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즐거움을 위하여
나호열
1.
시를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시를 쓰는 사람이 늘어나고 수많은 시들이 양산되는 현상의 속내를 콕 집어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화해가는 현대의 코드는 보여지는 것, 들려지는 것에 곧바로 우리의 몸이 반응하게끔 조종하고 있는 상황인만큼 문자의 공들여 읽기와 해석은 구미에 맞지 않는다. 컴퓨터 그래픽이 보여주는 현란한 환상의 세계, 컴퓨터로 반죽이 된 감미롭고 강열한 음의 두드림은 순간으로 다가오는 쾌락의 소비를 조장하고 있으니 시(문학일반)가 보여주는 압축과 휴지 休止의 공간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추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적 흐름에 걸맞지 않게 시를 쓰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존재를 문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젊은 세대보다는 디지털 도구에 익숙하지 않은 아날로그 세대에서 두드러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만화보다는 몇 컷의 웹툰이, 긴 문장보다는 이모티콘이 감정표현 수단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문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효용성이 없어 보인다. 소나무의 의연한 기개를 맛깔나게 문장으로 묘사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진 한 장은 보다 많은 이에게 공감과 영감의 영역을 확장시켜주는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독한 내용(주제)이거나 무언가 색다른 생각을 폭력적으로 조합하는 것이 현대시의 추세라는 착각(?)에 빠지거나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쉬운 시 - 쉬운 시의 정의를 쉽게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를 써야 한다는 위안에 기대는 오류를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회원 신작시 스무 여섯 분의 시를 읽었다. 유난히 이번 가을호에는 자연물을 소재로 삼은 글들이 많았다. 꽃과 나무를 소재로 삼은 시들을 읽으면서 시에 있어서 중요한 축이 ‘무엇’에 대해 쓰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쓰는 것인가? 하는 소박한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다뤄진 소재라면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새로운 관찰의 영역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참신한 비유로 새로움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투사와 동화라는 다소 낡아 보이는 서정시의 뼈대를 버리지 않고 감정의 과다노출을 제어하며 비유의 참신함을 보여주는 작품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2.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 무엇에 대한' 생각이다. 말하자면 생각을 위
한 재료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창작의 계기는 여러 경로를 가질 수 있을 터 인데 첫 째, 어떤 주제를 설정한 상태에서 그 주제를 잘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려고 할 때이다. 이 때 마주치는 대상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장치로서 사용하게 된다.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은 창작자가 표현하려는 자신의 정서나 감정, 사상 등을 다른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이를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을 뜻한다. 즉, 개인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객관화 하려는 창작기법이다. 두 번 째, 의도하지 않았던 사물이나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 새로운 자각이나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창작 태도에 공통적으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사람을 포함한 사물과 자연현상, 사건에 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관찰력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한다. 이른바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인식은 창작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조태일이 구체적 인식이야말로 시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라고 지적하면서 "대상의 외형적 관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훤하게 꿰뚫어보는 통찰에 의해서 생겨난다." 고 한 것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력의 배양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다독 多讀이 필수적이다. 만일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면 최소한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산과 들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자리잡고 있다. 나무와 풀의 이름을 모르고 생태를 모른다면 그것들은 '나무들', 풀들' 또는 잡초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잡초일지 몰라도 세상에 잡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니 그것들의 세세한 이름과 모양새를 알고 습성까지 알 수 있다면 더 생생하게 그것들을 글에 끌어다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금씩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서 견문을 넓혀간다면 글은 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이야기가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 나호열,「시적 대상의 관찰과 활용 기법 」부분
3.
위와 같은 소견을 잣대로 삼을 때,「고마리꽃」(강영순), 「상사화」(손수여), 「자두」(유수진),「석류」 (이인평), 「노란 마타리」(정란), 「연꽃」(한경)등의 시는 우리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생명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시로 주목 받을만 하다. 고마리꽃, 마타리 꽃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거나 생소한 식물인 반면, 상사화, 자두, 석류, 연꽃은 많은 시인들에 의해서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몇 개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고마리꽃이나 마타리 꽃과 같이 생소한 대상을 소재로 삼을 때와 고정된 이미지를 가진 대상을 시의 소재로 삼을 때의 주제 설정은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소재가 지니고 있는 형태나 속성의 매력에만 이끌리게 되면 시는 상식적 외연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소재에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게 되면 이미지가 사라지고 따라서 이야기도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인은 정치 精緻한 묘사를 통해 인식의 새로움을 도모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보석보다 더 고운 꽃망울 / 탱탱이 더 붉게 맺혔다가’( 「고마리꽃」2연) , ‘천 년을 지켜온 수행자의 증언대 ’( 「상사화」부분)과 같이 소재의 정물적 묘사가 눈길을 끄는가 하면, ‘살짝 누르니까 홍시처럼 툭 터지는 노을’(「자두」첫 행), ‘자박자박/ 능선타고 온다’( 「노란 마타리」 1연)처럼 동적인 현장감을 보여줄 때 신선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석류의 터짐을 관념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사랑이 고통임을 깨닫고서야 /가슴을 연다’( 「석류」첫 연)이나 연꽃의 개화를 공간적 이미지로 전회한 ‘ 하늘로 푸르게 밀어올린 / 넉넉한 도량’( 「연꽃」2연 부분)도 시의 여백을 궁구하게 만드는 재미를 돋군다. 이런 비유들이 시의 주제를 얼만큼의 긴장으로 밀어올리느냐에 따라서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4.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정호정의 「고랭지 배추밭」과 김청광의 「느티나무」이다. 투박한 서술인 듯하지만 ‘불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랭지 배추밭」은 가난했던 과거의 서사가 어머니와 불돌을 매개로 고랭지 배추로 상징되는 헐벗은 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작품이다. 이와 반대로 「느티나무」는 일체의 수사를 배제한 주관적 단순함이 명쾌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사례로 남을 만하다. 이 두 편의 시에는 소재로부터 연상된 이야기가 있고, 한 편의 시에 함축된 이야기가 시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는 점을 기억하게 만든다.
느티나무 좋은 건
본 것 들은 것
말하지 않기 때문
- 「느티나무」3연
- 계간 산림문학 2017년 겨울호 게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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