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가는 길 있다”… 수도사의 지도가 콜럼버스 내비게이션 됐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마파문디·Mappa Mundi)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하여 그렸다. 단순히 객관적 지리 정보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무대라는 의미다.(86화 참조)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런 꿈 같은 세계상을 고집할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리던 15세기 중엽이 되면 새로운 세계 인식을 담아내는 혁신적인 지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수사 프라 마우로(Fra Mauro)가 제작한 지도가 대표적이다.
1450년경 베네치아에서 제작된 이 명품 지도는 한 변 223㎝의 사각형 안에 지름 196㎝의 원형 세계지도를 그려 넣었고, 이 안에 3000개가 넘는 캡션과 100여 개의 그림으로 풍부한 정보를 담아냈다. 도시, 사원, 도로, 국경, 특산물, 항해, 교역 등 중요한 사항들이 지도 전면에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기존 지도와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면모를 보인다. 우선 이전의 마파문디에서는 에덴동산이 아시아 동쪽 끝에 실재하는 지역인 양 그렸지만, 이 지도에서는 외곽으로 밀려났다. 에덴동산이 이 세상과 ‘영적’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정말로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실재성’은 완화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의 위치도 변경했다. 기존 지도에는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지도 정중앙에 그렸으나 마우로는 세계 각 대륙의 실제 비중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예루살렘의 위치를 약간 서쪽으로 옮겼다. “위도 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경도 상으로 보면 더 서쪽에 위치한다. 다만 유럽의 인구가 조밀하기 때문에, 지리적 공간뿐 아니라 인구 수를 고려하면 예루살렘은 경도 상으로도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캡션 내용을 통해 종교적 의미를 살리면서도 아시아 대륙의 실제 크기를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아시아에 관한 정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책에서 얻은 것들이다. 예컨대 중국 관련 정보의 90% 정도가 폴로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고, 여기에 더해 니콜로 데 콘티나 오도릭 등 다른 저자들을 부차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심팡구 섬(Ixola de Cimpangu)’으로 표기되었는데, 마르코 폴로가 시팡구(Cipangu) 혹은 지팡구(Zipangu)로 표기한 것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본이 유럽의 지도에 처음 등장한 사례다. 주목할 점은 고전 저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판단하기에 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과감하게 수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시대의 여행기나 지지(地誌)에 많이 나오는 기이한 사항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 여러 종류의 괴물인간 혹은 괴이한 동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겠다.” 이런 식의 언급이 자주 보인다. 물론 그 역시 고전 자료에 빈번히 등장하는 괴이한 사항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지 일부 사례들을 소개한다. 예컨대 금광을 지키는 ‘개만큼 큰 개미’ 이야기는 여러 자료에 등장하므로 그 역시 적기는 하되, “아마 이것은 개미 비슷하게 생긴 다른 동물일 수 있다”는 식으로 그 나름의 합리적 추론을 더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안다만의 한 섬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이 호수의 물을 쇠에 부으면 금으로 바뀐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여러 사람들이 증언을 하므로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서이다.” 비슷한 사례로 아일랜드의 어느 섬에 나무를 쇠와 돌로 바꾸는 호수 이야기가 있는데, 마우로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만일 이 이야기를 믿는다면 안다만 섬 이야기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신비로운 일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맹신하거나 먼저 경탄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전의 마파문디와 달리 이 세상은 놀랍고 신비로운 일들이 그득한 경이의 세계가 아니다.
마우로의 강조점은 다른 데 있다. 아시아는 괴물이나 꼬리 달린 인간이 사는 기이한 세계가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풍요롭고 잘사는 지역이며, 교역과 교류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인도양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교역 활동들을 중점적으로 기록한다. “공간이 부족해서 다 표시하지 못했지만 이 바다에는 매우 많은 섬이 존재하며, 모두 사람이 살고 향신료를 비롯한 상품들이 많이 나는 기름진 곳들이다. 금, 은, 다양한 종류의 보석들도 많다”는 식이다. 중세 말과 근대 초 유럽인들의 꿈은 금과 향신료가 많이 나는 아시아로 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육상을 통해 아시아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험하다. 그렇다면 바닷길로 그곳에 갈 수 있는가를 탐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지도의 요체는 인도양 항해의 가능성 탐구라 할 수 있다.
이전의 많은 문헌과 지도는 유럽에서 인도양까지 가는 항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남쪽에는 바다가 끓어오를 정도로 더워서 통과가 거의 불가능한 열대지역(Torrid zone)이 있을 뿐 아니라, 혹시 그곳을 지나간다 해도 미지의 대륙(terra incognita)이 막고 있어서 아시아의 바다로 항해해 갈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중세의 여러 지리학자들은 아프리카의 남쪽 끝이 거대한 대륙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대륙은 동쪽으로 길게 뻗어 아시아의 동쪽 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말하자면 인도양은 땅으로 둘러싸인 내해(內海)라고 보았다. 결국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항해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프라 마우로는 이와 다른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과거 문헌 중에도 인도양이 더 큰 대양에 열려 있어서 그곳으로 항해해 가는 게 가능하며, 언젠가 아라비아 해에서 향신료를 실은 배 두 척이 실제 유럽까지 온 적이 있다는 기록을 제시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도를 제작하기 수십 년 전인 1420년경 실제로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항해해 들어온 선박에 관한 정보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인도 배를 타고 가다가 인도양에서 40일 동안 거친 폭풍우로 인해 소팔라 곶과 ‘녹색섬’에서 인도양을 넘어 서남서 방향으로 밀려갔다. 이들은 2000마일이나 항해했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중요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양에서 희망봉을 넘어 대서양으로 항해해 왔다가 되돌아간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마찬가지로 대서양에서 항해하여 인도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만일 이 항로가 열리면 힘겨운 육로 운송 대신 해로를 이용해 더 빨리 아시아로 갈 수 있다. 지중해-대서양에서 출항한 배가 아덴, 호르무즈, 그리고 더 멀리 자바, 일본 혹은 중국까지도 갔다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지도는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바스쿠 다가마가 실제로 수행하게 될 대양 항해를 수십 년 전에 미리 예측한 셈이다.
프라 마우로 지도는 아시아가 풍요롭고 활기찬 교역이 행해지는 곳이며, 온 세계가 바다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인도양까지 항해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는 단순히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유럽이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가기 위해서는 문명적 준비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정신적 자세와 먼 세계로 직접 탐험해 가고자 하는 용기가 필수적인 요인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프라 마우로 지도가 제작되기 약 50년 전인 1402년 조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가 만들어졌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사형·이무·이회가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하여 당대 알려진 세계 지리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당대 세계지도의 정확성을 파악하는 한 가지 기준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그리느냐인데, 이 지도는 아프리카 남단을 상당히 정확한 모양으로 나타냈고, 또 인도양과 대서양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렸다. 아마도 이 지도를 제작하는 데에는 중국의 고지도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 지도를 더하고 여기에 우리나라 지도 내용을 넣어 편집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해 있던 아랍의 지리 지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5세기에는 유라시아 대륙 전반적으로 수준 높은 지식과 정보가 유통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유럽의 일각과 조선에서 걸작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대 세계는 정신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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