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은 인조…
조선은 明과 淸의 이중적 제국 질서 속으로 들어갔다
[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6] 만주의 위협과 ‘병자호란’
1592년 이후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전쟁에 대한 기억은 워낙 강렬해서 다른 기억들을 지워버린다. 임진왜란 이전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더 오래된 위협은 남쪽 바다보다 아코디언처럼 경계선이 요동쳤던 북쪽 대륙으로부터 왔다.
히데요시가 침략하기 5년 전인 1587년 녹둔도를 침략했던 만주인들은 육군으로 복무 중이던 이순신 등에 의해 격퇴되었다. 율곡 이이의 양병론이 남쪽보다 북쪽의 위협을 겨냥한 방비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율곡은 1583년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함경도 방면에서 남침했을 당시 병조판서로 있다가 이듬해 별세했다.
몽골제국에 정복당하기 이전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천리장성 너머 동북쪽에는 귀순주(歸順州)를 설치하여 만주인들의 귀순을 받아들여 영토를 넓혔다. 고려가 두만강 이북의 공험진(公嶮鎭)까지 9진을 개척한 후 만주인들에게 준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땅을 받은 우야소의 동생 아골타는 만주인들의 영웅이 되어 1115년 금(金)나라를 세웠다.
신라 계승 의식을 표방하기도 했던 이들은 흔히 여진(女眞)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만주황실에서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그들의 원래 이름은 만주였다. 만주는 산스크리트어의 ‘만주슈리(Manjushri)’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만주슈리를 한자로 음역하면 문수보살의 문수(文殊)가 된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골제국에 흡수당한 이후 만주인들은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멀리 하면서 만주인들도 조선 왕실에서 멀어졌다. 고려시대 윤관이 세웠던 선춘령비와 세종 때 설치된 4군 6진의 외곽선이 만주와 조선 사이의 잠정적 경계선이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전쟁 중에 부흥한 만주
히데요시의 조선전쟁 7년 기간은 만주 부흥의 시간이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두만강을 넘어 북진했지만 만주인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1595년 누르하치(1559~1626)는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將軍) 칭호를 받았다. 1599년부터는 몽골 문자를 개량한 만주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현재 베이징의 자금성 현판들에 한자와 함께 남아 있는 글자들이 청나라 시대 자금성 주인들의 제1공용어였던 만주문자이다. 임진왜란이 정지 중이던 1595년 여름 평안도 위원(渭原)에서 인삼을 캐던 만주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압록강 변에 만주인들이 집결했고 겨울에 강이 얼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선조는 급히 신충일(申忠一)을 사신(使臣)으로 파견했다. 무관이었던 신충일은 목숨을 걸고 설전(舌戰)을 벌여 혈전(血戰)을 막았다.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슈르하치는 신충일이 전해 준 비공식적 선물들을 기쁘게 받았다. 그들이 더 바랐던 것은 조선이 그들을 인정해주고, 명나라와 만주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신충일은 누르하치에게 외교적 예를 갖추는 한편, 훗날을 대비하여 자세한 지도들도 작성해 두었다<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그러나 그가 귀환했을 때, 성리학자들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였다고 비난했다.
과장된 광해군의 “자주적 중립 외교”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축출되기 전까지 광해군이 명과 만주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중립 외교”로 호란(胡亂)을 막았다는 설이 있다. 1933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던 무렵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과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했던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876~1940)의 ‘광해군 시대의 만선관계’가 출간된 이후 이런 정치적 해석은 꾸준히 번창해왔다. 치욕을 당한 인조와 대비되는 광해군의 “자주적 중립 외교” 신화는 후대의 민족적 자존심도 살려 주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명의 출병 요구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고 해서 “자주적 중립 외교”를 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광해군은 국내 정치적 불안과 군비 부족으로 인해 대규모 파병이 어려웠다. 물론 인조는 더 심했지만 광해군도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 만주인들을 차별하고 외교적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 광해군이 명과 만주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고 보는 것은 상당 부분 광해군 축출의 정당성을 명나라 황제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인조 측 주장 쪽에 기운 것이다.
1619년 사르후대전에서 만주 군대에 맞선 조·명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조선 장수 강홍립(姜弘立, 1560~1628)에게 광해군이 사전에 밀지를 주어 만주 쪽에 투항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당시 명나라가 광해군이 손절을 고민할 정도의 동맹국은 아니었다. 강홍립의 종사관 이민환에 따르면 조선군은 기회를 보아 만주 쪽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 싸우다가 전의를 상실하여 투항했다<책중일록(柵中日錄)>.
1627년 누르하치의 8남 홍타이지가 평안도 앞바다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진압한다며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양국은 형제 관계를 맺되 명나라와의 특수 관계를 인정하는 정묘화약을 맺었다. 포로로 잡혀 있던 강홍립은 이 화약 체결에 기여했고, 다음 해인 1628년 사망했다. 2년 뒤에 나온 ‘강로전(姜虜傳)’은 강홍립를 오랑캐에 부역한 인물로 묘사했다. 1933년 이후 광해군을 “자주적 중립 외교”를 펼친 지도자로 미화하는 주장만큼 인조 시대의 현실 정치가 반영된 인물 평가였다.
만주제국에 정복당한 조선
1636년(병자)에서 1637년(정축)으로 넘어가는 겨울 만주인들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는 성에서 내려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치욕적 평화협정(정축화약) 이후 조선은 정신적 제국으로서의 명과 현실적 제국으로서의 청이 중첩된 이중적 제국 질서 속으로 들어갔다.
1639년 12월 만주어, 몽골어, 그리고 한자로 쓰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조선인들에 의해 세워졌다(현재 송파구 잠실동). 전쟁의 원인은 화친을 깨뜨린 조선에 있고, “부족한 임금이 항복하니 황제께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패전 이후 청나라로 끌려갔던 조선 사람들, 특히 여인들은 환향(還鄕) 후에도 모진 차별을 받았다. 조선에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보다 짧았지만 더 치명적이었다.
[자충수가 된 팽창… 1000만 만주인은 지금 티베트보다 미약]
만주인들은 명나라의 내분으로 인한 역사적 우연들이 겹치면서 1644년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본거지인 만주를 봉금(封禁)하여 비우고, 티베트(1720), 신장(新疆, 1755) 등으로 과도하게 팽창했다.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연회 양식으로 상징되는 대청제국의 다문화 정책은 1850년대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내세운 한인들의 태평천국(太平天國) 봉기로 한계를 드러냈다. 태평천국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유럽의 식민 제국들이 촉발시켰던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보다 많았다.
17세기 만주인들은 제국적 과도 팽창을 절제하고, 팔기(八旗, 청나라의 군사·행정제도)를 중심으로 만주를 지켰어야 했다. 그랬다면 만주인들의 정치적 운명은 달라졌고, 동북유라시아에서도 17세기 유럽처럼 수평적 국제 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무리하게 제국을 팽창시켰던 만주황실은 1911년 한인 민족주의자들이 일으킨 신해혁명의 결과로 밀려났고,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오늘날 스웨덴 규모의 약 1000만 만주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몇 개 자치현들과 대만에 흩어져 있다. 만주인들은 티베트인들이나 위구르인들처럼 하나의 자치 구역도 갖지 못한 상태다. 티베트 임시정부처럼 만주 임시정부도 존재하지만 훨씬 미약하고, 1932년 일제가 세웠던 만주국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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