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장미의 향기를 평생 품었던 시인 황금찬
나호열(시인)
따사로운 봄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4월 8일 황금찬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8년 8월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치자면 99세에 영면에 드신 것이다, 오랜 세월을 쌍문동에 거주하셨지만 평소에 자주 뵙지는 못했고 지난 해 가을인가 횡성의 아드님 댁으로 거처를 옮기셨다는 소식을 듣고 양평에 거주하는 양재일 시인과 함께 방문할 생각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실기 失期하고 말았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 현 속초시)에서 태어나시고 반 평생을 도봉구 쌍문동에서 기거하시다가 경기도 안성의 초동교회 묘지에 묻히신 황금찬 시인과의 여러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오르니 그 감회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만난 최초의 시인이 황금찬 선생님이 아니었던가.
1948년도부터 시를 발표하시고 1956년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가 된 이후 48세가 되는 1965년에야 첫 시집 『현장』을 상재하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셨으니 한 걸음 한걸음이 한국현대시사의 전설이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시를 배울 수 있는 교육시설도 많고 문학에 관련된 행사가 많기 때문에 시인들과의 대면이 어렵지 않고 등단 경로도 다양해졌지만 70년대만 해도 작품지도나 평가를 받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74년인가, 후배 오만한 시인과 관철동 어느 곳에 황금찬 시인이 자주 들르신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그곳으로 찾아갔다. 전갈을 넣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찻집에서 황금찬 시인을 처음 뵈었다. 말도 글도 안되는 습작시 몇 편은 마땅히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었지만 시인께서는 찬찬히 읽어 주시고 따뜻한 격려를 해주셨다.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오' 말씀은 짧았지만 재주가 있으니 열심히 쓰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비싼 커피값까지 내주셨으니 감읍할 밖에. 그 후 등단할 때가지 그 말씀은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캄캄한 어둠 속 망망대해에서 바라보는 등대불과 같았다. 들리는 말로는 원래 천성이 온화하여 가친 말씀을 하지 못하신다고 하였으나 격식없이 무애 無碍의 마음으로 타인에게 베푸는 관심과 배려는 실행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법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선생님의 별명(?)이 ‘황과찬 ’ 으로 불릴 만큼 늘 상대방을 따뜻하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은 한 번 뱉으면 나쁜 구업口業을 쌓기 마련인데, 선생님의 칭찬은 천성이라기보다는 곤고한 삶을 이어오면서 터득한 덕 德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 후 어렵게 등단과정을 마치고 학교에 재직하게 되면서 시창작 특강에도 몇 차례 모시기도 하였다. 그 때 하신 말씀 중에 시인이 되려면 적어도 앞 선 시인들의 시집을 백 권 정도는 읽어야 한다고 하셨고, 당신 또한 수 천권에 가까운 시인들의 시집을 탐독했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자리에서는 - 아마도 도봉구 백일장 이었던 듯-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심사를 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장자 長子인 황도제 시인 (2009년 1월 초 작고)과도 교분이 있었던 까닭에 내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곁말이 될지 몰라도 황도제 시인과는 작고하기 일주일 전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서 만났고 마침 그 때 나온 시집을 지하철에서도 틈틈이 읽는다는 덕담을 듣고 새해에는 자주 만나자는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그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부고를 듣게 되니 그 때의 참담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2009년은 모 신문사에서 시읽기 행사를 전국 규모로 기획하고 시행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인과 독자 간의 거리를 좁히므로서 가뜩이나 심난하고 황폐해진 세상살이를 부드럽고 둥글게 만들어 보자는 의욕이 넘쳐나던 때였다. 대학로 한국예총회관 2층에 예총 사무실이 있었고 그 때 예총의 정책연구위원장직을 맡고 있어 윗층에 있는 한국문협 사무실에 자주 들렀었다. 당시 문협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년균 시인이 도봉구 우리 동네에 거주하고 있고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정종명 소설가가 편집국장의 소임을 맡고 있어 <황금찬 시 읽기> 행사에 닝송자로 무대에 서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듯 싶다. 김년균 시인의 강요(?)에 가까운 청탁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런저런 황금찬 시인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그 해 새 봄 그러니까 2009년 3월 16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한국문인협회가 주최하는 ‘황금찬 시 읽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내게는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행사 전 날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그 때 선생께서 지나가는 말로 내게 말씀하시길 ‘ '나 시인은 정말 미남이시오,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남시인이에요’라고 하시니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었다. 그 후로 나는 자칭 공인 미남 시인 1호로 어깨에 힘을 주며 몇 년을 살았던 것이다. 그 다음날 행사 전 점심시간에 바로 옆 자리에 선생께서 몇 몇 중진 시인들과 점심을 들고 계셨는데 그 때 눈물을 글썽거리며 ‘딸애가 저 세상에 갔을 때도 집사람이 돌아갔을 때도 그렇지 않았는데 도제(큰 아들)가 세상을 떠나니 너무 그리워요’하시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숙연해져서 숟가락을 놓았던 기억 또한 가슴 아린 일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긍정적이고 온화하게 한 평생을 사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쩌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는 부끄러움이 미남도 아닌 초로의 사나이에 불과한 나를 꾸짖는 것 같았던 것은 또 무어라 말할까.
그리하여 나는 선생의 마음을 오롯이 담은 시 「새」를 낭독했다.
언제나 아침이면
산새 한 마리 날아와
열린 내 창 앞에 앉아
이상한 언어로
구름의 시(詩)를
낭송하고 날아간다.
나는 지금까지
그 새의 이름과
어디서 날아오는지
하늘에 두고 있는 그의 고향을
모르고 있다.
내 귀에 남은
최초의 메아리는
누구의 음성이었을까
에코의 산울림
어머님의 음성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아가야 맑은 영혼으로 병 없이
잘 자라거라
그것이 엄마의 소원이며
너와 나의 행복이란다.
새는 무슨 시를
낭송하고 갔을까
나르시스에게 보내는
에코의 원한 같은?
어머님의 소원 같은
시였으리라.
잠자는 자는
영혼의 눈을 떠라
영혼이 잠들면 그만
하늘도 눈을 감는다.
새가 남기고 간
시 한 구절
지혜의 창이 열리며
비로소 눈 뜨는
'의지'
강물이흘러가고 있다.
시인의 기쁨은 자신의 시가 바람에 날리는 씨앗처럼 멀리 멀리 퍼져나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또한 시인이 노래하는 시가 시인 자신을 위무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래 글은 2017년 계간 『시와 산문』가을호에 「피세 避世와 정주 定住, 그 공간적 의미」라는 글에서 황금찬 시인을 다룬 부분이다.
1918년 8월 10일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난 황금찬 시인은 1953년 시 「경주를 지나며」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이래 2017년 4월 8일 향년 98세로 작고하기 전까지 시를 사랑하고 시의 열정을 사그러뜨리지 않은 우리나라 최장수 시인으로 기독교 신앙과 고귀한 사랑을 일깨우는 인간의 염원을 시화 詩化하였다. 계간 『문학사계』 2017년 여름호 추모 대담에서 최은하 시인은 '구겨지지 않는 삶과 신앙을 지키면서 시를 쓴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듯이 그의 휴머니즘은 사변에 치우치지 않고 현장의 건강성을 진솔하게 담아내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 「보릿고개」전문
보릿고개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모른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보리수확을 하기 전에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시절이 있었다. 한 시대를 겪어오면서 시인은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희망과 의지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 황금찬 시인의 한 생애는, 선생의 수많은 시편과 산문은 삶을 긍정하고 그 긍정이 기쁨으로 승화되기를 염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선생께서는 「보릿고개」보다는 시「별과 고기」를 자신의 대표시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별’이 존재하는 무한한 하늘과 물속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의 물고기가 서로 교합하는 세계, 광물과 동물이라는 이질적 존재가 상생의 꿈을 주고받는 갈등이 없는 생명의 고귀함이 한 세기를 증명하고 이룩해낸 거룩한 외침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 위에
내려앉는다.
물고기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은 고기들은
영광에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 있다.
-「별과 고기」전문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선생께서는 매일 혜화동 로터리 2층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상상하건대, 시인의 가슴 속에는 브람스의 선율에 춤추던 피어나던 붉은 장미가 향기를 품어올리고 있을 것만 같다. 시인 황금찬의 심장이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현대문학사를 가로지르며 자취를 남긴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 하나 마련해 드리지 못한 우둔함이 안타깝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 『도봉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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