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진원지, 조오련 키운 스포츠 성지…개발·보존 숙제
서울YMCA 회관 재개발 ‘뜨거운 감자’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앞에 있는 서울YMCA 회관의 야경. 꼭대기층인 8층은 호텔로 운영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영장과 체육관이 있는 건물은 회관 뒤쪽에 붙어 있어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3번 출구를 나오면 8층짜리 서울YMCA 회관을 만난다. 겉보기에는 별 특징이 없어 보이지만 이 건물은 구한말부터 해방공간까지 우리나라 애국계몽운동의 주무대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스포츠의 역사를 보여주는 ‘도심 속 박물관’ 같은 존재다.
서울YMCA 회관에는 국내 최초 국제규격 실내수영장(25m×4레인, 최고수심 3m)과 실내체육관, 유도장과 헬스장이 있다. 수영장에서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아시아의 인어’ 최윤정·윤희 자매가 훈련했고, 유도장에선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몸을 단련했다. 체육관에서는 ‘육체미 대회’의 원조인 미스터YMCA 선발대회가 열렸다.
55년 된 어머니클럽서 수영·에어로빅
현재 건물은 1908년 지어진 서울YMCA 회관이 한국전쟁 때 폭격과 화재로 소실된 뒤 1967년 다시 지은 것이다. 국회의사당과 장충체육관 등을 설계한 김정수 선생이 당시 첨단 건축기법인 ‘알루미늄 커튼 윌’ 방식으로 만들었다.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알루미늄 세로줄과 가로로 이어붙인 청옥색 타일이 조화롭게 대비를 이룬다.
근현대건축자산으로 지정된 서울YMCA 건물도 세월의 흐름과 개발의 바람을 비켜갈 수는 없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이 일대를 도시정비형 재개발 공평구역 17지구로 지정해 재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탑골공원과 YMCA 사이 공평구역 15,16지구는 이미 옛 건물이 헐리고 공사가 진행 중이다.
1908년 건립된 서울YMCA 회관의 1911년 당시 모습. [중앙포토]
서울YMCA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돼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1898년 강제해산된 독립협회의 뒤를 이어 개화자강 조직체로 만들어졌다. 을사늑약 반대, 고종 양위 반대 운동을 펼쳤고, 1919년 3·1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초창기 회원 수가 늘어나자 서울YMCA는 지금의 자리에 회관을 짓기로 했다. 1907년 11월 7일 고종황제는 11살이었던 왕세자 영친왕을 회관 정초식(定礎式)에 보냈고, 영친왕은 ‘일천구백칠년(一千九百七年)’이란 글을 머릿돌에 썼다. 고종은 1만원의 하사금과 은으로 만든 삽 두 자루도 보내줬다. 1916년에는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이 준공됐다. 서울YMCA 회관은 3·1운동 때 학생YMCA가 중심이 된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YMCA 체육관과 수영장이 있는 건물은 회관 본 건물에 기역자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곳은 지금도 YMCA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다. 55년 역사를 자랑하는 ‘어머니클럽’ 회원 40여명도 매주 월·수·금 수영과 에어로빅을 각각 한 시간씩 한다.
막 수영을 끝낸 어머니클럽 회원 4명을 만났다. 최고령인 조옥순 할머니(94세)는 “오늘은 200m만 돌고 나왔어요. 한창 때는 2000m도 가볍게 했는데 허리-고관절 수술 받은 뒤로는 예전 같지 않네요”하면서 웃었다. 올해 84세로 4명 중 최연소(?)라는 회원은 “60년대 후반에는 국내 유일의 실내수영장이었으니 이용권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죠. 한달 치 이용권을 묶어서 2500원에 팔았어요.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서 밤에 근처 여인숙에 모여 있다가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부터 회관 앞에 줄을 섰지요”라고 회고했다.
당시 서울YMCA에 부설 유치원이 있었는데 꽤 인기가 좋았다. 윤석열 대통령, 정문헌 현 종로구청장이 YMCA유치원 출신이다.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려온 어머니들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걸 본 장주호 간사(현 세계생활체육연맹 총재)가 ‘인어반’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클럽을 만들었다고 한다. 클럽은 회원 관리가 엄격했고, 상급반으로 올라가려면 실기·출석은 물론 품행 점수까지 좋아야 했다. 수영장 탈의실에서 백선엽 장군 부인을 시중들던 여성 부관이 회원들한테 쫓겨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도 YMCA 유치원 다녀
2018년 2월 11일자 중앙SUNDAY ‘죽은 철인의 사회-조오련 편’에는 시골서 올라와 YMCA 수영장에서 운동하던 조오련이 인근 학교 유도부 15명과 시비가 붙는 얘기가 나온다. 조오련은 “난 남자다. 30분 뒤에 만나자”라고 말한 뒤 뱀장수한테서 독사 한 마리를 사 와서 머리를 깨무는 ‘똘끼’를 발휘해 15대1의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당시 끼니도 못 채운 채 힘들게 운동하는 조오련을 보고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의 부인이 밥을 사준 적도 있다고 조옥순 회원은 귀띔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서울YMCA 건물 문제는 서울YMCA 이사장, 종로구청장, 지역구 국회의원(최재형), 이종찬 전 국정원장 등이 참석하는 월례 모임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 현재로는 8층 본관 건물은 그대로 남기고, 체육관-수영장 건물과 본관 뒤편에 있는 별관 및 가옥 몇 채를 모두 헐어 새 건물을 짓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조규태 서울YMCA 회장은 “3·1 독립운동의 진원지라는 역사성과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33층으로 짓되, 각 층에 기미독립선언 민족지도자 33명의 이름을 붙이는 아이디어도 있다”고 말했다. 정문헌 종로구청장도 “종로구민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새 건물에 1000~1500석 규모의 공연장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문제는 서울시가 고층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고도제한을 풀어줘야 하고, 새 건물이 인근 경관 및 스카이라인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재급 체육시설을 어느 정도로 어떤 모양으로 남기느냐 하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다.
2006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동대문운동장(축구장·야구장)을 부수고 그 곳에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세우는 결정을 내렸다. 1920년대 지어진 한국 스포츠의 메카 ‘성동원두’는 조명탑 몇 개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이 잘한 결정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다.
조규태 회장 “교육·계몽 YMCA 철학 담은 건물 만들어져야”
아치형으로 건립된 서울YMCA 체육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조규태 회장. 최영재 기자
조규태 서울YMCA 회장은 “서울YMCA는 청소년-시민운동단체, 사회체육단체라는 인식이 강한데 사실은 근현대사 속에서 역사적 소명을 찾아 실천해 온 독립운동, 민족운동 단체”라고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서울YMCA 건물 보존 및 재개발 계획이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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