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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累卵의 삶이 꿈꾸는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 : 강동수 시집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4. 18. 22:18

누란累卵의 삶이 꿈꾸는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

나호열(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삶(Life itself)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가 중요하다 - 니체

1.

 

  플라톤은 현상 속에 깃들어 있는 본질, 또는 원형을 이데아Idea라고 규정했다. 말하자면 의자에는 의자의 원리가 숨어 있으며, 배에는 부력浮力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이데아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형상이며 실재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인 것이다. 플라톤은 따라서 이데아를 복사하려고 하는 시인들의 행위는 모방물의 모방인 까닭에 느낌과 감각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데아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시인들은 마땅히 추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밀고 나갔다. 이와 같은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은 오늘날까지도 시인들의 은폐된 상처로, 극복해야할 숙제로 남아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현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模寫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도 애매성과 모호성을 함유하고 있는 언어를 도구로 삼아서 말이다. 오늘날처럼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판타지를 제공하는 시청각 매체가 활성화되어 있는 형국에서 언어의 사전적 의미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전통적 의미의 시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모사의 또 다른 이름인 재현再現이 그 대안으로 모색될 수 있다. 재현은 메시지(정보)보다 이미지(정서)의 전달에 보다 역점을 두는 행위이다.

 

   일찍이 칸트가 주장했듯이 인간은 감성과 오성을 통한 범주範疇내에서만 현상을 포착할 수 있다. 즉 인식의 레이더 안에 포착된 것만을 모사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모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수긍하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파레이돌리아Par eidolia 현상을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감각기능의 왜곡을 증명할 수 있다. 1899년 조세프 재스트로우Joseph Jastrow는 재미있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우리의 감각적 기능(시각)이 편향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한 장의 간단한 그림, 왼쪽을 향해 보면 오리인데, 오른쪽으로 보면 토끼로 보이는 이 현상은 우리의 인식 이전에 자리집고 있는 총체적 경험이 바로 지금의 시각적 판단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완벽하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은 모사 능력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포기하는 대신 인식의 왜곡이라는 통로를 따라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축자적 언어의 기능을 사상捨象해 버린 자리에 굴절된 의식을 새로운 언어의 문법구조로 드러내는 태도를 재현이라고 정의한다면 플라톤이 시인을 향해 던졌던 문제는 이제 새롭게 조정되어야 한다. 즉 시인을 이데아를 모방하는 자로 규정함을 버리고, 시인을 사실(현상)로부터 받아들여진 관념(이미지)을 재해석하는 존재로 재규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은 철학과 문학이 분화되기 전의 명제이거나 아니면 그 둘의 목표가 동일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인 만큼 오늘날의 시인들에게 주어진 책무는 언어의 축자적 기능으로부터 - 기의 記意 Signfie- 기표 記標 Signfiant의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데 있다. 부연해서 말한다면 오늘날의 시의 순기능은 기계화된 의식에 자극을 던지고 상상을 통한 개별적 삶의 통렬한 반성에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2.

 

  위와 같은 소견所見은 강동수의 시작詩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지표로서 작동한다. 이미 밝혀진 바대로 사실(현상)의 완벽한 모사가 불가능함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기능에 익숙해져 있을 때에는 이른바 전통적 서정시가 걸어가고 있는 주관적 정서의 표출이 농후해진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개인(시인)의 개별적 경험을 생생하게 모사하여 시대적 징후와 연결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리얼리즘의 세계에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재현에 역점을 두면서 시의 미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주의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을 터인데 강동수의 시편은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이 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음으로 해서 때로는 세계와의 화해가 때로는 갈등의 국면이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말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시선의 드러냄을,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일관된 세계관의 불투명성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이런 사적인 생각은 돌이켜보면 강동수의 시를 처음 대했던 2008년도부터 시집『누란으로 가는 길』을 통독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강동수 시인의 등단 심사를 맡고 심사평을 썼던 그 때의 강동수 시에 대한 인상과 기대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친근함이 선뜻 시집『누란으로 가는 길』의 의의를 독자와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꽃비」,「모래시계」,「참새는 들판에 앉아야 한다」,「담쟁이넝쿨」등의 등단 작품을 출발점으로 하여 시집『누란으로 가는 길』전편을 통해본 시인의 세계관은 전혀 흔들림이 없는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동수 시인의 세계관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부조리하며, 따라서 상처받고 뿌리 뽑힌 자들의 아픔이 가득 찬 곳이며 시간만이 이 세상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낙화를 꽃비로 치환하면서 생명체의 ‘유언’으로(「꽃비」) 읽거나, ‘잊혀진 날’들이 그리운 사람들이 돌려놓는 시간(「모래시계」)으로 퇴행하거나 ‘하늘을 이고 자유로이 날고 있는 참새의 울음소리 듣고 싶다’(「참새는 들판에 앉아야 한다」)는 생명의 들판을 잃어버린 불구의 현실에 대한 참담한 토로를 경유하면서도 끝내 ‘파란 하늘을 향해 희망을 손짓하던/ 담쟁이 넝쿨을 만나고 싶다’(「담쟁이 넝쿨」)는 희망을 놓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근력이 소실되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음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교언영색으로 얼룩진 섣부른 달관이나 시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산문으로 치닫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시법詩法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 드문 오늘날의 형편을 돌아볼 때『누란으로 가는 길』에 수록된 60 여 편의 시들은 삶의 아픔과 존재함으로 말미암은 슬픔의 되새김질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 강동수의 고집과 맷집을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다. 첫 머리부터 마지막 한 줄까지 새롭지 않은 듯 하면서도 새롭고, 슬프면서도 슬픔에 겨워하지 않는 시 읽기의 즐거움이『누란으로 가는 길』에 가득하다면 지나친 찬사일까?

 

3.

 

 『누란으로 가는 길』의 공간은 바닷가이다. 그러나 그 바다는 낭만적인 휴식의 장소도 아니고 광대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벅찬 출발점도 아니다. 그 바다는 생존을 위하여 끈질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장소이며, 그 싸움 끝의 무덤이다. 바다에 생을 걸어놓은 사람들은 ‘바다와 강물의 경계를 오가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갈매기’ 이거나(「폐선」) 생의 항로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폐선이 되어 바라보는 곳 (「바닷가 그집」) 이며 바다에서 죽은 자식 생각에 바다를 내려놓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곳(「바다가 아프다」)이다. 어디 그뿐인가! 베트남에서 시집온 아내가 사라져 버리고 난 후 바다에서 해고된 김씨가 사는 곳도 바다 (「물개」)이며 ,‘나는 지금 바다를 걷고 있다/ 태양이 날마다 쓰다듬다 멀어진 바다의 끝을 향해 걸으면/또다시 희망처럼 멀리 달아나는 수평선’(「바람의 행적」)처럼 절망을 되내이는, 그러면서도 쉽사리 떠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빈 집’, ‘암굴’, ‘다락방’ 과 같은 폐쇄된 공간으로 도피하여 ‘알함브라 궁전’이나 ‘마다가스카르’, ‘호텔 캘리포니아’, ‘누란’과 같은 멀고 먼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꿈꾸는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나약해 보이기도 하고 외로워보이기도 하는 시인의 성장기는 가방끈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부재로 말미암은 소외 - ‘가방은 언제나 내려놓고 싶은 물건이었다......(중략)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이력을 묻지 않는다.’(「가방끈」)- 로 내몬다. 그러나 시인의 소외감은 세상의 실상과 조우하면서 ‘텅 빈 속처럼 마음이 부풀러진 사람들’( 공갈빵)과 ‘욕정이 넘쳐나는 골목에는/ 꼬리에 휘둘린 남자들이/하나. 둘/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도시에 밤은 /깊은 여우굴속에 묻히(「여우다방」)’는 세속과 마주치면서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시인보다 더 상처받고 더 소외된 사람들이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음을 목도할 때 삶에 대한 전망은 어떠했을까?

 

 

밤늦은 가로등 아래 한 사나이 누워있다

지면으로 낮게 흐르던 햇볕이 사라진 자리

한 평 불빛 그림자를 베고 누워있는 저 사내

그는 지금 설산을 헤매고 있다.

익숙한 도시의 미로를 떠나 설산을 향해 가고 있다

마지막 베이스캠프를 떠나던

아침의 기억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걸었던 시간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정적 흐르는 암흑의 시간에 몸을 맡겨버린다

여기는 베이스캠프!

여기는 베이스캠프!

응답하라!

응답하라!

사내의 주머니에서 쉼 없이 울리는 휴대폰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추락한 한 사내

크레바스에 갇혀 꼼짝을 않는다

 

어둠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

 

한 가닥 희망을 붙들어 두고 있는 가로등만이

사내를 지키고 있

              

- 시 「크레바스*에 눕다」전문

 

  술에 취했는지, 죽었는지 길바닥에 쓰러져 누운 사내는 누구일까? 정상을 꿈꾸며 삶을 기어오르던 우리들이 아니던가? 시 「악어 」에 드러난 바, 누우 떼를 기다리는 악어가 그러하듯이, “힘찬 몸부림을 위해 오래 참고 있는” 지갑을 가득 채우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좌절하는 사내가 누워있는 길바닥이 한 번 빠지면 다시는 기어오를 수 없는 크레바스라고 인식하는 시인에게 왜곡되고 부조리한 현실은 의례히 그래왔던 역사였던 것은 아니던가? 강동수의 시편에서 당대의 부조리나 모순이 분노와 한탄으로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이와 같이 시인이 느끼는 소외가 개별적인 소산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 자칫 숙명주의자로 오해받을 수 있겠지만 시인의 잠행 潛行은 시인이 체험한 빈궁과 소외를 그의 품성으로, 꿈으로 치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시인이 가고 싶어하는 이국異國에 대한 환상은 시인의 모든 번뇌와 고통을 씻어내리는 치료제이다. 때묻지 않은 원시의 생명과 생명의 환희가 춤추는 곳이 실재한다는 믿음은 현실의 슬픔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꼼수를 허용하지 않는 시인의 품성은 이 세상을 건너가는 나침반이 되기에 숱한 애환에도 불구하고 애이불상 哀而不傷의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시 「길 없는 길」은 시장통에서 야바위꾼이 벌린 박보장기 내기에서 이기고 판돈을 딴 이야기이다. ‘길 없는 길’은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길이다. 또한 범상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묘수 妙手이기도 하다.

 

 

내 나이 약관의 이십

그때나 지금이나 시끄러운 장날 시장터 입구

장기판을 벌려놓고

외통수 내기를 하는 박보장기판 앞에 서있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그리며

장기판을 들여다볼 때 장기판 한쪽에서 펄럭이던

오천 원 지폐 한 장

내 주머니 속의 거금 오천 원이 내기 판에 걸리고

네모난 장기판 위에서 벌어진 난타전

영락없는 외통수에 걸려든 적군의 항복의 받아내고

유유히 개선장군이 된 그 날의 공돈 오천 원

시장 통을 돌아서 나올 때 그 날의 서늘한 뒤통수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날 이후 누구에게 외통수를 걸어본 적이 없다

길 없는 길에서 헤매던

그 날의 시장터 박보장기판

가끔 내가 외통수에 걸려

갈 길을 잃어버린다.

              

                         - 「길 없는 길」전문

 

 

 

어찌 되었든 간에 정당하지 못한 행위는 도덕률에 위배된다. 야바위꾼과의 대결에서 얻은 소득은 야바위꾼이 착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 이기고도 뒤통수가 서늘해졌다는 양심은 ‘길 없는 길’을 서슴치 않고 내달리는 우리를 말없이 꾸짖는다. 아마도 시인은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 위를 아침부터 경계선을 긋는 사람’일 것이다. ‘수없이 건넜던 생의 고비를 생각하면/ 차도車道 위의 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경계선을 그리며 나아가는’(「경계선을 긋다」) 일이 시를 짓는 일과 상통할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이 강동수의 시들은 슬프고 아픈 현실을 목도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쉽사리 애증이나 집착에 휘둘리지 않고 수없이 “~까?”로 끝나는 의문형의 질문을 거두지 않는다.

 

4.

『누란으로 가는 길』의 씨줄이 ‘바다’라고 한다면 그 날줄은 ‘시간’이다. ‘수없이 “~까?”로 끝나는 의문형의 질문을 거두지 않는다.’는 문장을 통해서 시인의 생각을 추측해볼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시인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현대사회의 특징이기도 한 불안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희망을 삭제하기 때문에 ‘태양이 아침을 몰고 와 빈방의 구들장이 환해지면 /또 하루라 명명하고 / 바삐 달아나는 기억의 포자들을/ 붙들어 둘 수 없는 어제의 오늘이라 부른다’(하루)는 시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발바닥에 마비가 오거나 이빨이 뽑히는 질병처럼 시간은 우리의 영육에 예고를 하지 않고 찾아온다. 그러하기에 ‘낡은 벽보는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요/새로운 기억을 덧칠할 때까지/ 시간의 벽 속에서 오랫동안 풍장風葬되고 있었어요’( 「낡은 벽보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에 드러나 있듯이 낡은 벽보처럼 시간의 벽에 매달린 채 풍장되는 존재가 우리들이다. 어떤 전망도 불확실하며, 그래서 시인은 묻게 되는 것이다. 풍자가 돋보이는 시 「사소한 의심」에서 시인은 이렇게 회의한다. 철학관에 앉아서 다른 이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저 도사는 자신의 미래를 몰랐을까? 산속에 가부좌하고 사셨던 노스님은 폐암으로 돌아가실 줄 알았을까? 죽음으로 아침신문을 장식하는 저 사이비 교주는 자신의 부활을 믿었을까?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직관은 미래학자 짐 데이터의 주장에 맥락이 닿아 있지 않을까?. “누구도 미래를 예측(predict)할 수는 없다. 미래학의 본질은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대안적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다. 선호되는 미래상(preferred futures)을 그려보고, 창조하며 그걸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도와준다."

 

  시인이 깨달은 바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안식과 평화는 과거의 기억을 잃지 않는 것이다. 기억을 잃지 않는 한, 과거에 축적된 시간은 가장 완벽하고 훼손되지 않는 존재이다.『누란으로 가는 길』을 장식하는 시「내 마음의 천국」은 단지 망인이 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로 감상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 곳이 천국이라면 납골당 또한 천국이다. ‘상사화 한 송이 잎을 기다리며 피어있다/영원히 만나지 못할 꽃송이와 잎의 애절함이/담벼락에 그림자를 새기고 있’음은 시간이야말로 살아 있는 존재와 사라진 자를 잇는 다리이며, 과거를 기억하는 자의 축복임을 암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집『누란으로 가는 길』은 문명 文明에 대한 비판과 개인적 정감을 교직 交織하면서 현실의 차가운 벽에 과거의 시간을 덧붙이는 일관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누란으로 가는 길」을 표제시로 삼은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누란 樓蘭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서역에 번성하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나라이다. 아직도 정확히 멸망의 원인은 찾을 수 없지만 생명줄이던 로푸노르 호수가 물줄기가 바뀌어 버린 탓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건조한 기후 탓에 수많은 미라가 발견되었고, 그 미라들의 살아 있는 듯한 주검을 통하여 누란이라는 나라와 누란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풍요로웠던 삶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누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서히 멸망해가는 누란의 풍경이 오늘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현실의 아우성이 메아리치는, 부패해 가는 누란累卵의 삶을 버리고 온전히 과거의 기억으로 살아있는 폐허의 땅으로 낙타를 타고 가고 싶어하는 소망이 시인의 마음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득 발가락 양말을 신고 소금사막을 건너가고 싶다.

 

 

황사가 불어온다

모래바람은 고비사막을 넘어와

내 마음속에 모래기둥 하나 세운다

먼 길을 돌아온

낙타의 울음소리 잠든 혼을 깨우고

아직 눈뜨지 못한 해 그림자는

하늘에서 길을 잃는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건너온 바람은

집집마다 사막의 전설을 알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흉노족의 말발굽을 피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열사의 땅으로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

도시는 모래성을 쌓고

조금씩 허물어져간다

 

길을 나서면 도시는 거대한 사막

신기루 같은 잿빛 가로수를 지나면

만날 것 같은 문명의 도시

 

실크로드로 길을 떠난다

이천 년 세월을 넘어 모래사막에 묻힌

누란왕국에 도착하면 꿈꾸던 오아시스

그 곁에 내가 묻어둔

청춘의 푸르른 꿈이 자라고 있을까

방황하는 로푸노르 호수가

두고 온 고향 누란으로 발길을 돌리듯이

길 잃은 발걸음이 사막에서 길을 찾는다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