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녹색시인상 (2004)

제 6회 녹색시인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1. 31. 23:56

 

 

 

 

 

 

 

 

 

 

 

 

 

이근배. 김용오. 임헌영. 유승우 시인

 

 

 

 

 

 

 

 

 

 

 

나호열

 

 

 

 

 

2 005년 1월 22일 이근배 시인과 담소

 

 

 

 

 

 

나호열 . 김용오 시인

 

 

 

 

 

이충이. 나호열. 김용오

 

 

 

 

 

 

<심사평>

시의 여행을 통한 존재의 의미

 

좋은 시는 일상에 젖은 사람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짧은 시 '북'은 ‘한 마디’로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북’은 자아를 상징한다. 자기 표상으로써의 개성적인 북은 닫힌 어둠에서 열린 바깥으로 향해있다. 짧고 깊은 소리를 내는 ‘북’은 분명한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나호열의 시는 이미지를 통해 의미성을 전달한다. 길 잃은 ‘청둥오리’를 ‘아스팔트’에 착륙시키고, 우리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마현에서 분원리로 건너오는 불빛’은 강가에 핀 갈꽃과 함께 보는 가을의 볼거리이며, 해꽃의 끝물이다. 누구나 평심平心으로 시를 읽어가다가 떨리는 느낌에 빠질 때가 있다. 바로 좋은 시를 만났을 때다.

 

나호열은 봄과 여름 내내 떠들어대던 개개비나 오목눈이들이 자취를 감춘 곳에서 청둥오리나 고니류의 ‘발자국’을 찾고 있다. ‘용문산’, ‘옛집’, ‘가시’, ‘매화’, ‘새’, ‘숲’, ‘길’, ‘제비꽃’, ‘산’ 등의 시어는 자기 존재를 찾는 이미지들이다. 이들 시편의 여행은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을 뒤돌아본다. 시인은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자신의 내적 의미를 파악하는데, 그 바탕에는 아픔이 짙게 깔려있다.

수상작품 대부분의 시편은 개인의 내장된 언어가 시적 형식을 통해 표출되어 있다. 이들 시는 일상에서 느끼는 정서이며 일상을 벗어나려는 양가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진실과 통찰을 찾는 구도가 높이 평가되었다. 녹색시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박태진, 김용오>

 

<수상소감>

   

녹색시를 위한 변명

    나호열

 

오랫동안 나는 나의 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탐색을 계속해 왔다. 시를 통해서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늘 낭패와 굴욕으로 끝이 났고, 그럴 때마다 목마름 가득한 여행으로 나를 유배시켰다. 수많은 마을들과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이름 모를 산과 들을 가로지르면서 생명의 비의秘意에 몸서리쳤다. 독서를 통해서도, 지혜로 가득 찬 선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 수 없었던 진리, 이 세상이 결코 인간들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누가 저 들녘에 가득한 풀들을 감히 잡초라 부르는가, 잡초라 불리는 저 억세고 볼품없는 풀들이 언제 자신들의 영역 밖을 탐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인본주의라 불리는 이데아야말로 가혹한 폭력과 야만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적’이라는 미명하에 부풀려지는 문명의 욕망과 안락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거론할 일은 아니다. 단지 나 또한 현대문명의 달콤함 속에 빠져있는 수인囚人에 불과하다는 낭패감이 날카로운 돌팔매질로 나에게 되돌아 왔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자연을 망가뜨리고 결국은 부메랑처럼 인간을 포함한 생명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고매한 학자도 아니면서 살충제 디디티DDT의 폐해를 고발한 한 여성의 집념이 시로써 자아를 찾고 생명의 비의를 노래하려는 나 같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문명의 폐해를 알면서도 그 거미줄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야유는 결국 나 자신을 뜨겁게 껴안으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그 순간에도 그 자연을 핍박하는 모순은 견디기 힘든 수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소로우처럼 깊은 삼림에 은거하며 자연을 느끼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되새기기에 오늘의 현실은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 자신을 비롯한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일이 말살되어 가는 자연의 숨결을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절실하다는 생각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오랜 망설임 끝에 이 세상의 모든 시는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에 바쳐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자칫 종교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지거나 서투른 달관의 경지로 숨어들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인간은 자연에게 자신이 누려왔던 지위를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지구를 왜 초록별이라고 하는가? 공기와 태양의 빛과 열, 그리고 물이 어우러져 만드는 생명이 그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와 태양과

물은 생명 그 자체에게 조건 없이 공평하다. 녹색이 주는 평화와 약동의 이미지는 21세기를 여는 시의 지평이 될 수 있다. 과거로,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절욕을 통해서 자연의 품에 안긴 불편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아마도 21세기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명사상으로 가득할 것이다.

 

과연 녹색시는 존재할 수 있는지, 녹색시의 영토가 확장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녹색시의 화두를 걸머지고 있는 동도同徒들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제 6회 녹색시인상 수상작품

 

 

북 외 20 편

 

 

 나호열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 외 6권 , 1996년 시와 시학 중견시인상 수상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그 청둥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푸른 강물인줄 알고 텀벙 뛰어든 청둥오리

뒤뚱거리며

고속도로를 걷는다

가족들은 멀리 사라지고

무한질주의 대열은 좌우로 무섭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그저 살얼음판인 중심을 가눈다는 게

정말 무겁다

떠날 때를 놓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철새에게 고향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달아오르는 지열에 털을 뽑는다

날개를 벗어 던진다

다시 겨울이 왔는데

그 청둥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용문산 은행나무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을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그리운 옛집

 

나는

나의 옛집이다

 

이른

봄나무

얼굴에

꽃 피지 않고

잎 올리지 않고

펄럭이는 그것

 

견인이동통지서

 

나를 끌고 가겠다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오십 년

 

 

엘리베이터

 

또 누군가 무겁게 영혼을 들어올리고 있나 보다

마그마가 들끓는 소리

깊은 밤을 헤매며 산 하나에 가득 차는 발자국소리

북의 살을 찢으며 흘러나오는 공의 하얀 피

일 층과 십오 층 사이

무덤과 천국의 그 사이를

마치 내 목에 걸린 올가미

상승과 추락의 오르가즘을

누가 조종하고 있는가

이 도시가 키우고 있는 그 짐승이

이제는 내 머리를 밟고 지나간다

그 짐승은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짐승은 육식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무정란의 생각을 낳는다

밤이면 나는 피가 당긴다

 

가시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아프다

내 가슴 떼어내어

너의 가슴에 닿는 순간

가시가 되어야 하는 것을

그래서 네가 눈물 흘리는 것을

 

이번에는 네 가슴 떼어내어

나에게 다오

찡긋 한 쪽 눈 감고

나는 웃겠다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기쁘다

 

매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야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발자국

 

마현에서 분원리로 건너오는 불빛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서러울 때

걸음을 멈추어 선 강물

얼어붙은 가슴 위로

희뿌리는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살얼음이었을까

가만가만 다가가지 못하는 저 너머로

이번에는 분원리에서 마현으로 넘어가는 불빛이

그예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발자국 몇 개 서성거리며 되돌아왔다

말뚝을 박아도

넓게 넓게 그물을 던져놓아도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버릴 것들은

그만하구나

오늘은 깊은 울음 내려앉는 듯

순결했던 그 눈도

작은 발자국들도 함께 몸을 섞어

풀린 강물에

갈대들만 무성하게 투신하고 있구나

갈대답구나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 속으로

새들은 느낌표 같은 몸을 하늘에 새겨두고 사라진다

뚝뚝 그 느낌표들은 어둠을 받아 별로 빛나기도 하고

아득하게 지상으로 차갑게 낙하하기도 한다

흙으로 빚어진 몸은 무너질 때도 아름답다

아무 것도 남아있을 것 같지 않은 동토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빛의 양식이 있을 거라고

겨울 들판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 가득하던 느낌표들이

지상으로 다가설수록 물음표로

마치 못이 완강한 그 무엇에

구부려지듯이

바람에 나부끼듯 휘어지고 있다

 

의자

의자를 보면 슬프다

애써 고통을 참아내는

저 자세

생 마리 성당

돌바닥에 무릎꿇고

고개 숙인 채

오래 기도하던,

초승달 아니면 그믐달처럼

휘인

오랜 시간 혼자 있어 외롭고

또 하나의 외로움으로 내가 얹히면

그 무게로 더욱 외로운 의자

나도 기도를 배우고 싶다

그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하루살이 꽃들의 이름을 외워야 하나

아무도 앉지 않아도 의자는 무너져가고

바람이 지나가도 의자는 무너진다

숲으로 건너가는 네 발 짐승의 꼬리처럼

여름 해는 얼마나 긴 그림자를

채찍으로 휘두르나

의자는 딱딱하다

딱딱할수록 나는 경건해진다

 

 

백지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그 신호등은 나를 서게 한다

 

산으로 들어서는 그 길목에 신호등이 생겼다.

파란 불이 들어와도 건너가는 이 없고

붉은 불이 들어와도 멈춰서는 이 없는

신호등은 저 혼자 붉어졌다, 노래졌다 파래진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파란 신호등이 들어와도 서고

붉은 신호등이 와도 멈추어 선다.

어느 날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 같은

바람이 저 혼자 달려가고

요즈음은 산에서 날려보낸 낙엽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다

제풀에 주저앉기도 한다

내 앞을 지나가는 저 무상한 것들

손길 한 번 주지 않고 휘적거리는 저 것들

정작 내가 힘주어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멈추어 서야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와

내 가슴에 호수로 고이는

그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스트 룸 지53 Guest Room G53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열쇠를 비틀면 딱딱한 빵 같은 풍경 속에

나그네는 잠겨버린다

그 누군가의 흔적은

새로운 나그네가 도착하기 전에

완벽하게 닦여져 나갔을 것이다

이 방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걸레질에 밀려나간 사람의 냄새

소독 알코올처럼 빛나는 조명등이 서늘하다

이 방은 완벽한 여행자를 원했다

수건 하나조차 걸려있지 않은 옷걸이

검은 비닐로 싸인 휴지통은 하품하듯 비어있다

이 방은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여행자들은 15개 항목의

게스트 스잇 팔리시스Guest Suite Policies를 읽는다

떠날 때 보증금이 깎이지 않기 위해서

모든 손길은 조심스럽다

 

나는 이 밤

이 방의 손을 찾고 있다

그래도 따뜻한 손은 있을 것 같아서

손잡고 잠들고 싶어서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하다

 

풍경이 흔들린다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 화약 냄새

풍경소리 대신 사랑꽃이 봉오리를 연다

바람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앉아서 귀를 열어

산을 듣는다

보듬을 수는 없으나

보면 볼수록 목소리가 청량하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던 새의 발자국이

무성한 잎으로 반짝이고

무심한 줄만 알았던 시냇물이

날다람쥐로 고개를 넘는다

바람난 몇 그루의 나무

물그림자에 혼이 나가고

풍경소리에

사랑꽃 벙그는 분홍빛

시냇물 속에

가까이 다가앉는다

온기가 닿을 듯 말 듯한

모닥불 그 아슴한 거리에

들릴 듯 말 듯한

이야기가 한 구절씩 타들어간다

시간의 결 속에 문신으로 새겨 넣었던

가까이 앉은 주인공은 누구인가

풍경이 다만 흔들린다

바람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숲에서 기적소리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가 행여 덫이 될까봐

가만가만 천천히

신호등도 없고

기억해야 할 번지도 없는

모든 목숨들의 보금자리

숲은 점점 겨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먹고 먹히어도 슬픔이 없고

죽어도 장례식이 없는

서로의 집이며 무덤인 이 숲은

살면 죽어야 한다는 더딘 약속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새로이 태어나는 들꽃의 발자락에

어제의 나뭇잎은 썩어가고

내일을 향해 가는 열매는

단단한 눈물로 맺혀있는 곳

혼자 걷기에는 정적이 무서워

징검다리 건너듯 둘이 걸어야

숲은 조금씩 길을 내준다

흐린 하늘이 빠진 냇물 속으로 오래

고개 숙인 오리들과

그 누구의 억센 손아귀도 마다한 채

사라지는 냇물

너무 오래 살아 등피 벗겨진 참나무와

참나무가 키우는 청설모와

거룩한 가을의 소멸을 향해 합장한

갈대 무리와

그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낸다

그 울음과 웃음소리가

숲을 깊게 채우고

숲은 이윽고 기적소리를 낸다

발걸음을 멈추어도

우리는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숲은 다시 한 번 기적을 길게 울리고

그럴수록 맞잡은 영혼은

사슬처럼 단단히 묶여졌다

 

그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직선으로 달리는 길이 뚫리고

길눈 어두운 사람만이 그 길을 간다

어깨가 좁고

급하게 꺾어들다가

숨차게 기어올라가야 하는 그 길은

추억같다

쉴 사람이 없어 폐쇄된 휴게소

입구의 나무의자는 스스로 다리를 꺾고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이 길을 메운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참을성 있게 그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저 혼자 적막을 채우고

그 길은 이윽고 강이 된다

그 길을 가보고 싶다

사랑이란 어깨를 부딪치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

굴곡진 길을 돌고 돌아야 얼굴 보여주는

수틀에 얹혀진 안개

멀리 멀리 돌아서 보면

직선으로 달려갔던 그 길도

알맞게 휘어 도는 것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그 길을

오래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노래 부르고 싶다

 

제비꽃이 보고 싶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

 

모든 자물쇠는 숨통을 가지고 있다

 

삽날조차 허락하지 않는 동토

그 얼음 속에서

파랗게 숨대롱을 밀어올리는

새싹들을 보면

아무리 굳게 닫힌 절망의 문에도

열쇠가 있을 것 같다

가두어두어야 할

숨겨놓아야 할 것이 많음이

어찌 부끄러움이 아니랴

날카롭게 부딪치는 육중한 열쇠꾸러미

가쁘게 뛰어갈수록 요란해지는

물음표와 같은 저것들을

죄다 버리고만 싶구나

어디에 있느냐

이 한몸 열쇠가 되어

문을 열면 아! 거기

푸르게 펼쳐진 초원으로 달려올

그 사람은

 

눈부신 햇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세상이 싫어 산에 든 사람에게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힘쓰고 싶으면 힘을 써라

길을 내고 싶으면 길을 내고

무덤을 짓고 싶으면 무덤을 지어라

산에 들면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제풀에 겨워 넘어진 나무는

썩어도 악취를 풍기지 않는다

서로 먹고 먹히면서

섣부른 한숨이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바람의 문법

물은 솟구치지 않고 내려가면서

세상을 배우지 않느냐

산의 경전을 다 읽으려면

눈이 먼다

천만 근이 넘는 침묵은

새털보다 가볍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죽어서 내게로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