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나호열의 시와 토크 2016

원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2. 29. 20:02

네 번째 4th 나호열의 시와 토크

오래된 밥에 대하여

 

 

때 : 2016년 12월 2일(금) 오후 3시 - 5시

곳 : 도봉구민회관 소회의실( 2층)

주최: 도봉문화원

후원: 도봉구청

 

program

 

 

사회 : 장용자 (시노래 전문방송 【꽃 피는 시】 제작 진행자)

 

축사: 시 읽는 즐거움 / 이보용 (도봉문화원장)

 

짧은 강연: 박진희 ( 문학평론가, 대전대 강의전담교수)

 

                         ‘가능성’을 위한 ‘불가능성’의 시학

시낭송

최경애(시낭송가) 오래된 밥

현정희(시낭송가) 내 속에 나무가 살고 있다

이루다(시낭송가) 가을편지

 

시노래

 

정진채(Singersong writer)

 

불타는 시 (나호열 시/ 정진채 곡)

기억하리라(나호열 시/ 정진채 곡)

 

시와 토크

장용자와 나호열

contens

축사

강연

시 10편 과 평론

시낭송 시

시노래 시

나호열 연보

 

도와주신 분들

축사

 

시를 읽는 즐거움

 

이보용(도봉문화원장) 사진

 

네 번째 맞이하는 【나호열의 시와 토크】개최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국 시단의 중진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나호열 시인께서는 지난 8년 동안 도봉문화원 시창작 교실을 지도하시면서 신인 발굴은 물론 문학의 즐거움을 도봉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열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번 행사 또한 문학과 시를 사랑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문학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여러분과 더불어 아름다운 삶의 길을 찾아가는 기쁨을 나누는 자리로 그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도봉문화원은 역량을 갖춘 예술가들을 모시고 다양한 강좌와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문화의 길잡이로 정진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오늘의 행사를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나호열 시인을 비롯한 스탭들과 출연진 여러분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기꺼이 시간을 내 주시어 이 자리에 참석하신 청중 여러분께도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6.12. 02

시작메모

 

변방의 즐거움

 

시인에게 시를 쓴 연유를 묻는 것이 대단한 실례인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꾸로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이러저러 군말을 붙이는 것 또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한 마디로 시는 시인의 정신이 변태 變態한 것이다. 시인의 심층에서 유충이나 애벌레로 꿈틀대던 불온한 생각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것! 그래서 ‘시인은 오직 시로 말한다’는 금언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외로운 존재라고 하는 것은 변태한 자신의 정신이 오직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는다는 것이고 일상적 소통의 언어를 벗어난 상태에서, 언어의 그물(언전言詮)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의 거처는 변방 邊方이 마땅하다. 인과에 얽혀있지 않은 공간, 세속의 구심력이 작동하지 않은 그 경계쯤에 서 있는 것. 그쯤에서 눈 먼 자아를 바라보고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한 톨 먼지만한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 하는 것. 눈동자가 흔들리고 슬픔이 깔려 있는 허무의 끝까지 가보는 것은 그 무엇에게도 포획되지 않겠다는 아나키스트의 숙명이자 숙제라고 나는 믿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사랑을 믿기에는 너무 영악해져버린 나는 가끔 내가 아름다워지기를, 사랑으로 충만된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바로 그 때, 시는 내게로 온다. 절망을 깨우치지 않으면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세상의 냄새나는 부조리와 불안과 조우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랑의 고귀함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세속화된 나와 변방에서 서성거리는 본심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내게 있어서 변방은 명예와 권력의 중심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 나온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를 유배한 자유의 땅이다. 나는 이곳에서 소외와 망각을 배우고 절망을 사육했다. 나의 시는 소외와 망각이 그리고 절망이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노래가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나호열의 시 열 편

 

내력

 

뻐꾸기가 봄을 산에 옮겨 놓았다

팔이 긴 울음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는 밤

산은 연두소리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붉은머리오목눈이가 탁란하는 동안

뻐꾸기는 제 목소리를 제 알에 숨겨 놓는다

새끼를 품을 수 없어 슬픈

그저 엄마 여기 있어 엄마 여기 있어 온 산에 가득차면

푸드득 초록 날개가 뻗쳐 오른다

북이 된 산은 뻐꾸기의 목소리로 가득차고

이윽고 여름이 온다

 

우리 동네 마을버스 1119번

 

 

사슴이 물마시다 흘린 연두 마음속에서

새싹처럼 돋아 오른 마을버스는

이 마을 저 골목을 둘러서 가지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지한 순간이면 깨달을 인생을평생을 살아야 겨우 닿는 것처럼빠르게 가는 법이 없지나는 지금 종점으로 가고 있어419 국립묘지가 종점이지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아빈 배가 빈 배를 싣고 가는 것이지아직 몇 정거장 더 남았어잠깐이지만 꿈 좀 꿔야겠어빗맞은 화살처럼 현실을 벗어나는 꿈길그래도 1119번 마을버스는 달리고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어

사슴이 제 그림자를 비춰보고

물 마시는 녹천으로 되돌아가지

우리 동네 마을버스 1119번

 

오래된 밥. 1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밥이 있다한 숟갈만 먹어도 배부른 밥이 있다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옛날부터그러나 한걸음 내딛으면 아득해지는 길의 시작으로부터나를 키워온 눈물 같은 것기울어진 식탁에 혼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면딱딱하게 풀이 죽은 채 식을대로 식어버린 추억 같은 밥한 밤중에 일어나 흘러가는 강물에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은 손 같은 밥아, 빈 그릇에 가득한 안녕이라는 오래된 밥

 

오래된 밥. 2

 

 

세탁기가 더럽다고 투덜대는 동안

포트에선 맹물이 씩씩거리고 있고

밥솥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

취사가 끝났다고

밥을 잘 섞어달라고 내게 말했다

열기가 사라져버린 심장과

얼룩 하나 지우지 못하는 팔뚝은

또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이 버린 옷처럼

혼자 식어가는 커피처럼

나는 오래된 밥이다

슬그머니 곁자리에 있어도

아무도 허기를 느끼지 않는

오래된 밥

다시 들판으로 나갈 수 없지만

세탁기 속에 몸을 헹굴 수 없지만

따스함을 기억하는 밥

 

수평선에 대한 생각

 

 

 

그리워서 멀다

외로워서 멀다

눈길이 먼저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너를 향하여

나는 생각한다

 

목을 매달까

저 아슬한 줄 위에 서서 한바탕 뛰어볼까

이도저도 말고 훌쩍 넘어가 버릴까

 

매일이라는 절벽을 힘들게 끌어당기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아직도 내게는 수평선이 있다!

 

가을을 지나는 법

 

 

가을은 느린 호흡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도보여행자

 

점자를 더듬듯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오래 마음 물들이다가

투우욱

 떨어지는 눈물같이

곁을 스치며 지나간다

 

망설이며 기다렸던 해후의

목 매인 짧은 문장은

그새 잊어버리고

내 몸에 던져진 자음 몇 개를

또 어디에 숨겨야 하나

 

야윈 외투 같은 그림자를 앞세우고

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가을

도보여행자

 

이제 남은 것은

채 한 토막이 남지 않은

생의 촛불

바람이라는 모음

 

맑다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심장을 닮은 석류가 그예 울음을 터뜨렸을 때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마지막 기차가 남긴 발자국을 생각한다

붉어서 슬픈 심장의 고동소리가 남긴

폐역의 녹슬어가는 철로와

인적 끊긴 대합실 안으로 몸을 비틀어 꽃을 피운 칡넝쿨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고요가 저리할까

스스로  뛰어내려  흙에 눈물을 묻는  석류처럼

 오늘 또 한 사람

가슴이 붉다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나를 부르면 그가 온다

절뚝이며 먼 길을 꼬리로 달고

초식도 아니고 육식도 아닌 퇴화의 이빨을 드러내며 오는 사람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굶주린 사막의 아가리 속으로 

기꺼이 사라지는 수많은 그는

내가 호명했던 나

어둡고 긴 골목 같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그믐달처럼

어딘가를 향해 흔들었던 깃발이었다가

껍데기만 남은 그림자를

홑이불로 덮는다

 

 

한낮에는 갈 길이 멀고

밤이 깊으면 머무를 곳이 두렵다

객이거나그림자이거나

 

 

 

오늘을 살아내면

내일이 덤으로 온다고

 

내가 나에게 주는 이 감사한 선물은

가난해도 기뻐서

샘물처럼 저 홀로 솟아나는

사랑으로 넘친다고

 

길 가의 구부러진 나무에

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

먼지 뒤집어쓰고 며칠 살다갈

작은 꽃에

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낙스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문이 없어 불안은 유령이 되어 떠돌다 어디선가 끊어진 회로를 갉아먹고 있는지 발자국소리 물어뜯고 있는지 한숨 내쉬는 소리 깜빡거리다 어둠에 묻혀버린다 안으로 잠긴 문을 뜯어내려는지 두통이 따라오고 이윽고 부작용에 대한 설명문이 퇴화한 개미의 눈을 요구한다 경계는 처음부터 없는 환상이니 과다복용하지 말것 내가 너무 멀다

 

<시평>

 

‘가능성’을 위한 ‘불가능성’의 시학

박 진 희

 

 

『미니마 모랄리아』는 아도르노가 망명 중이었던 1940년대 쓰인 에세이임에도 글에 드러나고 있는 비판과 우려가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절망적 현실에 응전하고자 하는 사유의 딜레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가능성에 대한 책임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다운 실존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사유주체의 사적 실존은 오히려 인간다운 실존을 배반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보편적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주체 또한 현실에 매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편적 현실 전체를 인식하기 위해 요구되는 독립적인 사유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가능성’에 대한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는 지식인이 스스로에게 책임 지워야 할 것은 그러한 실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가능성’을 위해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껴안는 용기와 겸허함을 갖는 것이라 언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태도는 “좋은 교육을 받은 덕분이 아니라 지옥 속에서도 아직 숨 쉴 공기가 남아 있다는 데 대한 수치심”에서 나오는 것임 또한 강조하고 있다. 사유에 부과된 이러한 요청을 포지하고 있다면 구원의 현실성 유무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나호열의 신작들도 이러한 의미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2015년에 발간된 나호열의 시집 『촉도』의 세계를, 현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현실 너머의 세계를 사유하고, 사소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존재의 의미를 통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이러한 시적 특징은 신작 시편들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차질되는 점이 있다면 시적 주체의 시선이 외부 환경이나 주변적 대상보다 스스로의 내면에 더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성찰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껴안는” 행위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문이 없어 불안은 유령이 되어 떠돌다 어디선가 끊어진 회로를 갉아먹고 있는지 발자국소리 물어뜯고 있는지 한숨 내쉬는 소리 깜빡거리다 어둠에 묻혀버린다 안으로 잠긴 문을 뜯어내려는지 두통이 따라오고 이윽고 부작용에 대한 설명문이 퇴화한 개미의 눈을 요구한다 경계는 처음부터 없는 환상이니 과다복용하지 말것 내가 너무 멀다

-「자낙스」전문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자낙스’는 공황장애, 불안증 등에 복용하는 항불안제다. 현대 사회의 여러 특징 중 시인은 ‘불안’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공황장애나 우울증, 불안증 등의 병명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70여 년 전에 아도르노는 이미 “대도시가 등장한 이후 목격되던 조급증, 신경성, 불안정이 이제 예전의 콜레라나 페스트같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다.”고 언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러한 불안증의 원인을 ‘세계의 집단화’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을 ‘자기 포기를 통해서만 자기 유지가 가능한 사회’, ‘극도의 불안전 상태에 순응할 때 안전이 손짓하는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소위 ‘대세’를 좇는 무정형한 대중으로서의 자아가 ‘자기 포기’와 ‘자기 유지’의 길항 속에서 겪게 되는 증세가 불안증인 셈이다.

 

위 시에서 ‘불안’은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문이 없어 유령이 되어 떠돌다” 결국 “어둠에 묻혀버”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불안’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잠재적이고 지속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의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낙스’의 복용량은 늘어나고 이와 비례하여 부작용 또한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자기 포기’와 ‘자기 유지’의 길항 속에 정작 ‘자기’는 있기나 한 것일까. 시인은 이러한 회의적 심정을 “내가 너무 멀다”라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다.

 

정치적 층위에서든 사회 · 경제적 층위에서든 권력은 개개인을 통합적인 사회 조직의 일부분으로 흡입하기 위해 규범과 질서, 대중문화 등을 비롯하여 폭력과 강압 등 비상식적인 방법까지 동원한다. 이러할 때 개개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연대와 무리의 힘이 요청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도르노는 어쩌면 불가능성을 껴안은 가능성의 한 예로 끝끝내 흡입되지 않는 개별적 주체의 어떠한 고유성을 상정한 것은 아닐까.

나호열의 시에서는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진솔한, 더 나아가 염결적 성찰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나를 부르면 그가 온다/절뚝이며 먼 길을 꼬리로 달고/초식도 아니고 육식도 아닌 퇴화의 이빨을 드러내며 오는 사람/배후에 도사리고 있는/굶주린 사막의 아가리 속으로/기꺼이 사라지는 수많은 그는/내가 호명했던 나/어둡고 긴 골목 같은/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그믐달처럼/어딘가를 향해 흔들었던 깃발이었다가/껍데기만 남은 그림자를/홑이불로 덮는다//한낮에는 갈 길이 멀고/밤이 깊으면 머무를 곳이 두렵다/객이거나/그림자이거나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전문

 

‘나’를 불렀는데 ‘그’가 온다. ‘나’와 ‘그’는 동일한 자아이면서 동시에 비동일적 존재이다. 위 시에서 ‘나’란 이상적 자아, ‘가능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는 이와는 대립되는 실존적 자아, ‘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는 한때 “어딘가를 향해 흔들었던 깃발”이었으나 지금은 “초식도 아니고 육식도 아닌”, 그저 퇴화하고 있는 회색적 존재일 뿐이다. 이는 처음에 의지했던 길에서 ‘기꺼이’, 그리고 수없이 “굶주린 사막의 아가리 속”으로 발길을 돌려왔던 까닭이다. 따라서 ‘그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정처 없이 부유하는 익명의 ‘객’이거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는 바로 “내가 호명했던 나”이다.

 

실존적 자아는 현실에 매여 있는 존재로서 이상적 자아와 그에 대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부조리한 사회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지적한 대로 주체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상을 배반하는 실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용기와 겸허함일 터이다. 위 시는 주체의 이러한 태도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나호열의 신작에서는 이와 같은 현실적 자아에 대한 집요한 시선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시인이 헤집고 있는 자아의 내면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그 어느 쪽이든 열정적으로 육박해 들어가지 않는, 이상적 자아의 잔영과 현실적 자아의 비루함 사이에서 절뚝이고 있는 회색적 자아의 그것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다고, 보편적 현상이라 치부하면서 덮어두고 싶은 일면이지 않을까. 그러나 시인은 자기검열에 있어서 염결적이다. ‘오래된 밥’도 이러한 자아의 속성을 표상하는 대표적 상관물 중 하나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밥이 있다/한 숟갈만 먹어도 배부른 밥이 있다/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옛날부터/그러나 한걸음 내딛으면 아득해지는 길의 시작으로부터/나를 키워온 눈물 같은 것/기울어진 식탁에 혼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면/딱딱하게 풀이 죽은 채/식을대로 식어버린 추억 같은 밥/한 밤중에 일어나 흘러가는 강물에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은 손 같은 밥/아, 빈 그릇에 가득한/안녕이라는 오래된 밥

-「오래된 밥.1」전문

 

“육식도 아니고 초식도 아닌” 퇴화하고 있는 자아, 회색지대에 머뭇거리고 있는 자아를 이 시에서는 ‘오래된 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밥”이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옛날”과 상동의 관계에 놓이는 것으로 이루지 못하는, 끊임없이 갈망하게 되는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상적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한 숟갈만 먹어도 배부른 밥”이나 “한걸음 내딛으면 아득해지는 길”이란 정작 그러한 이상적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가늠해볼 때 느끼게 되는 정서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한 숟갈’만 먹어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밥이나, “한걸음 내딛으면” 오히려 더욱 멀게만 느껴지는 길과 같이 ‘이상’에 다가가려 할 때 직면하게 되는 불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묘파한 것이라는 뜻이다.

 

“딱딱하게 풀이 죽은 채/식을대로 식어버린 추억 같은 밥”이란 바로 이상을 놓지도 그렇다고 그것에 기투하지도 못하는 자아의 표상이다.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이어지는 시구는 이 시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한 밤중에 일어나 흘러가는 강물에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은 손 같은 밥”이 그것이다. 열정적으로 붙잡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표나게 놓아버릴 수도 없는 것, 비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의 자아를 그나마 낭만적으로 포장해주고 있는, 옛사랑에 대한 순정 같은 무엇. 이를 시인은 “한 밤중에 일어나 흘러가는 강물에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은 손”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처연한 성찰이야말로 실존적 자아의, ‘불가능성’을 껴안는 염결적 태도가 아닐까.

 

한편 자아에 대한 냉엄하고도 섬세한 성찰은 자칫 허무주의에로 귀결되기 쉽다. 자기검열에 있어서의 염결적 태도란 ‘불가능성’을 예각화하는 것에 다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에 집착하게 되면 자아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호열 시에서 성찰은 ‘가능성’에로 나아가는 매개로 기능한다. 성찰의 과정을 통해 훼손되지 않은 존재의 고유성, 존재 본연의 의미에 관한 통찰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시가 「덤」이다.

 

오늘을 살아내면/내일이 덤으로 온다고//내가 나에게 주는 이 감사한 선물은/가난해도 기뻐서/샘물처럼 저 홀로 솟아나는/사랑으로 넘친다고//길 가의 구부러진 나무에//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먼지 뒤집어쓰고 며칠 살다갈/작은 꽃에/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

-「덤」전문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에서 보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나 그것의 에너지는 무용한 것으로 치부된다. 경제적 가치가 본질의 준거틀이 된다는 의미다. 위 시에서는 “길가에 구부러진 나무”나 “먼지 뒤집어쓰고 며칠 살다갈 작은 꽃”이 쓸모없는 존재의 표상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이러한 잣대가 단지 인간의 욕망과 맞물린 통합적 사회의 시스템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인위적 준거틀일 뿐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가난해도 기쁘’다거나 “사랑으로 넘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위 시의 시적 자아가 “길가에 구부러진 나무”나 “먼지 뒤집어쓰고 며칠 살다갈 작은 꽃”과 같은, 사회 경제적 기준에서는 무용한 존재들에 ‘절’을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 존재 본연의 고유한 의미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부러져 있든, 단 며칠을 살든 관계없는 일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와의 간극을 의미화하고 있다. 이는 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는 현실적 자아와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포지하고 있는 이상적 자아 간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길가의 구부러진 나무”나 “먼지 뒤집어쓰고 며칠 살다갈 작은 꽃”이란 ‘불가능성’을 껴안으면서 고유한 자신의 본질을 통해 가능성을 열어가는 존재의 표상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기준에서 성공이나 혁명에 해당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오늘을 살아내면/내일이 덤으로 온다”는 삶에 대한 태도는 바로 이러한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일을 담보로 ‘오늘’이라는 지금 여기의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유보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면, 시인은 오히려 살아야 하는 것은 ‘오늘’이고 ‘내일’은 ‘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치열한 경쟁적 사회의 논리에서는 벗어나는 인식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통합적 세계에 결코 흡입되지 않는 존재의 고유성에 대한 사유,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발견한 ‘가능성’에의 지평이 아닐까.

 

세탁기가 더럽다고 투덜대는 동안/포트에선 맹물이 씩씩거리고 있고/밥솥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취사가 끝났다고/밥을 잘 섞어달라고 내게 말했다/열기가 사라져버린 심장과/얼룩 하나 지우지 못하는 팔뚝은/또 어디로 간 것일까/주인이 버린 옷처럼/혼자 식어가는 커피처럼/나는 오래된 밥이다/슬그머니 곁자리에 있어도/아무도 허기를 느끼지 않는/오래된 밥/다시 들판으로 나갈 수 없지만/세탁기 속에 몸을 헹굴 수 없지만/따스함을 기억하는 밥

-「오래된 밥.2」전문

 

주체가 되지 못할 때, 혹은 존재의 고유성이 담보되지 않을 때 자아가 느끼는 정서란 주변인으로서의 그것일 터이다. 이 시에서 ‘오래된 밥’이란 “주인이 버린 옷”이나 “혼자 식어가는 커피”와 같은, 소외된 자아의 표상이다. 곁에서 맴돌아도 아무도 그에게 손 내밀지 않는, 더 이상 아무도

그에 대한 “허기를 느끼지 않는”, ‘오래된 밥’과 같은 존재, 이것이 시인이 인식하는 자아의 현실인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열기가 사라져버린 심장”, “얼룩 하나 지우지 못하는 팔뚝”은 소위 진보라 일컬어지는 기술적 발전과 그로 인한 편리에 알게 모르게 저당 잡혀버린 주체의 실천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 적응한 자연스러운 생활 태도에 대해 너무도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일찍이 “기계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운동에는 이미 파시스트의 난폭성과 비슷한 거친 폭력성과 과격성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계에 익숙해지면서 심장의 열기가 사라져버렸다는 시인의 인식 또한 동일한 의미역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주체는 현실적 자아인 까닭에 ‘들판’으로 표상되는, 분리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세탁기 속에 몸을 헹구듯’ 온전히 기계적 현실에 기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적 자아가 중간자적 상황, 회색 지대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앞서의 인용시들과 동일한 맥락에 놓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가능성에 대한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차질적이라 할 수 있다. 불가능성을 껴안고서 가능성을 향해 한 발을 내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스함을 기억하고” 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인데 “따스함”에 대한 기억이란 기계적·도구적 관계가 아닌, 대상과의 ‘열기’ 있는 관계에 대한 회감에 다름이 아니다. 시인은 또 다른 한편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통합적 세계에 흡입되지 않는 존재 간의 고유한 관계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가능성’에 대한 책임과 의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시가 「수평선에 대한 생각」이다.

 

그리워서 멀다/외로워서 멀다/눈길이 먼저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너를 향하여/나는 생각한다//목을 매달까/저 아슬한 줄 위에 서서 한바탕 뛰어볼까/이도저도 말고 훌쩍 넘어가 버릴까//매일이라는 절벽을 힘들게 끌어당기며/나는 다시 생각한다//아직도 내게는 수평선이 있다!

-「수평선에 대한 생각」전문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수평선’은 영원히 멀리에 있는 대상이며 그것을 그리워하는 자아는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눈길’은 끊임없이 ‘달려가’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너”, 그것은 바로 이상, 혹은 구원의 세계이다. “목을 매달”고자 했던 뜨거운 심장일 때도 있었다. “아슬한 줄 위에 서서 한바탕 뛰어볼까”, “훌쩍 넘어가 버릴까” 관념 속을 헤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실존적 자아는 “매일이라는 절벽” 앞에 그야말로 ‘매일’ 마주해야 하는 존재다. “매일이라는 절벽”, 그 불가능성을 “힘겹게 끌어당기며” 주체는 ‘다시’ 생각한다. “아직도 내게는 수평선이 있다!”고. 이 정언명령과도 같은 언표는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결코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태도이자 결의임이 분명하다.

“길가의 구부러진 나무”나 “먼지 뒤집어쓰고 며칠 살다갈 작은 꽃”에 대한 감수성은 사소하고 미미한 대상에도 온 우주의 섭리와 이치가 스며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정적 동일성에 대한 감수성을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는 시가 「가을을 지나는 법」이다. 이 시는 인간이 자연과 어떠한 호흡으로 공존해야 하는지, 무력하면서도 가장 강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의지와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가을은 느린 호흡으로/멀리서 걸어오는 도보여행자//점자를 더듬듯/손길이 닿는 곳마다/오래 마음 물들이다가/툭/투우욱/떨어지는 눈물같이/곁을 스치며 지나간다//망설이며 기다렸던 해후의/목 매인 짧은 문장은/그새 잊어버리고/내 몸에 던져진 자음 몇 개를/또 어디에 숨겨야 하나//야윈 외투 같은 그림자를 앞세우고/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가을/도보여행자//이제 남은 것은/채 한 토막이 남지 않은/생의 촛불/바람이라는 모음//맑다

-「가을을 지나는 법」전문

 

위 시에서 초점화되고 있는 것은 ‘마주침’, 즉 서정적 동일화의 순간이다. 가을이 그저 동일한 무게로 지나가고 그것이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불과하다면 ‘마주침’은 없는 것이며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 시에서 ‘가을’은 단순히 때 되면 돌아오는 사계절 중의 하나가 아니며 계측 가능한 물리적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느린 호흡으로”, “오래 마음 물들이”는 서정적 자아의 고유한 시간이자 주관적으로 환기되는 순간들이다.

 

자아와 대상이 서정적으로 동일화되는 황홀한 순간, 그것은 바로 시의 한 구절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스미고 삭힘의 과정이 필요하다. “망설이며 기다렸던 해후의/목 매인 짧은 문장”은 잊어버리고 서정적 자아는 그저 “자음 몇 개”만을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다는 표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음’, 즉 자아에 스며있는 합일의 감수성은 이를 흔들어 깨우는 ‘모음’과 만나게 되면 한 편의 ‘맑은’ 시가 될 것이다. 서정적 자아의 마음을 물들이는 ‘모음’이 자연에서 찾아지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느린 호흡으로”, ‘오래 물들이는 것’은 ‘가을’이기도 ‘시’이기도 한 셈이다. “내 몸에 던져진 자음”에서 보듯 서정적 자아 또한 ‘가을’과 시에 동일화되어 있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야윈 외투 같은 그림자를 앞세우고/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대상은 표층적으로는 ‘도보 여행자’로 의인화되어 있는 ‘가을’이지만 그 대상이 ‘시’이기도, ‘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일까. “길 없는 길”이라. 길은 없고 길 없음 그것이 바로 길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능성’에로의 길이 아닐까. 또한 “채 한 토막이 남지 않은/생의 촛불”과 ‘바람’의 위태로운 공존은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과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는 주체, 내지는 시인의 정신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 없는 길”을 “느린 호흡으로”, “오래 물들이며” 걸어가는 것, 이것이 ‘시인’의 숙명이자 ‘시’의 운명인 셈이다. 결국 ‘불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은 “길 없는 길” 위에 있는 존재들에 의해서임을 나호열의 시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번 신작시들에서 시인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회색적 존재,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삶을 염결적 태도로 묘파해내고 있다. 이를 실존적 자아에 대한 성찰로 불러도 좋고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망을 껴안고 ‘가능성’에 대한 지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이 ‘가능성’이란 결코 쉽게 포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성에 대한 집요한 추적, 염결성에서 비롯되는 깊은 ‘수치심’ 후에야 획득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나호열의 시는 비루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사소하고도 미미한 소재들을 통해 거대담론을 미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측면에서 탁월하다. 비루한 일상의 묘파를 통한 불가능성의 형상화, 그러한 진솔한 성찰을 통한 가능성에의 책임, 이것이 『촉도』이후 나호열의 시세계를 관류하는 주제이자 요체가 아닌가 한다.

박진희

문학평론가, 저서로 『유치환 문학과 아나키즘』, 『문학과 존재의 지평』 등이 있음. 현재 대전대학교 강의전담교수. 7112bb@hanmail.net

낭송시

내 속에 나무가 살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에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가을편지

당신의 뜨락에 이름모를 풀꽃 찾아 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떨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어느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지요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 죽인 발자국과

까맣게 타버린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그냥 상처는 웃는다라고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마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나호열 羅皓烈 연보 年譜

 

1953년 8월 1일(음)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282 번지에 출생

1980년 울림시 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Mook지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1』(영학출판사),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2』(정신세계사)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어떤 하루 외 2편이 당선됨

1989.06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도서출판 청맥

1989.08 시집 <집에 관한 명상 또는 길 찾기> 소담출판사

1991.0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진흥기금 받음

1991.12 시집 <망각은 하얗다> 도서출판 예진

1991.12 사진시집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도서출판 예진

1991.12 【시와 시학】 중견시인상 받음

1993.05 시집 <칼과 집> 시와 시학사

1999.12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시와 시학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정보화사업 문인으로 선정됨

2001.02 시집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3> 도서출판 예진

2002.08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포엠토피아

*한국문화우수도서 선정

2003.08 사화집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독도사랑협의회

2004.10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리토피아

2004 *녹색시인상 받음

2005.10 영문사화집 <칠 천 만개의 독도를 꿈꾸며> 독도사랑협의회

2007.10 시집 <당신에게 말 걸기> 예총 출판부

2007.10 한민족문학상(대상) 받음

12 (사)한국예총 특별 공로상 받음

2008.10 시집 <타인의 슬픔> 미네르바

2011.01 시집 <눈물이 시킨 일> 시와시힉사

2011.12 (사)한국문인협회 서울시 문학상 받음

2015.05 시집 <촉도> 시와시학사

* 세종우수도서 선정

2015.12 충남시인협회 문학상(대상)받음

 

경력

 

인터넷문학신문 imoonhak.com 발행인(2000 - 2010), 독도사랑협의회 회장(2003 -2007),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역문화위원( 2005- 2008),(사) 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장 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 (2005 -2010), 현재는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계간 시와 산문 편집위원, 한국녹색시인협회 회장, 건국문학회 회장, 서울뉴스투데이(sntoday)발행인으로 있음.

http://blog.daum.net/prhy0801(세상과 세상 사이)

prhy0801@khu.ac.kr, prhy0801@daum.net

 

도와주신 분들

시원문학회, 도봉시벗, 노원문학회, 소요문학회, 시즐

서화 : 최명규( 서예가, 서천예총 회장)

펜화 : Scott Jung

김창현( 서예, 전각가)

강만수(시인)

박주순(시인)

문철수(시인)

시낭송

최경애, 현정희, 이루다

시노래

정진채(Singersong writer)

음향지원

나유성( 작곡가, 사운드리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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