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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관 시집 『봄이 또 내게로 왔다』/ 사무사 思無邪와 돈오 頓悟의 길을 찾는 수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1. 16. 23:18

사무사 思無邪와 돈오 頓悟의 길을 찾는 수행

나호열(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1.

 

‘시는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시인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은 옛날부터 줄곧 우리를 괴롭혀온 숙제였다. 플라톤은 시인을 이데아 Idea를 모방하는 자로 깎아내렸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을 통해 사물과 마음의 모방을 인간이 지닌 고유한 표현 양식으로 옹호했다. 그런가하면 공자孔子는 삼천 편의 시를 삼백 여 수로 산정刪定하면서 ‘시경에 담긴 시 삼백 편은 순정한 마음의 표현:『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論語 爲政篇)’라고 했다.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 무엇일까? 시중에 떠돌던 장삼이사들의 노래는 흔하디흔한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을 읊조린 듯 하나 그 속에는 삶의 절실함이 배어 있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정화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후대의 주희朱熹는 슬퍼하되 심히 아프지 않고 즐거워하되 음란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哀而不傷, 樂而不淫) 시이며, 사무사 思無邪의 경지임을 설파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시는 즉물적 卽物的 심상의 표현이 우선이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비유의 가식 加飾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러 생각은 김흥관 시인의 첫 시집『봄이 또 내게로 왔다』를 감상하게 되면 누구나에게 저절로 스며들게 되는 즐거움으로 다가올 것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2.

 

 

 

김흥관 시인은 지천명에 시인의 이름을 얻고, 이순에 이르러 이번에 첫 시집『봄이 또 내게로 왔다』를 상재하게 되었다. ‘묵은 시간들을 참회하듯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그리려고 애써왔고, 틈틈이 임산부가 산고를 치르듯이 묵혀두었다가 발효된 초고들을 다시 덜어내는 수고를 반복해 왔’(「시인의 말」부분)다는 술회에서 시에 대한 시인의 믿음직한 진정성을 만날 수 있거니와 그의 시 작업이 지고지순 至高至純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염원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초고 草稿를 수없이 덜어내고 고치는 작업은 단지 좋은 글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마저 버리고, 그 욕구의 껍질을 벗겨내어 순정한 마음의 근저에 닿고자 하는 수행이기에 김흥관 시인의 그러한 수행이야말로 시보다 더욱 값진 공덕일지도 모르겠다. 우선 시인의 등단작인 『목요일 새벽에 생긴 일』,『그 해 여름 이야기』,『진눈깨비 뿌리는 화이트데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목요일 한밤중에

아래층과 윗층에 밤손님이 행차했다

 

손 없는 날,

두 번 다시는 맘고생 말자고

어설픈 망치질 하다

살 속에 피멍만 든 내 엄지 손가락

 

그 해 여름, 내내

집에서 먹고 자고 놀았다

 

후두둑 소나기 뿌리는 날

시로 밥 짓고

글 책으로 나물 버무려 먹으니

신선놀음이 안 부럽다

 

그 여름 내내

아침 점심 저녁

그렇게 먹고 자고 놀았다,

내 집이 계곡인양 바다인양

왕골자리 그 등나무 의자에서

 

진눈깨비 칼바람에 묻혀서

주춤주춤 오려는 봄을 바리케이트 치고

잠시 길 나선 몸 한구석

예고없이 닭살돋는

화이트데이 늦은 오후

 

풍족함을 낭비하는 저들만의 세상 한 귀퉁이에서

지난 겨울, 그토록 슬픈 영혼을 냉각시키고도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았는지

세상 밖의 현실은 여전히

눈 같잖은 것들을 데리고

막 움트려는 봄의 새싹을

혹사하고 있구나

 

①은『목요일 새벽에 생긴 일』, ②『그 해 여름 이야기』, ③『진눈깨비 뿌리는 화이트데이』에서 임의로 뽑아본 구절들이다. 『목요일 새벽에 생긴 일』은 공동주택에 도둑이 들었는데 ‘ 무어 집어 갈게 있다고 / 가져갈 게 없거든 차라리 / 궁상맞은 내 집착이나 가져가’라는 이웃집 푸념을 들으며 속절없이 집단속을 하는 풍경을 그리고 있고,『그 해 여름 이야기』은 폭염 속에 하릴 없이 무위도식(?)하는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논어, 술이편) 즐거움을, 『진눈깨비 뿌리는 화이트데이』는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의 암울한 봄날, 의미도 없는 사랑을 고백한다는 외래의 화이트데이의 의미 없음을 풍자하는 시이다. 추측하건대 김흥관 시인에게 있어서 시의 발흥은 현실에서 감각되는 삶의 핍진함을 극복하려는데서 출발하였음을 간략하게나마 세 편의 등단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3.

 

그러나 위와 같은 삶의 여러 국면을 술회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이 『봄이 또 내게로 왔다』의 면목 面目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즉, ‘때 절은 솜이불 같은 빈곤을 덮고 살던 소싯적’(「밥힘」, 첫 연)의 그 간난 艱難이 절망이 아니라 오늘까지의 삶을 끌고 왔다는 ‘힘’이었다는 깨달음, 죽음을 ‘처음 가보는 우주여행길이 마냥 좋으신/ 나의 어머니’(「우주여행」마지막 연)에서처럼 광대한 우주로의 여행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긍정이야말로 김흥관 시의 성취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성취의 과정에는 자연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통한 생명의 섭리를 깨닫고자하는 수행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기호나 부호로 소통하는 시대

언제부터인가

문자만을 주고 받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수가 줄었다

 

자고나면 또 말문을 막을 프로그램들이

메시지 오듯 수시로 업그레이드된다

 

전원이 꺼지면

불안한 현대인의 노리개

 

도시의 일상이

코뚜레 꿰인 소처첨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 「스마트폰 1」 전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의 기계문명은 또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나머지 부지불식간에 기계에 종속되는 현상을 「스마트폰 1」은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속도와 안락함을 위하여 만들어진 자동차가 인명을 살상하고 부의 상징으로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괴물인 것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삶의 언저리에 들러붙은 소외와 불신에 대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인공 人工의 대척점에 놓인 자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방향성을 갖게 한다. 『봄이 또 내게로 왔다』의 많은 시편들은 계절과 계절의 변화에 파생되는 자연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김흥관 시인에게 있어서 자연은 단순한 완상玩賞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에 대한 탐미眈美를 넘어서서 자연의 현상 너머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봄비, 개화, 수묵화, 등등의 시편들은 주목할 만하다.

 

들뜬 숲은

얼었던 체위를 슬쩍 바꾼다

 

나무와 풀꽃들의 실「핏줄들이

은밀한 하룻밤을 껴안기 시작한다

 

배란기의 농염한 생각들이 발효되자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이불속

 

- 「봄비」 전문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비를 통하여 번식의 기운을 북돋는다. 모든 생명은 짐멜Simmmel이 말한 바, 좀 더 생명을 연장하고 후대를 이어가려는 생명연장의 본능 more life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치열한 그들의 경쟁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평화로움의 적막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봄비」가 보여주는 에로티시즘은 음란하지 않고 오히려 경건하기조차 하다. 식물학적 관점에서 꽃은 수컷이라고 한다. 많은 시인들이 아름다운 향기와 자태를 노래하는 꽃들을 여성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볼 때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흥관 시인은 어떠할까?

 

밤이슬에

꽃눈들이 발아를 시작한다

 

조개처럼 앙다문 입을 연다

 

꽃술이 혀처럼 불쑥 뛰쳐나온다

 

님을 애타게 사랑하는 절규의 목소리 같은

 

환희의 몸부림

 

 

 

- 「개화」 전문

 

꽃이 피는 행위는 번식의 과정이다. 음양 陰陽의 합일은 모든 생물의 본능이다. 인간에게는 은밀해야하고 결코 보여서는 안되는 성애性愛가「개화」에서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절규와 환희의 몸부림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시인이 꿰뚫고 있는 자연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사무사 思無邪의 경지로 다가서는 길임을 인식하고 있음을 함의 含意하는 것이다.

 

4.

 

이와 같이 사회의 여러 현상들이 품고 있는 폐해와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도로 시 자체를 화두로 삼은 사람이 김흥관 시인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시적 대상들은 오로지 ‘세월과 어깨동무하며 찾아온 희망 같은, 그/ 봄이 또 내게로 왔다 // 이제는 이 봄날을 노래하고 싶다’(「봄이 또 내게로 왔다」 마지막 부분)는 사유의 나무의 가지나 잎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붓다가 설파한 열반이나 돈오頓悟가 사유의 열매, 즉 공 이라 할 때 시인에게 있어서 시업 詩業은 시공간을 넘어선 봄( 보다/ 뛰어오르다)의 세계를 향한 도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데 돈오가 저절로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시인의 십 년에 걸친 시업의 한 마디가 시집 『봄이 또 내게로 왔다』로 완결되었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김흥관 시인의 성정을 미루어볼 때 아마도 시인은 다시 시의 발심을 일으켜 그 돈오의 그윽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점수 漸修의 고행, 시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흥관 시인의 첫 시집 『봄이 또 내게로 왔다』의 상재를 축하드리며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음 (언유진이의무궁 言有盡而意無窮 !)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