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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불루儉而不陋를 무위 無爲로 읽다/ 이사랑의 시집 <<적막 한 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3. 8. 13:28

검이불루儉而不陋를 무위 無爲로 읽다

나호열

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적막 한 채』는 이사랑의 첫 시집이다. 몇 년 전 그의 시들을 인상 깊게 읽었고, 참신한 시인의 탄생을 예감하고 있던 터라 덥석 그의 『적막 한 채』를 들여 놓았으나 쉽게 그의 시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고백한다. 겨울이 시작되고 다시 봄이 오고 있는 이 시간까지 시인이 걸어갔던 삶의 행적을 좇는 일에 실패했고, 그래서 절망했다. 예전에 알고 있던 ‘이사랑’이라는 시인과 그의 시들은 『적막 한 채』에는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시인의 과거는 ‘적막 한 채’에 오롯이 스며들어 환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이 글은 시집을 처음 만나는 독자들이 마주치게 될 파격 破格의 광경이 얼마나 눈물 서리는 우리 삶의 감춰진 참모습인지를 함께 나누는 일에 바쳐져 있다. 상식 常識이라는 허울로, 체면이라는 장식으로, 스스로 유폐시켰던 자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시인이 해학과 역설의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고 가슴을 으깨어버린 현장과의 조우는 경악한 만큼 외롭고 슬프다. 그래서 파격이란 타자 他者의 삶을 각성 覺醒 시키는 강력한 도구로 작동하기도 한다. 잠시 몇 년 전의 기억으로 되돌아 가보자. 이사랑은 제 11회 수주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 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 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 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 시 「바늘 끝에서 피는 꽃」전문

  

 

 

수주문학상 대상작인 위의 시를 비롯해서 신작시 몇 편을 언급하면서 ‘내성 內省의 발현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시’로 이사랑의 시를 가늠했었다. 내성 內省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가식을 벗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위무 慰撫하는 것이며 애이불상은 말 그대로 슬퍼하되 마음까지 다치지 않는 극기 克己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삶의 허무함에 빠지지 않고 근기根氣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안간 힘! 그 때의 소회는 다음과 같았다.

 

 

재봉틀로 상징되는 노동은 회한과 절망을 거쳐서 분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조는 빈곤을 확대 재생산 시키는 왜곡을 일으킨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의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하는 수단을 넘어서는 놀이의 길을 걸어가기도 한다. 백장선사의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언급은 노동 속에서 삶의 의미를 궁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동 속에 함몰되는 노예의 삶이 있음을 꾸짖는 것이다.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이 이사랑 시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는 필자의 소견은 이 시의 話者가 취하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태도, 더 나아가서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일 이 시의 화자가 재봉틀을 돌리는 당사자로 설정되었다면 보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미흡하였을 것이다. 화자는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에서 처럼 상처를 가진(좀 먹은) 존재이다.「바늘 끝에 피는 꽃」에서의 재봉틀은 소비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제품의 생산이 아니라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치유와 서러움을 깁는 각성의 도구이다. 말 그대로 수선하는 도구인 재봉틀은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는 결구로 말미암아 기다림의 도구로 한껏 의미의 전환을 한다. 달맞이꽃의 꽃말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노동의 도구에서 치유의 도구로의 전환도 놀라운데 시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기다림의 도구로 재봉틀을 승화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연상과 상상력은 시인의 중요한 무기이지만 삶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긍정과 희망이 없으면 쉽사리 발화될 수 없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사랑의 시편이 노동의 긍정에서 그 노동 자체를 놀이로 격상시킬 수 있는 근력을 가지게 될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 글에서 파격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는‘내성 內省의 발현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시’에서 출발하여 『적막 한 채』에 이르게

되는 여정이 어디에선가 문득 단절되었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단언컨대, 『적막 한 채』만으로 이사랑의 시세계를 조망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적막 한 채』에 도달하기 이전의 ‘내성 內省의 발현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시’, 즉 기다림과 긍정의 시선이 어떻게 해서 와해되어버린 것인지, 그리하여 일체의 희망과 삶에의 편집에서 벗어난 듯한 『적막 한 채』 사이에 존재하는 의식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파격은 그저 궤도를 벗어난, 말장난으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사랑의 시편들에서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의 파격은 시집 『적막 한 채』에는 시인의 삶의 전반부를 아우르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앞에서 소개한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을 비롯하여 다수의 빛나는 시들을 시인 자신이 버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시력 詩歷 십 여 년의 과업을 사상 捨象시킬 수 있다는 것은 모험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파격은 이와 더불어 이사랑의 시들이 가지고 있던 견고한 형식의 파괴, 정통시법 詩法의 파괴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과감한 남도 사투리의 구사, 독백체의, 비유를 던져버린 직설적 화법이 질펀하게 깔린 이번 시편들은 거친 야유와 반어反語의 성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세 번째 파격은 우리 삶의 금기禁忌를 과감하게 뛰어넘는 유니섹스 unisex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집 『적막 한 채』를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한 생애의 이면을 들추어내어 더 외롭고, 더 괴롭게 상처를 들쑤고자 하는 절망의 시편으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 이사랑의 『적막 한 채』는 시인의 처절한 삶의 기록인 동시에 자신을 옥죄고 있는 삶의 사슬을 풀어내려고 하는 안간힘으로 읽을 때 스멀스멀 웃음과 눈물이 동의어임을 깨닫게 되는 페이소스가 함유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적막 한 채』의 배경을 이루는 공간은 남도의 함평이라 한다. 어느 날 문득 시인은 도시생활을 접고 생면부지의 마을에 숨어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나는 남편도 버리고 또/ 남편과 살던 집도 버리고,/ ...하략.../ 남도 황토 땅에도 마음 붙일 곳 없어 방황했다

- 「샤론의 꽃」 부분

 

 

귀향도 아니고 도피도 아닌 궁벽한 귀양살이 - 귀향과 귀양은 한자로는 다같이 歸鄕이다- 는 쫓겨간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를 추방한 것이다. 사람에게 실패하고, 곤고한 사회제도에 무릎 꿇고 난 다음에 절연을 위해 찾아든 시골 마을에서 시인은 뜻밖의 인연들을 만난다.

 

 

가난한 농가에 입주하던 날

집들이 선물로 들어온

돼지 한 마리

 

- 시 「가벼움의 애착」 1 연

 

 

낯 선 이방인이 찾아들었는데 돼지 한 마리를 집들이 선물로 안기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풍경 속으로 도망쳤’는데, ‘현재로부터 옛날로/ 도시로부터 산골로/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자본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로’( 「풍경 속에 숨다」 부분) 숨어들어 풍경의 배경이 되었는데, 그 공간에도 따스한 체온을 지닌 사람들이 잃어버린 과거의 얼굴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사랑아, 너를 보면/ 우리 죽은 미순이가 살아서 돌아온 거 가터야/ 너는 내 동생이여!’( 「꽃 피는 날에」 1연)하며 살겹게 다가오는 복순이 언니이고, 귀가 어두운 양 장로, 아들이 내려와 반 쯤 쓰러진 헛간을 밀어버리고 남천을 삥 둘러 심은 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들, 그런 할머니와 살며 개를 끌어안고 자는 어린 아이 성우, 그렇게 소외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귀양시킨 시인을 맞이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가식이 없는, 그러나 사람이 그리워 오일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시인이 대면한 낯 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함평장에는 마트에서 볼 수 없는

에누리와 손저울과 덤이 있어라!

싸목싸목 댕겨보시게요

웃음도 덤으로 따라온당께라

 

- 시 「함평장」 마지막 연

 

 

서로 물어뜯고, 아웅다웅하며 승패를 가르는 사람들을 떠나온 시인과 물어뜯고, 아웅다웅 하는 사람들조차 그리워하는 시골 사람들과의 만남은 잊혀졌던 가슴의 온기를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 가슴의 온기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는, 시인에게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아릿한 것이다. ‘ 어르신들 만나면 두 손 곱게 잡고/ 고개 숙여 인사하라고 가르친 어머니’( 「보호수, 느티나무」 1연)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젯밤 멧돼지가 와서 /고구마 죄다 파먹었다....중략 ...냅둬라! 배고픈 것들 / 나눠 줄 게 그것 밖에 더 있냐?//죄다 배고픈 죄다 /먹고 사는 일이 죄다, 죄다’ (시 「먹고 사는 일」 부분). 배고픔이, 먹고 사는 일이 죄라는 이 원초적인 한탄을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의 묵시록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의 편의대로 도구화된 자연이 아니라 순결한 섭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자연과 자연현상을 통해 시인은 관조나 완상이 아닌 사랑의 실체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들판에,

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제비들 전선에 빼곡히 앉아 있었다

누가 수렁논에 꽃농사 지었는지

온통 고마리꽃 여뀌꽃 지천이다

 

 

세상에나 세상이 이렇게 환하다니

그러나 눈부시진 않았다

 

 

고마리야 여뀌야

너희들도 꽃이라고…

꽃 한 번 피워보겠다고…

 

 

세상에 나와 빛을 본 순간

내가 울었던가 울었을 것이다

 

 

가을 들판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냥 울었다 까닭 없이

 

 

- 시  들꽃」 전문

 

 

 

 

농부들은 쌀을 수확하기 위해 피를 뽑고 잡초를 속아낸다. 그러나 들판에는 고마리도, 여뀌도, 제비들도 살아보겠다고 꽃을 피워 올리고 양식을 찾아 눈을 모은다. ‘환하지만 눈부시지는 않은’ 세상의 실상을 얼마나 더 많은 수식으로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묻는다.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한 밭에 두었다는데 / 왜 그랬을까?’ ( 「알곡과 가라지」  마지막 연). 왜 이 세상에는 승자/약자, 가진 자/못 가진 자, 기쁨/슬픔의 이분법의 가치가 횡행하는 것일까? 수많은 성인, 현자들이 궁구했고, 마침내 설파했던 ‘사랑’이 무차별無差別인 것을 시인은 감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를 유폐시켰으나 여전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세계, 이에 모순 항項으로 대립하는 무차별한 사랑의 명법 사이에서 시인은 여전히 좌절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한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오욕의 잣대로 만상萬象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자아) 은 자학한다.

 

 

1급수에서만 산다는

버들치 꺽지 열목어 쉬리 산천어 금강모치

세상이 혼탁해지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그 중 한 마리가 나다.

 

- 시 「결벽증」 부분

 

 

침침한 눈

썩어가는 치아

녹슬고 마모된 머리

생의 무게에 짓눌린 허리

세상을 혼자 짊어진 듯한 어깨

틀어진 문짝처럼 삐걱거리는 무릎

아무리 찾아봐도

나밖에 없다

 

- 시 「중고품」 부분

 

 

 

건강이 안 좋은 나는

몸을 신으로 모시고 산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자신을 믿고 사는 나는

스스로 내 몸이 신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라며

하느님이 '까불지 마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은

잡신 축에도 못 끼는 사이비다.

 

- 시 「자신」 전문

 

 

위의 몇 몇 시에서 골라본 인용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시인은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결벽증을 가진 외톨이이고, 몸이 성치 않은 중고품이며, 사이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자아)에 대한 통렬한 자각은 자기비하나 열등감의 표출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외로움은 타자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아(꿈)와 현실로 존재하는 자아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비하로 언뜻 비치는 시인의 발언은 눈물겹게 진솔하다.

 

 

‘추상적 사랑이라는 신기루/ 그것이 행복이라는 착각을 믿으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만큼/ 외로울 때가 또 있을까?’(「너에게 가는 길」 부분)처럼 사랑이 추상화될 때 야기되는 외로움은 자아의 더 깊은 곳에 자리잡은 마그마의 일시적인 분출에 불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긴 밤을 새우며 쌀을 한 톨 한 톨 세며 밥 한 그릇에 오 천 삼백 개의 쌀알이 필요하다는( 「쌀 한톨」) 이 무용無用함, ‘숫눈길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걸어가다 돌아서서/ 내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 「나홀로」 )는 처연한 자기 확인에 가닿는 시인의 마음을 어찌 외로움이라는 낱말 하나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시인이 내려앉은 함평은, 손불면 소명동은 시인이 말한 대로 천지 그 전부이며, 시인이 맘껏 읽고 배우는 경전이다.

 

 

꽃뱀이 숨어 울던 그 돌담불

장광에 배부른 그 항아리들

아궁이와 절절 끓던 그 방구들

사랑이 피어오르던 그 굴뚝

녹슨 함석지붕의 그 지시락물

쇠죽 호박죽 시래기 끓이고 엿기름 고던 그 가마솥

통보리쌀 통고추 마늘 갈던 그 돌확

자운영 갈아엎던 쟁기와 그 일소

해와 달, 밥을 지어 나르던 그 지게

담 너머로 오가던 그 정

구수하고 투박한 그 사투리

젖 달라고 보채는 그 아기 울음소리

벙어리가 된 그 학교 종

국민학교 쪽으로 구부러진 그 황토 길

소문의 발원지인 그 샘터

샘을 지키던 그 두레박

사발에 고봉밥 먹던 그 장정들

시를 찾아 천리를 걸어서 왔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사람냄새 나는 그 사람들

푸짐한 그 인심들

기차에 가난을 싣고 떠난 그 사람들

어디 가서 어디 가면

서정시 한 편 만날 수 있으려나?

오늘도 동구 앞 느티나무는

떠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위의 시는 ‘향토유물 전시관에 다녀와서’의 부제가 붙은 시 「그리운 서정시」 의 전문이다. 남아 있는 것보다 떠난 것들이 더 많은 시대에 살면서 그래도 유물의 이름이 아니라 손때 묻은 살림살이로 아직도 몸과 가까이 있는 땅에서, 시인은 뭍 동물과 식물과 체온을 나누며, 외로우면서도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다. 일찍이 도시생활에서 접하지 못했던 늙은 농촌의 삶은 서서히 그의 화법을 변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말 상대가 없는 고적한 일상, 날마다 마주치는 사건이 없는 마을의 무료함 속에서 시인의 귀에 들어오는 모든 소리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소리였을 것이다. 사회화되지 않은 되지 않은 ‘날것’과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그의 화법을 바꾸어 버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생소했던 시의 화법이 어느새 친근하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 글의 서두에서 『적막 한 채』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를 ‘파격’이라고 단정했던 것을 이쯤에서 슬그머니 거두어들이고 싶다. 『적막 한 채』는 시인이 상상력으로, 유려한 필치로 만들어낸 시집이 아니다. 시인이 키우는 개 순돌이, 산지기가 살았던 산 속 외딴 집을 지키는 먹갈나무, 봄 산의 다람쥐부터 심심하게 흘러가는 바람까지 시인에게 다가왔던 순정한 자연이 전해준 말씀의 기록이다. 시인은 그저 그들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 적는 일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파격’이라는 단어 하나로 응집될 수 있을지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물론 『적막 한 채』 에 드러난 오늘날의 농촌 풍경의 현장감과 아직 버려지지 않은 두레 공동체의 미덕을 생생하게 되살린 성과나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꼼꼼이 짚어봐야 할 점은 다른 곳에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돌아온 땅도 아니고, 생업도 마땅치 않은 자신의 일상을 꾸밈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완전히 오욕칠정을 덜어내고 난 후의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욕심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자 하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시인에게 아직도 가 닿아야할 이상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이상향으로 가는 나침반이 시 詩임을 여러 곳에서 토로하고 있음도 눈여겨 보아야할 점이다. 시인은 「그리운 서정시」에서 그가 시를 써야 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차별되지 않은 사랑으로 이 세상의 장벽을 허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시집 도처에서 산견되는 시의 정의는 시 「무값」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우의 값이 아닌 무값

내 시가 그렇다!

어차피 밑천 안 들고 받아쓰기 한 것이니

내 시집은 값이 없다

그래서, 0원 영원이다

 

 

‘받아쓰기’와 ‘0원’, ‘영원’이라는 세 마디의 연결어는 시인이 꿈꾸고 도달하고자 하는 겸허한 시 쓰기의 방법이며 도잘점이다.

 

 

‘적막 한 채’ 는 이제 시인 이사랑, 아니 보편적 인간일반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아직 작명되지 않은 풀꽃으로, 유배지에 서 있는 ‘나’는 어느 시인의 호명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 어느 시인은 다름 아닌 시인이 되기 전의, 시인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본연의 자아이다. 추상적인 사랑의 신기루로 행복을 착각하는데서 야기되는 외로움은 진정한 외로움이 아니라던 시인의 읊조림은 슬프면서도 기쁜 까닭은 호명을 기다리는 그 자세에 있다. 일찍이 노장 老莊이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았던 무위無爲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고 꾸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인 이사랑이 『적막 한 채』에서 보여주는 언뜻 일탈에 가까운 시법의 실상은 ‘있음’(현존재)의 변화에 맞서는 힘이 기다림 - 본질이 현현되는 - 에 있음을 강조하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시집 『적막 한 채』는 완성된 시의 집이 아니라 앞으로 더 허물어져야 할 무위의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은 ‘적막 한 채’ 속에 사람의 숨결, 따스한 온기가 가득차는 일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적막 한 채」를 조용히 마음에 담아본다.

 

 

적막 한 채

 

새벽 한 시에

어둠을 가위로 오려냈더니

거기 적막 한 채 보인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아직 사람이 덜 된 내가

한 사람을 버린 뒤

세상마저 버리고

정처 없이 흘러온

이곳에서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담을 쌓고

산과 들이 보이는 쪽에 울타리가 없는 

유배지에서 나는

 

 

어느 시인의 호명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직 작명하지 않은 그냥, 풀꽃

* 인용된 시

 

풍경 속에 숨다

 

 

 

 

나는 풍경 속으로 도망쳤다

 

 

현재로부터 옛날로

도시로부터 산골로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

자본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로

 

 

누군가 버리고 떠난 하늘로

누군가 버리고 떠난 땅으로

누군가 버리고 떠난 집으로

 

 

그들이 올라간 길을 거슬러 내려와

꿈속으로 고독 속으로 바람 속으로

적막 속으로 고요히

 

 

뿌리 내려,

 

 

비로소

나는 풍경의 배경이 되었다

들꽃

 

 

 

 

들판에,

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제비들 전선에 빼곡히 앉아 있었다

 

누가 수렁논에 꽃농사 지었는지

온통 고마리꽃 여뀌꽃 지천이다

 

세상에나 세상이 이렇게 환하다니

그러나 눈부시진 않았다

 

고마리야 여뀌야

너희들도 꽃이라고…

꽃 한 번 피워보겠다고…

 

세상에 나와 빛을 본 순간

내가 울었던가 울었을 것이다

 

가을 들판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냥 울었다 까닭 없이

 

 

 

자신

 

   

                         

건강이 안 좋은 나는

몸을 신으로 모시고 산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자신을 믿고 사는 나는

스스로 내 몸이 신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라며

하느님이 '까불지 마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은

잡신 축에도 못 끼는 사이비다.

 

 

그리운 서정시

ㅡ향토유물 전시관에 다녀와서

 

꽃뱀이 숨어 울던 그 돌담불

장광에 배부른 그 항아리들

아궁이와 절절 끓던 그 방구들

사랑이 피어오르던 그 굴뚝

녹슨 함석지붕의 그 지시락물

쇠죽 호박죽 시래기 끓이고 엿기름 고던 그 가마솥

통보리쌀 통고추 마늘 갈던 그 돌확

자운영 갈아엎던 쟁기와 그 일소

해와 달, 밥을 지어 나르던 그 지게

담 너머로 오가던 그 정

구수하고 투박한 그 사투리

젖 달라고 보채는 그 아기 울음소리

벙어리가 된 그 학교 종

국민학교 쪽으로 구부러진 그 황토 길

소문의 발원지인 그 샘터

샘을 지키던 그 두레박

사발에 고봉밥 먹던 그 장정들

시를 찾아 천리를 걸어서 왔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사람냄새 나는 그 사람들

푸짐한 그 인심들

기차에 가난을 싣고 떠난 그 사람들

어디 가서 어디 가면

서정시 한 편 만날 수 있으려나?

오늘도 동구 앞 느티나무는

떠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함평장

 

 

 

남도의 봄은,

가장 먼저 함평 오일장으로 온다

  

고무다라에 굴을 담아놓고 조는 할매

마른 대추처럼 쪼글거리는 얼굴에

봄빛이 부시다

 

산과

바다

들판을 옮겨다 놓고

닭장에서는 힘센 놈이

장바닥에서는 큰소리가 이긴다

 

팥죽집 옆에 대장간 옆에 죽물집 

할매국밥집 돌면 섭섭아짐 국화빵집

튀밥집 신발집 옷집 오동슈퍼    

 

 

함평장에는 마트에서 볼 수 없는

에누리와 손저울과 덤이 있어라!  

싸목싸목 댕겨보시게요

웃음도 덤으로 따라온당께라

 

 

꽃 피는 날에 

 

 

 

사랑아, 너를 보면

우리 죽은 미순이가 살아서 돌아온 거 가터야

너는 내 동생이여!

 

오래 집 비워놓고

벚꽃 축제장에 밥 벌러 갔더니

전화가 온다

밤마다 네 방에 불이 꺼져 있어

누구 보라고, 누가 본다고,

꽃밭에 꽃들 심기는 왜, 심었냐?

혼자 보기 아깝게 피고 지는데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 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갓꽃은 우거져 종자가 맺혀 있고 작약 개양귀비

장미꽃 하얀 민들레 석류꽃 감자꽃 고추꽃

마당 가득 꽃들이 피어 있다

 

이제 저 많은 꽃들 나 혼자 보고 있다

언니네 꽃까지 내가 바라봐 주어야 한다

 

심장은 뛰는데 뛰고 있는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복순 언니

글쎄, 동생 삼기는 왜 삼았냐고?

 

 

알곡과 가라지  

 학습 ?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려는 자는 높임을 받을 것이라.'

 

 

가벼운 것들은 위로 올라가고

무거운 것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접시저울이나 시소의 이치다 

 

 

가을 들판을 걷다보면

노릇노릇 바삭바삭 익어가는 벼들

논과 논을 마주보고 맞절을 하고 있다

 

잘 익은 벼들은 수평으로 평등하다

거기,

삐죽삐죽 고개 쳐들고 있는 가라지

깨금발 딛고 서서 알곡과 공존한다

화투로 치자면 피다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한 밭에 두었다는데

왜 그랬을까?

 

 

적막 한 채

 

 

새벽 한 시에

어둠을 가위로 오려냈더니

거기 적막 한 채 보인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아직 사람이 덜 된 내가

한 사람을 버린 뒤

세상마저 버리고

정처 없이 흘러온

이곳에서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담을 쌓고

산과 들이 보이는 쪽에 울타리가 없는 

유배지에서 나는

어느 시인의 호명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직 작명하지 않은 그냥, 풀꽃

 

 

 

 

보호수, 느티나무

 

 

 

 

 

 

어르신들 만나면 두 손 곱게 잡고

 

고개 숙여 인사하라고 가르친 어머니

 

 

 

 

 

 

 

길을 가다 어디서든 어르신들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나는

 

오래된 고목 앞에서도

 

잊지 않고 정중히 인사를 한다

 

 

 

 

 

 

내장산 단풍 구경 갔을 때의 일이다

 

수령이 몇 백 년인지 기억은 없지만

 

보호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앞에 다가가 어르신 안녕하세요?

 

내 말 알아듣고 끄덕끄덕 하시기에

 

그 분에게 장수비결을 물었더니,

 

계곡 물소리로 귀를 씻고 바람 소리

 

새 소리 벌레 소리만 들었다 한다

먹고 사는 일

 

 

이른 아침

산밭에 다녀온 어머니 말씀

 

어젯밤 멧돼지가 와서

고구마 죄다 파먹었다

 

어머니가 이랑마다 뿌린 땀

서리서리 된서리 맞았다

 

냅둬라! 배고픈 것들

나눠 줄 게 그것 밖에 더 있냐?

 

죄다 배고픈 죄다

먹고 사는 일이 죄다, 죄다

탱자나무 울타리

 

 

 

동서남북 사방팔방이 터진 집

울타리 없는 집은 옷 벗은 집 같다

 

 

할머니 혼자 사는 그 집

엊그제 아들이 내려와

반 쯤 쓰러진 헛간을 밀어버리고

남천을 뺑 둘러 심었다

 

 

그 울타리는

외로움을 막아 줄 것이다

태풍과 삭풍을 막아 줄 것이다

짐승이 드나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은 탱자나무 울타리였다

아들을 울타리 삼았던 어머니

캐낼 수도 없고 손도 댈 수 없는

가시나무 울타리

 

 

지나가던 구름도  피 흘리고 가는 집

늘 가시에 찔리고 아팠을 어머니 

 

쌀 한 톨

 

 

긴긴 밤 잠도 안 오고

시도 안 써지고

수행이나 해볼 요량으로

한 톨 한 톨 쌀을 세었다

오천삼백 개

어림잡아 이 정도면

밥 한 그릇은 되겠다

쌀을 물에 담가놓고 잤다

아침에 밥을 지었더니

넉넉히 한 그릇이다

별짓을 다 한다 싶다가도

한 톨 한 톨의 쌀이 모여

밥 한 그릇이 된다는 것을

낱알을 세어봄으로 깨달았다   

수백억 별 중 하나가

푸른 별 지구라는데

수십억 인구 중

한 사람은 누구인가?

애착

 

 

 

할머니와 사는 어린 성우

강아지를 안고 잔다

한 이불 속에 둘이 잔다

 

 

우리 집 개는

사람으로 치면 노인인데

요즘 목줄 풀어놨더니

나를 평생 묶어놨으니

너도 출입을 말라는 뜻인가

내 신발을 물어다 감추고

땅을 파서 묻어두기도 하고

잘 때는 신발을 안고 잔다

나 홀로

 

 

숫눈길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걸어가다 돌아서서

내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지워진 길을 새로 만들며

앞으로 걸어간 발자국과

앞에서 걸어온 발자국이

한 길로 이어져 있다

 

 

숫눈길에서

나는 나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