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1533년 작품 ‘대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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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세계적인 관광지인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이 도시의 중심에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이 두칼레 궁전과 연결된 성당 남쪽의 한 구석. 지구 곳곳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무심코 스쳐가는 그곳엔 단단한 자주색 반암(斑岩)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하나 있다. 중세기 ‘기사’들같이 보이는 총 네 명의 남자들. 두 명의 기사들끼리 서로 안아주는 모습이 얼핏 보면 대한민국 회식자리에서 자주 보던 모습 같기도 하다. 술에 취한 김 부장이 더 취한 이 차장을 안아주며 “앞으로 문제 있으며 편하게 나한테 다 말해” 라고 위로해주는, 뭐 그런 모습 말이다. 물론 삶과 돈에 찌든 우리나라 직장인 동상이 이탈리아에 있을 리 없다. 이 네 명의 ‘기사’들은 중세기 기사도 아니다. 단 한 명의 황제만으론 도저히 통치 불가능해진 후기 로마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4등분으로 나눠 관리하는 ‘사두 정치 체제(Tetrachia)’를 도입한다. 2명의 시니어 황제들과 2명의 주니어 황제들이 힘을 모아 쓰러져가는 제국을 다시 세우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최첨단 무기도, 용감한 군인도 아닌, 변하지 않는 황제들 간의 우정이야말로 제국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킬러 어플리케이션(앱)이란 말을 이 동상은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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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힘과 사랑의 힘은 다르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은 얘기다. 인생에 결국 남는 건 사랑·건강·친구, 뭐 대충 그 정도라고. 대개 사업에 실패하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고 나면 듣는 얘기이기도 하다. 건강과 사랑은 이해된다. 몸과 마음이 아프면 그 어느 것도 의미 없을 테니 말이다. 사랑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부모의 사랑 아래 자라, 이성과 사랑을 나누고,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을 사랑으로 돌보고….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DNA, 즉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며 기계의 목적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란 주장)를 믿지 않더라도, 매정하기 짝이 없는 우주가 인간에게 허락한 ‘의미’가 대충 그 정도란 건 우리 모두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정’은 다르다. 친구가 도대체 뭐 길래 건강과 사랑만큼이나 중요하단 말일까? 인간은 왜 친구가 필요한 것일까?
독일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의 명작 ‘대사들’을 기억해 보자. 1533년 특사로 영국에 파견된 두 프랑스 젊은이들. 사업가이자 외교관인 드 딘테빌(그림 왼쪽), 그리고 성직자인 드 셀브(오른쪽). 1533년은 참 복잡하고 어려운 해였다. 스페인 공주 출신인 첫 부인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볼린(Anne Boleyn)과 재혼한 영국의 헨리 8세. 버려진 공주를 지지하는 16세기 수퍼파워 스페인, 그리고 천주교 수퍼갑(甲) 국가인 스페인을 지지하는 교황. 얽히고설킨 외교문제를 풀기 위해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1세는 이 두 대사들을 파견한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최첨단 과학 도구들·악보·지구본·페르시아 카펫, 그리고 특정 위치에서만 보이도록 그려진 해골바가지. 화가 홀바인은 좀처럼 정답이 보이지 않는 영국 왕실의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대사들의 지성·글로벌 마인드·믿음, 그리고 죽음을 인식한 겸손함, 즉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가 죽는 것을 기억하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느낀다. 두 대사의 진정한 능력은 과학도, 믿음도, 겸손함도 아닌 서로간의 우정과 친밀함에서 온다는 사실을. 혼자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혼란과 불가능도 친구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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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세계 원숭이, 신(新)세계 원숭이,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호모 사피엔스. 영장류 중 하나인 인간은 사회적 집단에서 생활한다. 뾰족한 이빨도, 두꺼운 피부도, 날개도 없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기에, 영장류는 혼자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로빈 던바(Robin Dunbar) 교수는 영장류 집단의 크기는 대뇌 피질의 크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제시한 바 있다. 뇌가 작은 명주 원숭이(Marmoset)는 10마리 안팎의 무리와 함께 살지만, 대뇌 피질이 큰 침팬지들은 100마리에 가까운 구성원들과 함께 복잡한 사회구조를 유지한다.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침팬지 집단을 기억해 보자!
그렇다면 인간은? 영장류들에서 얻은 데이터를 인간의 뇌 사이즈에 적용하면 우리의 생물학적 집단 구성원 수는 150명 정도일 거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원래 인간은 그 정도 수의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게 적절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장류 집단의 크기는 왜 정해져 있는 걸까?
영어에 ‘Good old days’란 말이 있듯, 인간은 과거에 대한 막연한 향수에 빠지곤 한다. 예전엔 모든 게 다 좋았다고. 인정도 많고, 지금보다 여유로웠다고.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인류의 과거는 대부분 현대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빈곤하며 미개했다. 빵 훔친 자의 손을 자르고, 귀족을 쳐다본 죄로 고문당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30대 중반에 죽고, 사지가 잘릴 사형수를 구경 나가기 위해 엄마는 아이와 함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왕은 귀족을, 귀족은 평민을, 어른은 아이를, 남자는 여자를, 인간은 동물을 아무 이유 없이 차별하고 폭행하며 죽일 수 있던 시절이 바로 ‘good old days’다.
아프리카의 보코 하람(Boko Haram)이나 이라크의 ISIS(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 국가) 테러단들의 만행이 과거 인류의 보편적 행동이라고 상상하면 될 듯하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폭력성은 일재의 잔재도, 자본주의의 결과도, 빨갱이 때문도 아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청동기 시대. 절대 권력층 1%를 제외한 대부분의 구성원들에겐 그다지 즐겁거나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다. 1%와 99% 간의 불평등은 물론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법과 문명과 과학과 항생제와 마취약을 가진 불평등한 사회에 살 뿐이다.
위험하고 잔인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바로 ‘인지적 회계’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기억해야만 집단에서의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내 위치를 제대로 파악해야만 나보다 강한 놈한테 복종하고, 나보다 약한 놈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문명과 과학이란 얇은 페인트를 긁어보면 보이는 영장류 집단의 본질은 갑과 을의 관계, 고로 계급 제도란 말이다. 뇌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구성원들 간의 과거 관계를 기억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대략 150명 사이의 관계를 기억하고 회계할 수 있을 거라는 게 ‘던바 수(數)’의 핵심이다. ‘회계’를 하기 위해선 ‘통화(通貨)’가 필요하다. 책상과 빵을 교환하고, 다시 당나귀와 바꿔볼 수 있다. 하지만 물물교환은 불편하고 비(非)효율적이기에 쉽게 환전 가능한 공통 통화가 필요하다.
원숭이가 서로 이 잡아 주는 건 ‘회계’
그렇다면 영장류들 간의 상호관계 회계를 가능하게 하는 통화는 무엇일까? 바로 서로 간의 ‘이 잡아주기’다. 자고 먹고 사냥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을 서로의 이 잡아주기로 하루를 보내는 원숭이들. 이미 다 잡아 더 이상 있지도 않은 이를 잡아주는 영장류들은 사실 서로 잡아주는 가상의 이 숫자를 통해 인지적 회계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지적 회계 단위는 무엇일까? 서로 바라보고 고개만 끄덕여 준다면 아무 실질적 정보 교환 없이도 카페에서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현대인. “나 오늘 회사에서 잘렸어”란 페이스북 메시지에 ‘좋아요’ 버튼 눌러주는 ‘친구들’. 회식 자리에서 어깨동무하고 술잔을 돌린다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두렵지 않은 김 부장과 이 차장. 인간에게 소통은 대부분 공감이고, 나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친구들이란 말이다.
인간은 왜 공감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다. 위험과 불확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은 끝없이 예측해야 한다. 내 행동이 적절한 건지? 갑에게 나는 을(乙)질을 잘 하고 있는 걸까? 내 아래 을에게 갑(甲)질은 잘 하고 있는 거지? 1시간 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일은? 다음 주엔? 내년엔?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에 인간은 확신을 요구한다. 확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내게 확신을 줄 수 있는 ‘나’는 단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나’를 만들어본다면? 나와 공감하는 내 친구들은 어쩌면 내 ‘아바타’들일 수도 있겠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친구는 또 하나의 나’라고. 먼 옛날 아늑하고 작은 동부 아프리카의 숲을 등지고 지구를 정복하기 시작한 인간. 이 새롭고 넓은 세상에서 발견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함과 무의미로부터 우리는 어쩌면 ‘친구’란 또 하나의 나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30대가 되면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 그리고 40대가 되면 친구도 역시 사랑과 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F. 스콧 피츠제럴드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