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박상진의 우리 그림속 나무 이야기

[6] 병자호란의 작은 승리, 화강 전투의 현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7. 30. 14:07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6] 병자호란의 작은 승리, 화강 전투의 현장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1.03.05 03:00

 

 

 

 

 

정선 ‘화강백전’(1742), 비단에 담채, 24.9x32.0cm, 간송미술관 소장

 

병자호란은 1637년 양력 2월 24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면서 끝난다. 이보다 이틀 앞서 관군은 강원도 철원 김화의 옛 이름인 화강에서 청나라 침략군 일부를 물리치는 작은 승리를 거둔다. 전쟁이 끝나고 백여 년이 지난 1742년 어느 날 겸재는 금강산으로 가다 이곳에 들러 지난날의 전쟁터를 회상하면서 그린 그림이 화강백전(花江栢田), ‘화강의 잣나무 숲’이란 뜻이다.

그림은 먹물의 퍼짐 효과를 이용하여 앞쪽은 진하게, 뒤로 갈수록 연하게 처리하여 잣나무 숲의 깊음을 느낄 수 있다. 바늘잎 하나하나를 따로 그리지 않았어도 서로의 가지들이 맞닿아 울창한 숲을 만드는 잣나무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잣나무는 원래 생태적으로 홀로보다는 이렇게 숲을 이루어 함께 자라기를 좋아한다. 겸재와 교류가 많았던 문신 김창흡은 그의 문집에서 이곳을 두고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울창한 숲을 이루었네…’라고 했다. 겸재가 잣나무 숲으로 그렸지만 실제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함께 자라는 숲이었던 것이다. 나무줄기를 자세히 보면 굵은 나무와 가는 나무가 섞여 있다. 사람이 같은 날 심지 않아 나이가 각각인 자연 상태 숲의 특징이다. 어릴 때 햇빛이 적게 드는 것을 좋아하는 잣나무는 소나무가 햇빛을 가려주면 살아가기가 훨씬 편하다. 그림 속의 두 나무는 의좋게 함께 숲을 이룬 것이다. 그래도 ‘송백전’이 아니라 백전이라 한 것은 원래 이 일대에는 잣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부근에는 백수봉(栢樹峯) 등 잣나무가 들어간 지명도 흔하다. 숲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실제보다 더 빽빽하게 그렸다. 청군을 물리친 우리 군사들의 높은 사기를 승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숲 앞으로 그리 넓지 않은 개울이 보이고 홍수로 깊게 패면서 나무뿌리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개울 가장자리를 따라 원래의 바닥 바위가 보일 정도이다. 소나무나 잣나무 모두 굵은 뿌리가 깊이 들어가 중심을 잡는 직근성(直根性)이지만 잣나무는 소나무보다 옆 뿌리도 함께 잘 발달한다. 그림 앞쪽의 잣나무 몇 그루는 뿌리의 대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띄엄띄엄 풀이 나 있어서 흙을 붙잡고 자신은 물론 다른 나무들도 넘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뿌리 부분도 약간 과장 표현하여 항전하는 군사들의 강인한 의지력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의 부분만 그려져 있는 건물은 화강 전투 승전을 기념한 충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