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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보령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11. 9. 13:59

3000그루의 은행나무가 곳곳에 심어진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장밭마을 일대는 지금 노란색이 ‘바탕화면’이다. 마을의 은행나무들은 주민들이 은행 열매 수확을 위해 심어 거두는 것들이다. 마을 안쪽 고택을 담장처럼 둘러친 은행나무의 노란 바탕에 잘 익은 감이 붉은빛으로 점을 찍었다. 감나무보다 은행나무가 더 흔한 담장 안은 장밭마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충남 보령시.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20년 전쯤 보령과 합쳐진 ‘대천’이란 지명으로 더 익숙한 곳입니다. 보령 혹은 대천이란 지명에서는 느릿느릿 곡선 구간을 달리던 장항선 열차와 그 열차가 가닿던 바다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보령에는 바다 말고도 빼어난 가을 명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은행나무로 마을 전체가 숲이 돼버린 곳이 있고, 일찌감치 날아온 철새들이 수면을 딛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습지가 있으며, 핏빛 단풍이 뜨겁게 달궈진 계곡도, 억새가 물결치고 있는 산정도 있습니다. 허물어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텅 비어버린 옛 절터의 쓸쓸한 정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는 이즈음은 단풍 명소마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행락객들로 북적입니다. 가을의 명소로 이름 좀 났다는 곳의 길 양편은 여지없이 행락 차량의 트로트 가락과 먹거리 좌판의 기름 냄새가 나눠 점령하고 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행락객들 틈에 섞이는 것도 마뜩잖지만, 이런 곳들로 떠난 가을 여행은 도무지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저무는 계절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건 호젓함인 듯합니다. 낙엽 깔린 인적 드문 숲길이나 철새 날아오르는 습지의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있으니 그렇습니다. 사실 가을은 계절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인 셈입니다. 주위 풍경이 가을색으로 물들면 도심 공원의 오솔길에서도 훌륭한 풍경을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보령으로 떠나는 여정도 사실 가닿는 목적지는 ‘가을’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곳들에서는 가을이 데려온 것을 만날 수 있고, 가을이 지나가는 걸 색깔로 알 수 있습니다. 가을이 데려온 노란 은행나무와 붉은 단풍, 흰 솜털의 억새와 차가운 물빛이 거기 있습니다. 누구든 그곳에 데려가고 싶어서 가을비 속에서 담아온 풍경이지만, 풍경과 생각이 어우러지는 호젓한 여행을 꿈꾸고 있다면 꼭 이곳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듯합니다. 지금 우리 땅 곳곳에 스며든 가을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가을비가 촉촉히 내린 날의 충남 보령시 성주산 휴양림 야영장.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떨어지면서 가장 화려한 가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여기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낸다면 몸과 마음이 다 가을로 물들 것 같다.




# 노란빛으로 환하다…청라 은행마을

‘청라 은행마을’.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의 장밭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청라면사무소부터 청라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와 파출소, 농협, 우체국까지 다 거느린 라원리의 원모루마을을 제치고, 감히 손바닥만 한 장밭마을이 ‘청라’란 이름을 가져가게 된 건 오로지 은행나무 때문이다. 마을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만 3000그루를 헤아린다. 이곳의 은행나무는 가로수로 세워둔 은행나무처럼 경관이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열매의 소출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심어 기른 것들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한그루 한그루마다 임자가 다 있다.

본래 장밭마을은 이름대로 긴밭(長田)이 있던 마을이었다. 은행 수확이 ‘제법 돈 되는 일’이었던 시절 주민들은 밭 이곳저곳에다 은행나무를 심었다. 잘 자란 은행나무의 밑동 옆에 올라온 여린 가지를 꺾어다가 밭둑 옆에, 마당 안에다 심었다. 느럭번덕지, 당살미, 문안고랑, 윗장밭…. 이런 정겨운 지명의 밭둑에서 은행나무가 자랐다. 그러다 물길을 막은 명대저수지가 들어서 천변의 밭이 모두 논으로 개간되면서 밭을 지키던 은행나무들이 너른 논두렁이나 마을에 서게 됐고, 지금의 은행나무 마을의 풍경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꺼번에 조밀하게 심은 것이 아니라 형편대로 가지를 꺾어다가 꺾꽂이로 이곳저곳에 심어 길렀으니 이곳의 은행나무는 숫자에 비해 압도적인 경관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넓은 들판과 마을 이곳저곳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은행나무의 풍경이 오히려 더 푸근하고 정감 있다.

장밭마을 은행나무의 중심이라면 단연 신경섭 전통가옥이다. 고택의 돌담을 끼고 집을 둘러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온통 노란빛으로 환한 곳이다. 집 한 채가 담 밖과 담 안쪽에 거느리고 있는 은행나무의 숫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고택의 안채는 문을 닫아 걸었지만, 아예 대문이 없어 너른 마당까지는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떨어진 은행잎으로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마당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탄성을 지른다. 마당을 향해 놓인 고택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잘 익은 가을볕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일찌감치 날아든 겨울 철새 청둥오리 떼들이 청천저수지의 수면을 딛고 날아오르고 있다. 이제 가을의 끝도 머지않았다.


# 일찍 날아온 청둥오리떼를 만나다

청라마을에서 나와 청라초등학교 앞의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면 청천저수지가 있다. 청라면 서쪽에 있는, 대천 일대와 남포면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큰 저수지다. 황룡천을 흘러내린 물이 여기 담겼다가 보령 시내를 관통해 바다로 간다. 청천저수지의 습지에는 지금 일찌감치 날아든 겨울 철새인 청둥오리들이 모여 수런거리고 있다. 오리들이 버드나무와 삭은 물풀 사이에서 물을 박차고 올라 가을의 대기 속을 날아가는 모습에서 이제 가을의 끝도 머지않았음이 느껴진다.

가을로 가득한 저수지의 물가에 다가서니 인기척에 놀란 청둥오리들이 수변 단풍을 그림자처럼 드리운 물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푸드덕 날아갔다. 겨울의 초입에 당도한 것 같은 이런 풍경을 보려면 저수지를 감고 도는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는 게 좋겠다. 저수지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물가의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화암서원을 지난다.

흐르고 고이는 물의 모습에서도 학문하는 자세를 되돌아봤다던가. 서원의 자리에서 옛 선비의 정신을 본다. 화암서원은 400여 년 전에 세워졌는데,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등 이곳 출신 다섯 선비를 봉안하고 있다. 본래 서원은 수몰지역의 물가에 있었는데, 청천저수지가 축조되면서 1959년 지금의 자리로 물러앉았다.

화암서원을 지나서 길은 줄곧 저수지를 끼고 보령 아산병원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선 36번 국도로 올라서면 의평리와 향천리 쪽에서 저수지 수변 습지를 만난다. 초록의 기운이 남은 버드나무와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숲이 가득한 습지에는 나무 덱 산책로와 벤치가 설치돼 있었다. 삭은 줄풀 사이로 무리를 이룬 오리떼들이 수면 위를 유유하게 오갔다.

마침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었는데 저수지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수변의 풍경이 선명한 채도의 그림처럼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무르익은 가을날의 목적지로도 손색이 없지만, 가을 청둥오리떼들이 더 날아드는 초겨울 무렵이라면 지금보다 더 근사한 그림을 보여줄 것 같았다.

#‘핏빛단풍’성주산, ‘억새파도’오서산

보령에서 성주터널을 지날 때 왜 일본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 문득 떠올랐던 것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그건 아마 터널의 이쪽과 저쪽에서 절정의 가을이 보여주는 경관이 너무 달라서였을 것이었다. 성주터널 이쪽의 무게중심은 단연 바다다. 대천해변과 무창포의 부드러운 해안선을 가진 수평의 바다가 이쪽에 있다. 마침 찬비가 내린 날이어서 가을 바다는 무채색이었다. 그러나 터널 너머의 성주 땅은 촉촉한 비로 더 선명해진 붉은 단풍의 세상이었다. 성주터널을 넘어서 찾아간 성주산 휴양림의 단풍은 마치 풀무를 불어넣은 아궁이 속의 숯불처럼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올해 이쪽의 단풍색은 유난히 더 붉었다. 가을비 때문에, 무채색의 바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성주산 단풍의 뜨거움은 아는 이들만 안다. 그걸 아는 이들이 해마다 ‘성주산 단풍축제’를 연다. 말이 축제지 딱 하루 동안 지역 주민들끼리 즐기는 ‘동네 행사’에 가깝다. 한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주산의 이름을 축제에 걸어놓고는 정작 성주산과 마주 보는 옥마산 아래 청소년수련관에서 축제를 연다는 것이다. 그러니 축제장에는 성주산 단풍은 없다. 진짜 성주산 단풍은 성주산의 화장골 깊숙이 자리 잡은 휴양림에 있다.

성주산의 이름은 ‘성인(聖)이 사는(住) 산’이란 뜻이다. 그 이름대로 성주산 아래는 모란꽃 형상을 한 여덟 곳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휴양림이 들어선 화장골도 그중 한 곳이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단풍만큼은 화장골이 명당 중의 명당이다. 사실 단풍나무의 크기나 수효로만 본다면 화장골은 내장산이며 선운사 같은 이름난 단풍 명소에다 대면 부끄러울 정도다. 하지만 당단풍나무의 붉은 색감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게다가 성주산 휴양림은 단풍이 절정일 때도 좀처럼 붐비는 법이 없다. 북적이는 인파와 빠른 트로트 가락 대신 성주산 화장골에는 차분하고 고요하게 가을의 빛을 즐기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찾아든다.

성주산 북쪽의 오서산도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산이다. 높이로 보면 서해 연안의 산 중에서 가장 높다. 오서산이 보여주는 가을은 억새다. 가을이면 9분 능선 윗부분의 억새가 물결처럼 일렁인다.

올해 잦은 비로 억새가 일찍 지고 있어 예년만큼은 못하지만 정상 못미처 오서정 부근의 억새는 여전히 장관이다. 게다가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대천 앞바다와 천수만 일대의 풍경이 억새의 배경이 된다.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지만 차로 홍성 쪽의 상담주차장을 지나 이어지는 외길 임도를 따라가다 차단기가 있는 지점에 차를 세우면 1시간 안쪽에 오서정의 억새군락에 당도할 수 있다.

# 성주사지를 가을에 가야 하는 까닭

성주산휴양림 인근에는 성주사지가 있다. 사지라 함은 절터라는 뜻이니 성주사지는 ‘성주사가 있던 터’를 이른다. 몇 기의 탑과 석등을 빼고는 터만 남은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창건된 오합사가 그 뿌리다. 오합사는 백제가 치열한 삼국의 전쟁 중 전사한 병사의 원혼이 불계에 오르기를 기원하면서 지은 호국사찰이었다. 그러니 백제 멸망과 함께 오합사가 폐허가 된 건 당연하겠다. 그러다가 통일신라로 넘어오면서 성주사란 현판을 달고 ‘선종’의 중심사찰이 됐다. 성주사는 선종을 대표하는 큰 절 아홉 곳, 이른바 ‘구산선문’ 중의 하나였다.

선종이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고 선행을 쌓으면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꺼낼 수 있다고 믿었던 불교의 종파다. 선종이 불교의 믿음과 깨달음을 낮은 자리까지 가지고 내려왔던 셈이다. 실제로 구산선문을 일으킨 신라의 무염대사는 20년 동안 중국에서 머물며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돌봤다. 중국인들이 그런 그를 ‘동방에서 온 큰 보살’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무염대사가 남긴 오도송의 한 구절. ‘큰 배를 이미 버렸거늘 어찌 작은 배에 매어 있으리오.’ 덩그러니 비어 있는 절터에서 그 글을 짚어 읽으며 무엇을 더 버려야 할지를 생각해본다.

폐사지는 가을날에 가장 빛난다. 계절이 저무는 가을 무렵에 스러져버린 것들의 정취와 덧없음이 더 농밀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을이 절정을 치닫는 이즈음 성주사지의 빈 절터를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지금 성주사지는 중앙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해체 보수 작업의 가림막으로 닫혀 있다. 석탑 뒤편의 금당지도 발굴작업으로 파헤쳐져 있다. 보수와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지만 고쳐 세우는 사이사이에 시간을 끼워 넣고 있는지 보수와 발굴작업이 멈춰 있다.

성주사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석불입상이었다. 마모된 석불의 얼굴을 누군가 서툰 솜씨로 시멘트로 때워 넣었는데, 시멘트로 이겨 바른 얼굴에 그려 넣은 표정이 찡그린 것도 같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가림막 안쪽의 석불을 보니 시멘트의 흔적이 말끔히 벗겨졌다. 훼손됐던 것을 본래의 마모된 모습으로 돌려놓은 것이지만 어쩐지 서운하기도 하다. 인적 없이 텅 비워진 절터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던 하굣길의 두 아이가 문득 서서 석탑을 올려다봤다. 아이들이 지나가고 난 뒤 성주사지에는 또다시 푸른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1400여 년의 시간 위로 이렇게 가을날의 또 하루가 저물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가을 단풍이 화려하게 불붙는 성주산자연휴양림(041-934-7133)이 이즈음 최고의 숙소다. 가족과 함께라면 바다 쪽에 숙소를 잡는 것도 좋겠다. 대천해수욕장의 한화리조트 대천파로스나 무창포의 비체펠리체를 추천한다. 호젓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학성리의 맨삽지 바로 앞에 있는 펜션 해나루(041-641-0181)가 제격이다. 이름은 펜션이지만, 가정집을 개조한 곳으로 소박한 민박집에 더 가까운데 인적 없는 맨삽지의 바다를 통째로 느낄 수 있다. 보령시 천북면의 어촌체험마을인 ‘방자마을’에서는 식재료에 소금만 뿌려 구워 먹는 ‘방자구이’ 맛체험을 할 수 있다. 방자구이란 이름은 관에서 양반의 시중을 들던 하인 방자가 간편하게 즉석에서 해먹던 음식을 말한다. 황토 땅에서 재배한 고구마, 땅콩, 옥수수, 콩 등 친환경 농산물과 바다에서 채취한 싱싱한 굴, 조개 등 수산물이 어우러진 구이 음식을 통해 전통의 맛을 체험할 수 있다. 1만5000원. 갯벌체험과 방파제 낚시, 강정·두부·파전 만들기, 김치 담그기, 고구마조청 만들기 등의 체험도 있다. 대천항의 수산시장에서는 제철을 맞은 꽃게나 대하를 비롯해 활어횟감을 파는 점포가 100여 곳 된다. 해산물을 사다가 2층의 횟집에서 조리비만 내고 맛을 볼 수 있다.


보령·홍성=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4년 11월 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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