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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번역가를 대체할까? “속도 빨라 가능” “문맥까진 안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17. 15:54

AI는 번역가를 대체할까? “속도 빨라 가능” “문맥까진 안돼”

김화영·김석희·전영애·권남희·노승영… 대표 번역가 5인의 생각

입력 2023.04.17. 03:00업데이트 2023.04.17. 10:50
 
 
 

AI는 인간 번역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 챗GPT 등장 이후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질문이다. AI의 번역 능력이 괄목상대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재단이 최근 만 18세 이상 국민 1000명에게 ‘AI가 대체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을 묻자 응답자의 90.9%가 설문에 제시된 직업군 10개 중 번역가·통역사를 택했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네(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고 영국 밴드 버글스가 노래한 것이 1979년의 일. 그 후 반세기, AI는 과연 인간 번역가를 ‘죽일’ 것인가? 각 분야 대표 번역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AI 번역 발전 속도 놀라워… 곧 인간 대체할 듯”

 

“시(詩)라든가 현실 지식에 기반하지 않은 ‘판타지’ 등 일부 영역을 제외하면, AI가 인간 번역가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번역가 김석희(71)씨의 말이다. 영어·불어·일어에 능통한 그는 1987년부터 번역 일을 시작, ‘모비 딕’, ‘로마인 이야기’ 등 370여 권을 옮겼다. 그는 본지 통화에서 “10여 년 전만 해도 AI는 절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천재’가 ‘천재’를 키우는 것 같은 AI의 발전 속도를 보며 입장이 달라졌다”고 했다. “어색한 번역투가 걸림돌이었는데 요즘 AI는 1차 결과물을 보고 피드백을 주면 반영해 수정본을 내놓는다. 지금 번역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번역가를 평생 직업으로 삼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학서 전문 번역가 노승영(50)씨는 “이미 AI 때문에 타격을 받고 있다”면서 “독자들이 AI와 인간의 섬세한 차이를 모르거나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전자책 원서를 빨리 읽을 수 있도록 AI가 번역해 주는 서비스 같은 것이 나오면 독자들은 속도가 빠른 그쪽을 택할 것 같다”고 했다. 책 한 권 번역하는 데 보통 5개월~1년이 소요되는데 그 시간을 줄일 수 있고, 특히 과학서는 정형화된 서술 방식이 있어 AI 번역 친화적인 텍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노씨는 2007년 번역을 시작,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말레이 제도’ 등 100여 권을 옮겼다.

 

◇”AI엔 ‘마음’ 없어… 인간 따라잡긴 어려울 듯”

 

“문학 번역은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정보보다 작품 특유의 문체, 저자의 에너지와 호흡 전달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불문학자 김화영(82) 고려대 명예교수의 의견이다. 김 교수는 1963년 번역을 시작해 카뮈 전집, ‘어린왕자’ 등 100여 권을 옮겼다. 그는 “AI가 기존 정보를 학습했더라도 문학은 기존 지식을 ‘위반’하고 세상을 보는 새 시야를 여는 창조 활동이다. AI 번역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본어 번역가 권남희(57)씨도 김화영 교수와 궤를 같이한다. 30년 경력으로 ‘무라카미 라디오’, ‘종이달’ 등 300여 권을 옮긴 그는 “번역을 잘하려면 책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는데 AI엔 ‘마음’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독일어 ‘킨트(Kind)’는 지금은 ‘어린이’란 뜻이지만, 17~18세기 문헌에선 ‘아가씨’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 같은 언어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AI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을까?” 독문학자 전영애(71)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74년 번역을 시작해 괴테의 ‘파우스트’, 헤세의 ‘데미안’ 등 70여 권을 옮겼다. 전 교수는 “번역이란 자구역(字句譯)만으로 되지 않는다. 문맥이 중요하다. 같은 작품이라도 누가 번역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장인 정신 있어야 살아남는다”

 

이들은 인간 번역가의 노력이 이전보다 더 요구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했다. 길 안내 같은 간단한 번역은 AI와 인간 간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인간 번역가가 AI를 압도하는 ‘고품질’ 결과물을 내놓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전영애 교수는 “이런 노력이 이루어진다면 ‘번역가’라는 직업에 희소가치가 생겨 오히려 전보다 더 대접받을 것”이라 말했다. 노승영씨는 “누구에게나 맡겨도 똑같이 나오는 것이 아닌 번역이 좋은 번역이다. 결국 장인 정신을 가진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다.

 

“AI가 인간 번역가를 위협한다기보다는 번역가의 도구로서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개정판 등을 번역한 강동혁(37)씨는 “영미권 최신 유행어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때 챗GPT에 물어보니 구글 검색보다 훨씬 시간이 줄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