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8] 따뜻한 봄날의 은밀한 사랑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1.03.26 03:00
신윤복 ‘사시장춘’(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종이에 담채, 27.2x15,0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그림의 건물 기둥에는 ‘사시장춘(四時長春)’이란 글귀가 붙어있다. ‘언제나 봄’이란 뜻이겠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살구꽃 따라 불어오는 봄바람에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러 찾아온 현장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춘화도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윤복(1758?~1817?)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만남의 현장은 규모가 큰 주막 뒤뜰 한구석의 은밀한 건물이다. 잠깐 머물다 떠나는 곳이지만 통나무 막 기둥으로 지은 허름한 초막이 아니다. 목수의 손길이 간 사각 기둥과 툇마루를 갖추었고 문창살의 격자도 정성이 들어 있다. 제법 품위를 갖춘 건물이다. 찾아온 남녀도 역시 격에 맞는 손님일 터이다. 툇마루에는 코가 볼록한 분홍 여자 신과 검은 남자 신이 놓여있다. 바쁘게 들어가느라 흐트러진 검은 남자 신은 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술 쟁반을 받쳐 든 어린 하녀가 문 앞에서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고 엉거주춤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도 우리의 상상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툇마루가 바로 보이니 건물 앞이 아니라 뒤쪽이다. 우리네 집은 대부분이 남향이므로 툇마루의 향방은 흔히 북쪽이다. 왼쪽의 무성한 소나무 한 그루가 창문을 반쯤 가리면서 집을 살짝 숨겨버리는 구도이다.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는 그늘진 건물 뒤쪽에는 잘 심지 않는다. 그래도 음지에 구태여 소나무를 배치한 것은 화가가 어떤 의미 부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나무 잎사귀도 실제보다 더 길게 무성하고 짙은 색깔로 그렸다. 매서운 추위에도 늘 푸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 잎은 임금을 향한 변치 않은 충절을 나타내지만, 건강하고 든든한 남성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기둥 옆에는 살짝 가려진 하얀 꽃나무가 수줍은 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가지 뻗음이나 꽃 색깔 및 그림의 구도로 봐서 이런 자리에 한 그루쯤은 있어야 할 살구나무이다. 살구꽃은 처음 필 때는 연분홍이다가 차츰 옅어져 활짝 피면 거의 하얗게 된다. 그림처럼 살구꽃이 핀 주막을 다른 이름으로 행화촌(杏花村)이라고도 한다. 살구나무 옆으로는 S자로 실개천이 흐르고 위쪽에는 가느다란 나무가 반달 모양의 촘촘한 숲으로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잎이 돋은 계절이 아님에도 실개천 아래 위의 푸른 잎 식물들과 실개천 주변의 짙은 색 처리는 일부러 여체를 은유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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