 보니 친환경 중국산 기계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고, 폐기물도 줄인 공통점이 있었다”고 전했다.

21일 경기도 양주시 영성산업사 공장에서 영성산업사 백기출 대표가 친환경 양말생산 기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그중 하나인 경기도 양주의 백기출 영성산업사 대표는 “친환경 기계를 도입한 이후 떠나려던 바이어들이 다시 계약을 맺자고 돌아오기도 하고, 새로운 바이어도 찾아왔다”며 “빚을 내서 기계를 샀기에 출혈은 컸지만 이젠 1년 치 오더가 꽉 찬 상태”라고 전했다. 지난 21일 방문한 이곳 공장에서는 신형 기계와 구형 기계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신형 기계에서 나온 양말은 바로 신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이곳 공장에서 친환경으로 생산되는 양말은 미국에 수출돼 아마존에서 판매된다. 강태환 대표는 “신형 기계가 우리 도봉의 고령화된 양말 제조업이 부흥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조합원들에게 신형 기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적극 설득에 나섰다”고 밝혔다.

21일 경기도 양주시 영성산업사 공장에서 한 관계자가 생산된 양말을 정리하고 있다. 영성산업사가 도입한 양말생산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폐기물을 최소화해 친환경 기계로 알려져 있다. 최기웅 기자

 

도봉구에서도 목돈 대출을 받아 친환경 기계를 도입하고 싶어하는 업체들이 적잖았다. 하지만 영세업자가 대다수라 고액의 신형 장비를 선뜻 구매할 수 없었다. 성태민 삭스타즈 대표는 “10년 전부터 새로운 기계에 투자해야 한다고 권유했는데,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이곳 영세업체들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그 사이 주도권을 중국·인도네시아 등에 빼앗겨 회복이 어려운 상태”라고 설명했다. 큰돈을 들여 신형 장비를 구입해도, 수출길이 되살아날지 장담 못한다는 말이다.

 

중국은 빨랐다. 중국 양말 제조업의 대부로 불리는 최송호 명광기계유한회사 대표는 “한국 기계 없이는 제조 자체가 불가능했던 중국 양말 시장이 5~6년 전 친환경 신형 양말제조기계를 도입하자 크게 성장했고, 저장성 주지시는 ‘국제 양말의 수도’가 됐다”고 설명했다. 중국 양말 수출의 부상은 공교롭게도 한국 양말류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됐던 시기와 맞물린다. 최 대표는 “중국 정부는 지난 3년간 구형 양말제조기계를 신형으로 바꿀 경우 약 30%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며 양말산업에 투자했다”며 “한국은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안 된다”고 전했다.

 

대다수 영세, 장비에 큰 돈 투자 머뭇

도봉구 양말공장에서는 30년이 넘은 구형 기계가 가동되고 있다. [사진 도봉양말협동조합]

 

지역의 뿌리 산업이 흔들린다는 것을 파악한 서울 도봉구도 뒤늦게나마 지원에 나섰다. 도봉구는 올해 구내 양말판매지원센터를 구축하고, 양말제조업체의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등 약 2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오는 10월에는 미국 LA에서 양말산업의 수출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해외시장 개척단’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양말 제조업체들은 지자체 지원책에 냉소적이다. 강태환 대표는 “전쟁터에 총을 들고 가야 하는데, 비파형 동검을 들고 나가라는 꼴”이라며 “본질적인 원인은 생산성이 떨어진 구형 기계에 있는데, 지자체는 기계 도입에 일절 관심이나 지원이 없다”고 지적했다. 백기출 대표는 “기계를 사기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을 지원해주는 창구를 두드렸지만 어느 하나 지원해주는 곳이 없었다”며 “중국처럼 지원금은 못 주더라도 저리에 장기 대출을 해준다든가 등의 방법이 있을 텐데, 사양산업이라는 이유로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니 ‘알아서 살아남으라’라는 느낌밖에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양말산업 또한 금형·용접처럼 국가 뿌리 산업으로 지정해 적어도 사업을 영위할 수는 있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호소했다.

 

프로축구단·대형마트·온라인쇼핑몰 등 거래는 이뤄지지만, 수출 없는 양말 산업은 맨발이다. 맨발로는 힘차게, 오래 달릴 수 없다. 양말 산업의 메카 도봉구는 10년 뒤에도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도봉구 쌍문동에서 40년째 양말을 제조 중인 T산업 대표 김모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양말이 천직이에요. 반도체·전기차보다 모양새도 관심도 떨어지지만, 우리나라를 지탱해온 산업이잖아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양말을 만들고 싶어요.”

악화일로 도심제조업…외국처럼 장인 육성·관광 연계 필요

 

1960~70년대 을지로, 영등포, 구로 일대에서 시작된 의류봉제, 기계금속, 주얼리, 인쇄, 수제화 등 5대 도심제조업은 서울 산업의 뿌리 역할을 해왔다. 통계청에 따르면 서울시는 전체 제조업 중 소규모 제조업(고용자가 10인 미만인 제조업장)이 9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도시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산업환경이 나아진 것과 달리 도심제조업은 연일 악화일로를 겪고 있다. 시장변화에 뒤쳐져 노후화된 노동환경, 저임금, 고령화된 노동자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정숙희 도심권 서울특별시 노동자 종합지원센터장은 “도심제조업 사업장에 방문해보면 여전히 환기시설 하나 없는 사업장이 상당히 많다”며 “노동환경이 좋지 않으니 채용을 도우려 해도 구직자가 없고, 작업 기계 구매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개점휴업 상태”라고 전했다.

 

최근 10년 새 서울 도심지역의 임대료가 수직으로 상승했다는 점도 생계형 자영업자인 제조업 고용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도심제조업이 무너지기 시작한 주된 원인은 결국 임대료 상승 때문”이라며 “도심 내 봉제, 인쇄 공장들의 매출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임대료가 오르니 도심 바깥으로 내몰리면서 자연스레 경쟁력이 약화했다”고 설명했다.

 

도심제조업은 소비자의 수요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도시의 산업유산 역할을 할 수 있다. 인쇄·봉제 같은 분야는 비용만 생각해 기술이 모두 타국으로 넘어가면 다시 살리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이탈리아의 주얼리·가죽제품, 스위스 시계처럼 공방 장인들을 육성하고 향후 관광산업까지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윤 교수는 “시대 변화에 자연스레 도태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타 산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계에 쏟는 관심의 1%만이라도 도심제조업에 쏟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