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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파괴하는 두뇌의 상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 4. 23:16

트라우마가 두려운 건 악몽을 영원히 반복하기 때문

<36> 삶 파괴하는 두뇌의 상처

김대식 KAIST 교수·뇌 과학자 daeshik@kaist.ac.kr | 제408호 | 20150104 입력
네덜란드의 화가 코르넬리스 반 하를렘(Cornelis van Haarlem, 1590년)의 작품 ‘죄 없는 아이들의 학살’. 아이들의 죽음은 ‘먼저 태어난 자가 먼저 죽는다’는 만물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전쟁·학살·가난·쓰나미·세월호…. 아무도 우리에게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어본 적 없다.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우연히 지구, 대한민국, 지금 이 시간, 이곳에 있을 뿐이다.

선택도, 동의도 없이 태어난 이곳엔 하지만 이미 사회·정부·역사, 그리고 부모의 능력이란 ‘게임의 법칙’들이 정해져 있었다. 누구는 우연히 직원에게 폭언을 하는 등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태어났다. 누구는 우연히 어떤 수모라도 참아내야 한다.

죽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의도, 허락도 없이 어느 날 다시 우연히 소멸되는 것이 인간이니 말이다. 물론 우주는 무한으로 크고, 인간은 끝없이 작다. 인간 없이도 우주는 수백억 년 동안 존재했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우주는 잘만 굴러갈 것이다. 우연한 탄생과 우연한 죽음이란 두 ‘고리’ 사이에 매달린 실 하나뿐인 인생.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전통과 규칙과 종교를 통해 존재의 필연성을 매번 재확인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유대인 수용소 경험 뒤 자살한 레비
“평화로울 때는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만, 전쟁 때는 아버지가 아들의 장례를 치른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의 말이다. 아무리 죽음 그 자체가 무의미한 우연의 결과라지만, 죽음의 순서만큼은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먼저 태어난 자가 먼저 죽는다. 그것이 만물의 법칙이며 사회의 계약이다.

2014년 세월호. 수많은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이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딸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다. 우주와 사회로부터 받았던 ‘약속’의 배신.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퀴블러-로스(Elisabeth Kuebler-Ross)는 자신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눴다.

먼저 부정과 분노로 시작해 타협, 이어서 우울을 통해 마지막으로 그 트라우마(trauma)적인 사실을 수용하게 된다는 가설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란 과연 무엇인가?

유대인 수용소를 경험한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87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십 년 동안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과 기억에 시달린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던 그는 살기 위해 바동거렸지만 전쟁이 끝나고 최고의 소설가가 된 레비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2001년 ‘9·11’ 테러를 경험한 사람들 역시 여전히 기억상실·악몽·우울증에 시달린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세계무역센터)에서 일하던 자식·부모·남편·아내를 잃은 많은 사람은 퀴블러-로스의 ‘수용’과는 여전히 먼, 슬픔과 후회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 학살·전쟁·테러·고문·성폭행·자식의 죽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의 경험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보통 지독할 정도로 선형적(線形的)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한 뇌는 다르다. 과거·현재·미래 모두 송두리째 단 한 번의 순간으로부터 영원한 지배를 받게 되니 말이다. 아이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그 순간. 내 눈으로 내 팔다리가 잘리는 모습을 목격한 그 순간.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떨던 그 순간…. 영원히 반복되는 그 순간이 미래·현재·과거를 하나로 묶어버리기에 삶도, 시간도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망가진 테이프가 끝없이 반복된 음악을 틀어주듯 트라우마를 경험한 뇌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그 한 순간을 영원히 반복해 재생할 뿐이다.

트라우마는 시간으로는 해결 못해
세상은 끝없이 많고 복잡한 정보들의 합(合)집합이다. 이 많은 정보를 인간의 1.5㎏짜리 작은 뇌가 실시간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렇다면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가 왜곡되고 압축돼야 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순간’이란 경험을 압축하고 왜곡하는 과정은 해마란 뇌 영역을 통해 이뤄진다고 많은 전문가가 믿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순간은 우선 ‘기억할 가치가 있는’ 정보와 ‘기억할 필요가 없는’ 정보로 나눠진다. 이때 나눔의 기준은 무엇일까? 많은 기준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예측 코드(predictive coding)’를 통해 분류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예측코드란 무엇인가? 뇌(특히 대뇌 피질)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미래 예측이다. 과거 경험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으면 당연히 새로 들어오는 정보를 더 쉽고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다. 내가 가는 곳이 농구장인지, 아니면 축구장인지 모르고 가는 것보다 알고 가면 그만큼 더 빨리, 더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계단을 내려갈 때 뇌는 이미 계단의 높이를 예측해 다리 관절들을 제어한다. 가끔 다른 계단보다 더 높거나 더 낮은 계단을 밟을 때 헛디디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뇌는 앞으로 보일 것, 들릴 것, 느껴질 것, 경험하게 될 것 등을 예측한다.

끝없는 예측을 통해 뇌는 내가 예측한 세상과 내가 경험하는 현실의 차이를 계산한다. 예측과 현실에 차이가 없다면 그 정보는 무의미하다. “난 인간이다” “좋은 것은 좋다” “단것은 맛있다”. 이들은 모두 충분히 예측 가능한 무의미한 정보이기에 특별히 기억할 필요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트라우마야말로 일상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기대하기 가장 어렵고, 예측할 수 없는, 그렇기에 가장 강한 기억을 남기는 경험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침에 인사하고 나간 아이가 죽을 것이란 예측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전쟁 전에 멀쩡히 중산층 화학자로 살던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레 같은 삶을 살 것을 예상했을 리 없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 요원 역시 자신의 팔·다리가 잘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뇌의 예측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 만약 그것이 트라우마의 정체라면 트라우마는 그 어느 경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예측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에 뇌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와 기억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너무 밝은 빛에 노출된 카메라론 더 이상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는 것같이 트라우마는 뇌에 다양한 손상을 끼친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해마(hippocampus),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amygdala), 그리고 판단력을 좌우하는 전두엽(prefrontal cortex). 다양한 뇌 영역의 조직적·기능적 구조 그 자체가 변하기에 트라우마는 단순히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선 슬픔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슬프고, 우울하고, 분노하고.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창피할 일도, 숨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뇌의 예측과 현실이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복된 절차, 일상적인 일과,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들. 트라우마, 즉 세상과 뇌의 기대치 간의 극도화된 불일치 때문에 감정적·인지적으로 ‘얼어버린’ 뇌를 다시 녹이고 다시 세상과 교류하도록 치유해야 한다. 반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급격한 감정의 폭, 단순한 답이 불가능한 끝없는 질문들. 이 모두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메듀즈호의 뗏목’,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 Gericault)의 1818~1819년 작품.
대한민국의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종교와 정부의 분리. 권력과 돈의 분리. 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사회 전체에 중요한 것과의 분리. 그리고 피해자와 심판하는 자와의 분리. 이처럼 문명의 역사는 어쩌면 분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픔과 상처를 이제 그만 잊으란 말도 결단코 아니다. 피해자의 아픔과 상처를 잘 기억하지만 같은 상처를 또다시 받지 않기 위해선 어쩌면 감정보다는 이성, 분노보다는 차분함,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2014년 대한민국 국민은 세월호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했다. 왜 그런 걸까? 막연한 두려움·걱정·무기력·우울증·외로움. 노이로제의 기본 증상들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살률과 노인 빈곤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단연 1등. 출산율과 행복지수에선 OECD 꼴등.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볼 시간도, 여유도 없는 우리들. 마치 세월호 안에 갇힌 아이들 같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니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냥 열심히 학습지 외우라” 하니 열심히 외웠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안다. 세월호는 침몰했고, 평생 투정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대기업 다녀봐야 돌아오는 건 ‘땅콩 회항’ 사건 같은 일에 휘말릴 수 있다는 걸.

굶주림·목마름·폭행·식인(食人). 1816년 서부 아프리카를 향하던 프랑스 군함 ‘메듀즈’호는 경험 없는 선장의 실수로 침몰하고 만다. 허술한 뗏목에 올라탄 147명의 생존자 중 13일간의 지옥 같은 시간을 살아남은 사람은 단 15명. 메듀즈 호의 운명을 알게 된 프랑스인들은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독재, 그리고 부르봉(Bourbon) 왕가의 귀환.” 어쩌면 프랑스의 역사와 메듀즈 호의 운명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대한민국에서 역시 어느새 ‘대한민국’과 ‘세월호’는 동의어가 돼 버렸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미래도 침몰하는 듯했고, 세월호 가족들의 트라우마는 대한민국 온 국민의 트라우마가 돼 버렸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