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서울 보면 ‘大日本’이 있다고? 웃기지좀 마세요
[유석재의 돌발史전]
日光, 仁旺山... 모든 게 日帝의 음모라는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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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일광읍 주민들이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지난 18일 기장군청 앞에서 ‘일광(日光)’이란 지명의 ‘친일’ 논란을 부추긴 유튜브 채널을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지난 6일로 올라갑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산 해운대구에서 전국 시·도지사, 장관, 부산 지역구 의원들과 비공개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 이름이 ‘일광수산횟집’이었죠. 일광읍에서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설마 이걸 가지고 시비가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유튜브 채널 ‘더 탐사’는 일광이 일본의 욱일기를 의미하고 일광읍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반박이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광면은 ‘일광산’이란 지명에서 딴 것으로 1885년 ‘기장현 읍지’에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기록돼 있고, 18세기 중반의 기장현 고지도에도 ‘일광산’이 표기돼 있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1638년(인조 6년)의 기장 향교 상량문에도 일광산이 기록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탐사’ 측은 “일광이 일광산에서 유래했을지는 모르나 일광면 명칭을 지정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지명이 반영된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제 때 개편된 행정구역의 명칭은 모두 문제가 있다는 얘긴지… 스텝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저렇게 주워담기 어렵게 됩니다.
날 일(日)자 모양이나 일장기 비슷한 것만 보면 친일 의혹을 제기하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예전 이명박 서울시장 때 서울광장을 새로 만들자 한 신문이 ‘꼭 일장기 같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동그라미는 다 일장기인가? 그리고 초록색 동그라미가 왜 일장기인지 누구나 의문이 드는 대목이겠죠. 서울광장은 여전히 원형이지만 친일 논란은 그 뒤로 별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일제가 일부러 한국의 지명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지명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그건 서울의 인왕산입니다.
대략 이런 내용의 속설입니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는 원래 ‘仁王山’이 맞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억지로 ‘仁旺山’으로 바꿨다는 겁니다. 왜? ‘왕(旺)’자를 풀어 쓰면 ‘일왕(日王)’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광복 이후 ‘仁王山’으로 바로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년) 5월 26일, 가뭄이 한창이던 시기의 기록을 한번 보시죠.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목멱산과 인왕산(仁旺山) 및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上… 親製祭文, 遣承旨祈雨于木멱(不아래見)·仁旺山及漢江.
영조실록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문서가 아닙니다. 인왕산은 실제로 仁旺山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仁旺山으로 썼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승정원일기’에선 仁旺山이라 표기한 예가 102회나 발견된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이미 ‘仁王山’과 ‘仁旺山’의 표기를 병용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1910년 이후에도 두 표기는 함께 쓰였습니다. ‘왕(旺)’은 ‘왕성하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의 숱한 인명과 지명에 흔히 쓰이던 글자였습니다.
또 하나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일왕(日王)’은 일본에서 일왕을 일컫는 공식 명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왕(旺)’자로 고친 것이라면 자기들 정부로부터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내친김에 이 얘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어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공중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大’ ‘日’ ‘本’이라는 글자가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보인다는 얘기죠. 그래서 ‘대일본(大日本)’이 된다는 겁니다. ‘大’는 북악산, ‘日’은 총독부(중앙청), ‘本’은 경성부청(서울시청) 건물로서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죠.
이것도 지금까지 사실인 줄로 알고 있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과연 정말일까요?
먼저 ‘나무위키’ 사이트에 있는 항공사진을 보시죠.
맨 위에 보이는 북악산 자락이 ‘大’자라고요? 숨은그림찾기나 매직아이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봐야 그 글자가 보일까요. 산이란 본디 보는 위치나 각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20년 전쯤 신문사에 이런 제보(?)가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북한산은 사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새겨놓은 거대 동물 형상의 석상이었다!’ 보기에 따라서 북한산의 바위들이 온갖 동물 모양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까진 이해했습니다만, 그것이 자연석이 아니라 왜 거대한 인공 조각이며, 그 조각을 한 사람이 왜 하필 광개토대왕인지에 대한 근거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 양보해서, 그 북악산 자락에서 大자를 찾아냈고 일본인들이 그걸 그렇게 읽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요? 산은 그저 원래부터 산일 뿐인데 말입니다. 大자가 보이는 게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지은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 ‘日’자라는 중앙청 건물. 우선 이게 日자가 맞는다면 왜 글자를 90도 돌려 놓았는지 알 수 없거니와, 만약 이걸 日자로 본다면 근현대에 건립된 수많은 건물들을 다 日자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건물을 하늘에서 보면 어차피 대부분 ‘口'자나 ‘日'자나 ‘目'자나 ‘田'자 가운데 하나가 될 테니까요. 사실 大나 本도 마찬가지지만, 日자처럼 대단히 단순한 문자는 세계 어느 도시의 지도를 펴놓더라도 무수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경복궁 자체가 日자였네? 아이고 태조 이성계가 친일파였나보다!
그래도 만약 서울시청 건물이 ‘本’자가 맞다면 ‘大日本’ 가설은 어느정도 그 실체를 인정할만 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이미 상당 부분 전문가 의견이 나온 바 있는데, 2008년 서울시가 시청사 건물 뒷부분인 태평홀을 철거하기 전인 2006년에 이런 문헌이 문화재연구가 이순우씨에 의해 알려지게 됐습니다. 경성부청사 건물 설계에 참여했던 총독부 건축과 기수 사사 게이이치(笹慶一)가 1926년 ‘조선과 건축’에 쓴 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는 겁니다.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本’자가 아니라 ‘弓’자라는 것입니다. 사사는 또 ‘소공동, 남대문로 등으로 터 위치가 바뀔 때마다 배치도를 고쳐 그렸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어떤 글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부지에 맞춰서 고치다 보니 弓자처럼 됐다는 것이죠.
2006년 10월 13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위 그림을 보면, 서울시청사의 평면도는 어떻게 봐도 ‘本’자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本자로 본단 말입니까? ‘弓’자와 비슷한 듯도 하지만 차라리 알파벳 ‘E’나 ‘F’를 90도 돌려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혹 일제가 조선을 능욕하기 위해 일부러 F자를 썼다는 얘기가 나올까 두렵습니다).
이제 결정적인 멘트가 나옵니다. 한국건축사의 최고 권위자인 김정동 목원대 교수(현 명예교수)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大日本 글자를 본따 지었다는) 서울시의 주장은 문헌상의 근거가 전혀 없는 낭설이다. 당시의 대지 형태에 따라 건물을 짓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총독부 건물 철거 문제가 불거졌을 때 철거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네, 결국 ‘大日本'이야기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 좀 순화해 말하자면 괴담이었던 것입니다.
일제가 이른바 ‘민족정기’를 의도적으로 훼손했다고 볼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경복궁 전각의 90% 이상을 철거한 일을 그중 하나로 들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근거 없는 낭설이나 괴담을 통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특정 지명을 일부러 고치고 우리 땅에 대일본 글자 같은 제국주의의 흔적을 남겼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정(自淨)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정도의 수준은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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