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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신인의 패기와 시인의 여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0. 10. 11:03

신인의 패기와 시인의 여로

나호열

 

최종심에 올라온 여러 편의 시를 읽었다.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시인은 누구이며 왜 시인이 되려고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수십 년 시마 詩魔에 시달리면서도 아직도 시의 본의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데, 시를 쓰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지망생들은 과연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나는 시인인 것인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등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단독자로서의 시 쓰기가 아니라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 쓰기의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시를 하나의 고정된 정의로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시들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고 시가 자기고백 내지는 성찰의 영역을 넘어 등단의 공인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고백, 자기성찰의 시의 내포가 독자를 향한 상품으로서 가치를 평가받는 위치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신인으로 등단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시가 새로운 주제와 기법을 장착한 창작물인가의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시인이라는 이름을 명패로 걸고 난 다음에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무늬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부단히 인간세계의 다양한 진실을 규명하는 구도자라는 엄숙한 사명을 스스로 걸머지는 것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품으면서 읽은 시 중에서 임기준 씨의 「지리산 굴참나무」 등 10 여편에 시선이 멈추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신인이란 기존의 시가 지닌 질서와 가치를 전복하는 패기를 지녀야 한다. 또한 신인의 다른 조건은 참신성은 부족하나 시를 구축하는 안정감이 균질하고 앞으로 꾸준히 시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끈기가 드러나 있느냐의 여부이다. 이 두 가지가 다 겸비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그런 신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임기준씨의 시편의 인상은 후자 後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오랫동안 시를 매만지고 궁굴리는 일에 노력한 흔적이 배어 있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즉 주제의 새로움이나 그 주제를 끌고 가는 적절한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는 기존 서정시의 일반화된 시작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임기준씨의 시편은 성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양하게 기법을 변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였다. ‘시는 이미지이다’라는 명제를 시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임기준씨의 시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시는 사유의 진술이 아니라 사유의 재구성, 사유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런 잣대를 놓고 볼 때 주제를 적절한 소재를 동원하여 재구성하여 성공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진술에 그친 작품으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뭉크의 그림이나 피카소의 그림은 그 화면 속에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숨어 있다. 뭉크의 그림은 존재의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피카소의 분편된 조각들은 분열된 세계, 파편화된 이성의 세계를 이미지로 드러낸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금언을 시를 쓰는 우리는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 굴참나무의 겨울」, 「부부싸움」, 「자취방의 자화상」, 「이상한 꿈」, 「개체의 힘」등이 이미지에 성공한 작품이라면, 나머지 작품들은 작자의 사유를 무의식적으로 진술하려는 관습에 이끌리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상에 대한 피상적 인식은 정밀한 표현을 얻어낼 수 없음을 유의한다면 더 좋은 작품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삶과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통찰을 여러 소재를 통해 풀어내는 솜씨가 독특하거나 수사 修辭의 매끄러움을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끈질기게 자신만의 사유를 획득하려는 근기 根氣가 시인으로서의 앞 길을 예감하기에

당선의 영에를 드리기로 한다.

 

시의 완성은 없으며, 단지 완성을 향한 도전만이 가능하다는 초심을 잃지 말고 정진하시기를 바라면서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나호열

계간 『시인정신』 2017년 가을호

 

임기준의 시

 

자취방의 자화상(自畵像)

내 방엔

오래된 장롱 하나,

낡은 TV 하나,

작은 액자 하나,

꽃 화분 하나,

빈 침대 하나,

총각 하나.

 

사십 넘긴 노총각

고향 어머니에겐 언제나 그가 문제였다.

 

지리산 굴참나무의 겨울

눈 내린 지리산 굴참나무 군락을 본다.

산등성이 비탈에 모여 찬바람을 맞으며

서로 가족으로 의지하며 섰다.

겨울을 나기 위해 초가을부터 몸이 가벼워야 한다고

가지마다 노란 이파리를 버리고 소중한 씨앗도 버렸다.

햇살 지는 오후 네시가 되면

굴참나무는 해가 그리워 바람 속에서 운다.

앙상한 가지에 겨울바람이 매섭게 휘감을 때

굴참나무는 서서히 흐느끼다 울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언제나 군락에서 누군가가 운다.

제일 먼저 우는 것은

가장 험한 비탈에서 발이 얼고 몸이 시린 나무다.

처음부터 비탈진 음지에 서고 싶은 나무는 없었다.

때론 평지에서 달콤한 햇살을 받고 사는

플라타너스가 부러웠다.

바람이 분다.

굴참나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흔들어 바람을 피한다.

바람이 불때마다 굴참나무들은 서로 이름을 부른다.

겨울을 견디지 못하면 몸이 터지고 동통(冬痛)으로 죽는 나무도 있다.

굴참나무가 어금니를 문다.

눈 속에 길이 끊기고 발이 얼어도

끝끝내 원망은 하지 않는다.

 

 

 

개체의 힘

- 어느 벽돌공의 일기

 

새벽부터 벽돌을 쌓아 간다.

부린 벽돌은 산더미처럼 높다.

아침 간식에 나온 빵과 우유도 마다 했다.

하나의 벽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멘트와 모래 물을 섞어

밑바닥부터 몰타르를 친다.

그 위에 벽돌 한장 올린다.

올려진 벽돌 옆에 또 한장을 나란히 붙인다.

새벽 어스름이 벗겨지고 아침이 되어도

벽 높이는 1미터가 되지 못했다.

벽돌 한 장은

개체 하나의 세상을 조각처럼 만들어 낼뿐

전체의 세상이 아니다.

모두의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한 면의 벽으로 태어나야 한다.

하나의 벽돌은 지향(指向)이 없다.

하나 옆에 하나가 생기고

또 그하나 옆에 하나가 붙여 질 때

비로소 벽돌은 지향이 생기고

벽이 되어 일어선다.

그는 새벽마다 벽돌을 쌓는다.

 

부부싸움

 

언제나 서로에게 투망을 던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던져도 돌아 올건 아무것도 없다.

삼십년이 넘도록 서로 다른 강가에서 그물을 던진 탓이다.

 

남자는 남자의 강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여자의 둠벙을 기억한다.

 

남자와 여자의 작은 그물로는

단단한 삶의 방식을 

거두어 오기엔

서로가 큰 생명체였다.

 

머릿속으론 안다.

고기잡이를 위해선 둘 중 한사람이 

자신의 그물을 버리고 고기몰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남자와 여자 사이엔 강이 흐른다.

강에서 낡은 빈 투망을 서로 던졌다.

사람이란 글자 모난 ‘ㅁ’을 깎아서 둥근 ‘ㅇ’이 된다면

사랑이 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상한 꿈

밤마다 헤매는 꿈을 꾸다가

알 수 없는 낯선 세상에

별 하나 없는 삭막한 곳에

만난 적 없는 사람을 만나고

검은 눈동자 마다 무표정하여

보랏빛 바람이 스쳐 지나고

가슴은 무감하여

입술은 건조한데

눈 안에 먼지가 들어가서

말은 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귀는 비어 있으나 들리지 않고

머리는 뜻밖에 검은데

피부는 침목처럼 거칠어

손은 엉컹퀴 같아서

옷은 바람에 흩날리고

거리는 흙바람이 이는데

숨 쉴 때 마다 입안에 흙이 씹히며

뼈마디만 남은 채

식수는 없고

지향(指向)도 없으며

목적 있는 것처럼 그곳을 향해 가고

혼자이면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어젯밤 이상한 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