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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욕 去人欲 존천리 存天理의 삶은 가능할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7. 26. 14:55

거인욕 去人欲 존천리 存天理의 삶은 가능할까?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나무들 모이면 숲이 되는데

사람의 숲에는 나무가 없다

- 「우리는 슬픔의 나무이다 ․ 4

1.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물질을 이용하여 삶의 편리성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서 윤택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이 순간에도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환경의 조화가 깨져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 훼손이 때 아닌 한발과 태풍, 온난화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전 지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거인욕 去人欲 존천리 存天理’의 직역은 ‘사람의 욕심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것입니다. ‘인욕’과 ‘천리’에 대한 철학적 논쟁과 분석은 다양하지만 ‘인류’라고 하는 종 이 지닌 속성으로 생각하든, 한 개인이 지닌 특성으로 ‘인욕’을 규정한다고 하여도 무한한 욕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로 두루 통용될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천리’란 무엇일까요? 이 또한 우주가 지닌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하거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결국은 인위 人爲적이고 인공 人工적인 행위를 버려야 한다는 당위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자연 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것을 거스르는 것이 인류가 만든 ‘문명文明’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문명은 더 이상의 물질을 이용한 삶의 편리성과 이익 도모를 그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

 

오늘 우리는 무더위를 피해 나무들이 우거진 숲과 맑은 물가를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산과 숲, 그리고 맑은 시냇물은 생활의 고단함과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힐링의 장소로서 알맞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그 보다 더 먼 곳에서 자동차라는 20세기의 발명품을 타고 왔습니다. 미세먼지를 걱정하면서도 화석연료가 뿜어내는 매연은 잠시 나의 일이 아닌 듯 잊고서 말입니다. 베트남 승려 틱냑한은 『평화로움Being Peace』에서 힐링과 안식을 위해서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그 먼 길을 가는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멀리 떠나고자 하는 욕심, 이제는 우리가 추방해버린 자연을 향해가는 마음의 본질과 정처 定處를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다윈이 주장했듯 ‘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장소입니다.

‘숲에 가고 싶다고? / 마을을 벗어나자마자/백과사전에도 없는 벌레들이/독을 뿜으며 반길 텐데/ 괜찮겠어?(김개미,「동생 떼어내기」)’, ‘날이 갈수록 점점 무성한 덩굴은/ 두리번거리며 소나무 하나 입에 넣고/ 채 소화 안 된 나무의 목을 무참하게 조이며/ 종족과 탑을 쌓아 올라가 허공을 훔쳐 낸다 (문경숙,「칡덩굴」)’은 우리가 마주하는 자연이 낭만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은 장소임을 경고하고 있는 듯 합니다. 문학과 특히 시가 지닌 중의성 重義性을 염두에 둘 때 숲은 인간 사회 전체를 포용하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벌레들이 살고 있는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며 소나무를 죽이는 칡덩굴의 생리를 목도할 때 느끼는 감정에서 우리가 지닌 정신적 가치의 타당성을 의심해 볼 수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이수풀 시인이나 문선정 시인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폭거룰 증언하고 있습니다.

 

숨어사는 벌레와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다릅나무 하얀 꽃 아래 겁 없이 드러누워 넉넉한 쓸쓸함을 기록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든가

숲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예 감정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십시오

 

- 문선정, 「숲의 입국심사」 4연

 

활공이다 저공이다. 휙휙 빌딩 사이를 고공질주 하던

까마득한 점 하나로 높이 올라 천막을 쳐주던

허공의 이 끝과 저 끝을 쥐고 있던

허공을 관통하던 갖고 놀던 새가

 

허공을 흉내 낸 유리창에 부딪쳐 죽었다

 

- 이수풀, 「새는 죽는다」 3, 4연

 

인공 구조물에 부딪쳐 죽는 새들의 가치는 과연 인간의 생명에 비해 가벼운 것인가? 단지 평안함을 위해서 숲과 시냇물은 존재하는 것인가? 위의 시들은 우리가 애써 잊으려 하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은가요?

 

3.

 

『월든 Walden』 은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가 1845년 월든 호숫가에 들어가 2년간 문명의 이기들을 제거하고 자급자족의 삶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는 숲 속에서 살면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올빼미 역시 나에게 세레나데를 들려주었다. 올빼미 우는 소리는 가까이서 들으면 자연의 소리 가운데 가장 우울한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연의 여신이 죽어가는 인간의 신음소리를 올빼미 소리로 형식화 시켜서 자신의 합창단 가운데 영구히 집어넣은 것 같다. 그것은 모든 희망을 버린 어떤 가련한 인간의 혼이 지옥의 어두운 골짜기를 들어서면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인데 거기에 인간의 흐느낌이 가미된 소리인 것이다.

 

- 『월든』‘숲의 소리들’ 중에서

 

4.

우리 모두는 자연과 대립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입니다. 우리의 의무는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 소리의 의미를 생명과 결부시킬 줄 아는 혜안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명명하기는 했지만 나무와 풀꽃의 이름, 하늘을 나는 새와 말을 나눌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나무들은 눈이 없어도 물길을 찾고, 인간의 수명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되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은 우리들에게 학교이며 경전입니다.

 

 

 

* 이 글에 언급한 시

 

 

동생 떼어내기

김개미

 

 

 

숲에 가고 싶다고?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백과사전에도 없는 벌레들이

독을 뿜으며 반길 텐데

괜찮겠어?

 

수풀을 찢으며

육식공룡들이 모가지를 내밀고

시조새가 따라올 텐데

괜찮겠어?

 

보아구렁이가 뚝뚝 떨어지고

거대한 시체꽃이 네 이름을 불러

게다가 늪 천지야

물론 늪의 주인 악어는

먹잇감을 한 번도 살려 보낸 적이 없어

 

이건 정말 말 안하려 했는데

거긴 발만 들여놓으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블랙홀도 있어

 

사랑하는 동생아

형이 가서 안전한 길을 찾아보고 올테니

너는 집에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니?

 

 

칡덩굴

문경숙

 

 

비 내리는 밤

질긴 몸을 뚫고 나온 여린 덩굴이

숨겨있던 욕망을 드러낸다

 

산다는 것은 뭔가를 움켜쥐는 것

남의 옆구리를 교묘하게 찔러 넣는 법을

초록빛 손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무성한 덩굴은

두리번거리며 소나무 하나 입에 넣고

채 소화 안 된 나무의 목을 무참하게 조이며

종족과 탑을 쌓아 올라가 허공을 훔쳐 낸다

 

‘뚝뚝‘ 푸른 피가 질펀하게 흐르는

잎의 난폭한 식욕 앞에 서면

그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이 여름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담은 푸른 손

옆구리를 타고 슬그머니 올라온다.

 

숲의 입국심사

 

문선정

 

 

 

주말의 사람들은 몸만 챙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패트병 소주병 음료수병 비닐봉지들이 어질어질한 계곡

이를테면 이해하지 못 할 새떼의 시체처럼 쓰레기가 널브러진 숲입니다

뭐 놀랄 일도 아니죠

다만 실패한 쓰레기는 태어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입국심사를 시작합니다

어디서 누가 올 것인지,

 

이 숲에 들어오려는 자, 줄을 서십시오!

 

숨어 사는 벌레와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다릅나무 하얀 꽃 아래 겁 없이 드러누워 넉넉한 쓸쓸함을 기록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든가

숲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예 감정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십시오

 

소나기 지나가고 햇살이 내립니다

숲은 잘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걸어서 오르지 못한 바다 같은 하늘도 잘 있습니다

 

 

새는 죽는다

 

이수풀

 

 

 

허공에 네 귀퉁이를 물고 다니던

허공을 뒤집을 수도 마구 구길 수도 있던

허공을 휘저어 소용돌이치게 할 수 있던

허공을 잘게 부숴 깃털 사이에 넣고 다니다 낭낭한 울음으로 세상에 던져주던

 

활공이다 저공이다 획획 빌딩 사이를 고공 질주하던

까마득한 점 하나로 높이 올라 천막을 쳐주던

허공의 이 끝과 저 끝을 쥐고 있던

허공을 관통하던 갖고 놀던 새가

 

허공을 흉내 낸 유리창에 부딪혀 죽었다

 

한 방울의 피로 대지를 적시고

새는 새답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죽었다 그 순간은 멀어

한 생애가 지나가고 식구들의 얼굴이 지나가고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으리라

-허공아 나 살려라

얼마나 허공을 불렀는지 눈꺼풀과 부리는 열려져 있고

매부리 진 열 개의 발톱은 후벼 파이도록 허공을 움켜지고 있다

 

새는 죽어서도 한 줌 허공에 매달려 있다

허공에 살던 새가 허공에 부딪쳐 죽었다

 

우물은 우물에 빠져 죽고

장미는 장미에 취해 죽고

펜은 펜에 찔려 죽고

내가 죽었다면 그건 나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은 2018년 7월 21일 동두천 탑동 배꼽다리에서 진행된 << 탑동계곡으로 소풍 나온 시>> '자연과 인간의 문제' 생태환경 특별강좌 에 사용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