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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섬 사이에 사막이 나타났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6. 4. 00:28

 섬과 섬 사이에 사막이 나타났다

입력 : 2016.06.01 03:00 | 수정 : 2016.06.01 06:28

[38] 조각가 이일호와 운염도와 모도

바다가 매립되며 생긴 사막엔 사진가들 나타나
운염도에 평생 산 어부는 "누가 뭐래도 여기가 낙원"
조각가 이일호의 모도 작업실은 조각공원으로 변신
섬에서 기대 못한 비현실적 풍경들 곳곳에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섬 사이 바다가 뭍이 되더니 몇백 톤짜리 날틀이 뜨고 내리는 비행장이 되었다. 인천 영종도와 용유도 이야기다. 영종대교 아래에 있는 운염도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운염도와 이웃 소운염도, 매도 사이 바다가 메워지더니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20분이면 서울로 가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운염도에서 태어난 서른여섯 살 먹은 사내 양현호가 말했다. "1998년으로 기억한다. 평생 옆 섬도 배를 타야 갈 수 있던 우리가 차를 타고 집 밖을 나갔다. 아버지 입에서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천지개벽한 운염도

평생 배를 몰았던 아버지 양정복은 매도 사람이다. 올해 일흔이다. 1960년 매도가 군부대에 수용되면서 이웃들과 함께 운염도로 집단 이주했다. '염'은 작은 돌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할아버지는 돛 단 목선을 몰았고 아버지 양정복도 목선을 몰았다. 바지락을 잡았고 굴을 캤고 수많은 물고기를 잡아 아이들을 키웠다. 목선은 철선으로 바뀌었다. 돛은 엔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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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뭍으로 변하고, 뭍은 사막으로 변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영종대교 아래 운염도 갯벌에는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는 낯선 공간이 있다. /박종인 기자
바다가 매립됐다. 바지락은 사라졌다. 굴은 줄어들었다. 어획량은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길 났다고 좋아했던 주민은 모두 떠났다. 섬에는 세 집 남았다. 양정복은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57년 살아온, 섬 아닌 섬을 떠나지도 않을 작정이다. 양정복은 입에 달고 산다. "아이들 다 키웠다. 내 집이 별장이고 낙원이다." 늙은 어부의 집으로 가려면 길이 험하다. 매립 공사가 진행 중인 다리 아래 황톳길을 뚫고 한참을 가야 한다. 험하되, 갈 가치가 있다.

어부 양정복의 집

다리 아래에 길 두 줄기가 평행으로 나 있다. 다리 왼쪽으로는 황량한 칠면초와 함초 초원이 펼쳐져 있다. 저어새 같은 희귀조들이 그 밭에서 목격된다. 길 끝 초원 한가운데에 원두막이 서 있다. 벽 없는 집,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이다. 낭만적이며 고독하다. 집이 보일 무렵 길이 오른쪽으로 비켜 나가고 그 길 끝에 어부가 사는 집이 나온다. 집은 누렁이와 뚱보와 그 친구, 이렇게 개 세 마리가 지킨다.

갯벌 저편 벽 없는 집과 청년들.
갯벌 저편 벽 없는 집과 청년들.
갯벌은 호화롭다. 누워 있는 목선, 선착장으로 난 작은 돌길과 그 끝에 놓인 신발 한 켤레, 그 옆에 서 있는 깡마른 나목 숲이 보인다. 나목 숲은 잡은 물고기를 꿰어놓고 말리는 덕장이다. 따가운 바다 햇볕에 풍경이 녹는다. 트럭 오가는 황톳길 끝에 이런 비현실적 풍경이 있다니.

그 풍경에 홀린 외지인들이 어부네 집을 제 집처럼 휘젓는 바람에 속이 상할 때도 있다. 덕장 앞에서 포즈를 잡으라고 머슴 부리듯 구는 작가님들, 가재도구를 이리저리 맘대로 옮겨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가님들이 얄밉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촬영을 다 마치고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갯벌이 어디예요?" 이 비현실적 풍경마저 시시하게 만드는 초현실적 공간이 운염도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사막으로 변한 갯벌

뭍으로 변한 갯벌이 말라갔다. 꾸들꾸들해진 갯벌을 붉은 함초와 칠면초가 덮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도록 말라만 가던 갯벌이 터지기 시작했다. 가뭄에 갈라졌다가 해갈되면서 원상복귀하는 논밭 정도가 아니었다. 갈라진 조각 형상 위로 비가 퍼붓고 밀물에 물이 스며들면서 담금질을 당한 단단한 사막이 되어버렸다.

사진가들은 세상 좋은 풍경은 귀신처럼 찾아낸다. 운염도 사막에도 어느덧 육중한 카메라로 무장한 무리가 나타났다. 어부의 아들은 "주중에는 하루 서너 명, 주말에는 말도 못 하게 많이 와서 길을 묻는다"고 했다.

운염도 사막은 영종도로 나가는 일방통행 둑길 너머에 있다. 차는 중간에 있는 갈래길에 대야 한다. 물이 덜 빠진 갯벌에는 미니어처 세상이 펼쳐져 있다. 화성 표면 같기도 하고 타클라마칸 사막 같기도 하다. 물길은 사막에 난 외길 도로처럼 보인다.

쫙쫙 갈라진 건조 지대는 낯설고 아름답다. 회색 혹은 고동색 혹은 소금이 말라붙은 흰색 땅에 푸르고 붉은 염초들이 생명을 잇고 있다. 흐린 날 운염도와 매도와 영종도 산등성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은 지구가 아니다.

풍경에 취했던 조각가 이일호

조각가 이일호.
조각가 이일호.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신도로 간다. 신도는 믿을 신(信)에 섬 도(島)다. 주민들은 신실한 섬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신도와 시도와 모도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영종도 군부대에서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과녁으로 삼았다고 시도(矢島)요, 그물을 걷으면 물고기보다 띠풀이 많았다고 해서 띠염이라 불리다 모도(茅島)가 됐다. 시도에서 모도를 건너는 다리 왼편에는 달려가는 청년과 앉아 있는 소녀 조각상이 있다. 조각을 한 사람은 이일호(70)다.

이일호는 중견 조각가다. 죽음과 삶, 성(性)을 초현실주의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가다. 그가 말했다. "풍경에 취하면 예술을 하지 못한다. 창작을 하려면 멋대가리 없는 풍경 속에 살아야 하는데, 실수였다."

이일호, 보통 사람이 아니다. 회화, 조각, 음악, 글 따위 온갖 분야에서 끼를 발산하는 예인이다. 전인권이 부른 '맴도는 얼굴'(원제는 '헛사랑'인데 무슨 그런 불손한 사랑이 다 있냐고 금지곡이 됐었다)을 지었고 영화 시나리오도 만들었고 글도 쓰는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말은 유치한데 작품은 천재적"이라고 한다.

2003년 서울에 살던 이일호는 친구 초청에 모도 옆 장봉도에 갔다가 모도에 반했다. 산허리를 구불구불 넘어가야 나오는 배미꾸미 해변 황량한 갈대밭에 반했다. 남들이 보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지만 그 황량한 바다가 좋았다. 땅을 사고 이듬해 작업실을 차렸다. 만든 작품은 갈대밭 옆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세워뒀다. 그 무렵 TV드라마 '풀하우스' 세트장이 인근에 건설되고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어떻게 찾아오는지, 세트장을 구경 온 사람들이 작업실까지 찾아와서 작업실을 기웃대고 작품들을 기웃댔다. 작은 섬 시도가 외지인으로 북적이고 작업실은 필수 코스에 포함됐다.

예술가가 떠난 섬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가족을 먹여 살린 형을 따라, 보령에서 군산으로, 평택으로 옮겨다니며 큰 사내였다. 이일호는 슬그머니 북한산 자락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모도 작업실은 주변 권유로 공원으로 만들었다. 예술가가 떠난 해변에 예술이 흔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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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꾸미 조각공원에 있는 이일호의 초현실주의 작품 '버드나무'.
이일호가 말했다. "풍경에 홀려서 눌러앉았는데, 그 풍경이 나를 떠나보냈다. 어쩔 수 있나. 바다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바다는 공(空)이다. 그걸 내가 좋아했으니." 예술가는 속이 상했지만 사람들은 즐겁다. 영화감독 김기덕이 찾아와 이곳에서 영화 '시간'(2006)을 찍은 이후 외국 관광객이 많다. 다만 에로티시즘을 담은 작품을 보며 감상 대신 희화화하는 사람들이 아쉽다고 했다. 배미꾸미 조각공원 비빔밥은 일품이다. 해초와 야채를 버무리고 땅두릅과 구기자, 질경이와 소라, 도토리묵과 파래를 반찬으로 낸다. 아침 노을과 쏟아지는 별 아래 묵는 펜션도 있다. 예술가는 떠났지만, 이 작은 섬 모도에 기대 않던 풍경은 남아 있다.

조각공원 길목 버스정류장에는 불망비(不忘碑)가 서 있다. 조선 말 경기도 암행어사 영재 이건창(李建昌·1852~1898)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건창은 모도 주민을 수탈하던 관리들을 처단했다. 그 앞에는 작은 논이 있다. 1987년 이곳 소녀로부터 "개구리 소리를 듣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이곳을 찾은 당시 내무부 장관 노태우가 제방을 세우고 만들어준 논이다. 신도와 시도와 모도는 '삼형제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로 연결돼 있다.

시인 정현종이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모든 섬은 외롭다. 운염도도 모도도 외롭다. 쨍쨍한 여름날, 섬으로 틈입해본다. 비현실 속으로 숨어 본다.

[운염도 여행수첩]

〈운염도 가는 길(서울 기준)〉

운염도
1. 내비게이션에 '영종공설묘지'를 검색. 2. 금산IC에서 나와서 묘지 쪽으로 가다가 마을 속으로 들어가 작은 삼거리에서 좌회전, 다음 삼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매립지 공사장에서 좌회전 후 곧바로 우회전. 3. 아치형 작은 철교를 건넌 뒤 직진. 다리 건너 왼편에는 염초 초원, 오른쪽은 왕복 일방통행 비포장도로다. 길 끝 무렵에 왼쪽 갯벌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막다른 길 정면에 공사장이 있고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 끝에 어부의 집이 있다. 4. 갈라진 사막, 갯벌은 영종도로 나가는 둑방길로 올라가야 한다. 방향 엄수. 중간에 삼거리가 나오고 차 댈 공간이 있다. 왼쪽으로 가면 호수와 탐조 공간, 직진하면 드디어 사막이다.

〈삼목여객터미널〉

신도까지 승용차 1만원, 성인 2000원.

〈모도 배미꾸미조각공원〉

입장료 2000원. 비빔밥 1만원. 펜션은 문의할 것. (032)752-7215, (011)304-3065, www.baemikumipens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