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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과 삼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8. 3. 20:12

도은과 삼봉, 정치는 나눌 수 없었지만 茶 나누던 ‘절친’

<11> 도은 이숭인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제386호 | 20140803 입력
 17세기에 그려진 이경윤의 월하탄금도.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며 즐기는 문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탈속을 누리는 문인들의 곁에는 언제나 차가 함께 있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본]
도은(陶隱) 이숭인(1349~1392)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숙옹부승(肅雍府丞)에 임명됐다. 24세 때에는 명나라 과거에 응시, 장원으로 뽑혔지만 25세가 되지 않아 명나라에 가지 못했다. 그는 이색(1328~1396)의 문하에서 삼봉 정도전(1342~1398)과 동문수학했다. 하지만 둘은 정치적인 노선이 달라 결별했다. 이숭인은 결국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게 장살(杖殺·때려 죽임)되는 비극을 맞았다.

도은은 난세를 살면서도 의리와 명분을 지켰던 인물로 차를 사랑했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다시(茶詩)에는 차를 즐기며 누렸던 은근한 멋이 잘 배어 있다. 또 함께 차를 마셨던 지인(知人)들과의 우정도 살갑게 드러나있다. 고아(高雅)한 문체로 그려낸 그의 다시(茶詩)에는 차향이 가득한 다정(茶情)과 차를 마시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시는 그림과 같다(詩如畵)’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숭인과 정도전은 서로 차를 나누던 벗이었다. 도은이 정도전에게 차를 보낸 사실은 ‘차일봉병안화사천일병정삼봉(茶一封幷安和寺泉一甁呈三峯)’에서 확인된다.

숭산 바위틈을 굽이 흐르는 작은 샘은(崧山巖罅細泉縈)
솔뿌리 얽힌 곳에서 솟아난 것이라오(知自松根結處生)
오사모 쓰고 독서하는 대낮, 지루해질 때(紗帽籠頭晝永)
돌솥에 찻물 끓는 소리, 듣기 좋겠지(好從石銚聽風聲) 『도은선생시집』 권3

숭산은 개성의 송악산이다.이곳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은 솔뿌리 밑에서 솟는 물이다.차를 달이기에는 일품인 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자신의 절친 정도전에게 차 한 봉지와 안화사 맑은 샘물을 보낸 것이다.이는 지인에게나 가능한 마음씀씀이다.더구나 “독서하는 대낮, 지루해질 때” “돌솥에 찻물 끓는 소리”만 들어도 한낮의 나른함이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아끼는 정도전에게 보내고자 한 것이다.

도은 이숭인의 초상화.
교분 이어졌다면 역사 달라졌을 수도
이처럼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이들의 인연은 서로 돈독한 우정으로 발전되었지만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인가. 후일 이들의 우정이 악연이 될 줄을 누구인들 짐작했을까. 이숭인의 “아침엔 친한 벗이었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었다(시 ‘오호도·嗚呼島’)”는 말은 아마 정도전을 염두에 둔 것이라 짐작된다. 만약 이들의 우정이 차를 주고받는 오롯한 사이로 이어졌다면 조선 초기의 역사는 조금이라도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인들의 아쉬움은 지난 과거의 일이기에 더욱 큰 회한으로 다가 온다.

이런 정치적 혼돈 속에 이숭인이 차를 즐긴 연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에겐 차가 한을 씻어내기 주는 치료제였다. 이런 사실은 그의 시 ‘백염사혜차(白廉使惠茶)’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이 내게 나누어 준 화전춘 차는(先生分我火前春)
(차의)색과 향미가 하나하나 새롭구려(色味和香一一新)
하늘 끝에 떠도는 나의 한을 씻어 주니(滌盡天涯流落恨)
좋은 차는 가인과 같음을 알아야 하리(須知佳茗似佳人)

결국 그에게 좋은 차는 마음에 맺힌 한을 씻어주는 청량제였던 셈이다.

한 폭의 그림처럼 시를 표현했던 이숭인의 문재(文才)는 이미 고려뿐 아니라 명나라까지도 자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대의 문장가 이색이 “이숭인의 문장은 중국의 전 시대를 뒤져 보아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고, 우리나라에서 글을 하는 선비가 있은 이후로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유불선 섭렵한 도은, 명나라까지 명성
하지만 비판자도 더러 있었다. 서거정(1420~1488)은 섬세하고 정교한 의경(意境)을 담았던 도은의 시문을 “청신하고 고고하지만 웅혼한 기상이 부족하다(李淸新高古而乏雄渾)”라고 평했다. 성현(1439~1504) 또한『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은은 온자하지만 뻗어나가지를 못했다(陶隱能醞藉而不長)”라고 썼다.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의 문인적(文人的) 취향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것이라 하겠다. 옛 사람이 “시는 그 사람과 같다(詩如其人)”라고 한 말은 바로 이 점을 꿰뚫어 본 것이리라.

이숭인은 유·불·선(儒佛仙)을 두루 섭렵했다. 이는 권근(1352~1409)이 쓴 ‘도은이선생숭인문집서(陶隱李先生崇仁文集序)’에 잘 드러나 있다.

“(이숭인의)타고난 자질은 비범하고 뛰어나 학문이 정확하고 박식하다. 남송 성리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아 경사(經史)와 자집(子集), 백가(百家)의 글을 모두 철저하게 연구했다.”

아울러 권근은 이런 말도 남겼다.

“나라의 운세가 쇠락하는 시점에 태어나 그 문장이 더욱 떨치고 드러났으니, 이는 수백 년 동안 잘 기르고 가르쳐 온 뿌리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세상에 이름이 남는 문장가는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간혹 특별나게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고 옛사람의 문장을 뛰어넘은 훌륭한 사람도 있다.”

이숭인은 난세의 문장가 굴원처럼 시대의 역경을 뛰어 넘어 세상을 밝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말선초의 격변기를 살아야했던 그는 권력의 부침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경험했다. 그의 시 ‘오호도’에는 조석으로 변하는 세상의 인심이 그려져 있다. 황망한 시절을 한탄한 오호도의 끝부분은 이렇다.

오호라, 천년이 지나고 또 만년이 흘러간들 (嗚呼千秋與萬古)
한 맺힌 이 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此心菀結誰能識)
천둥이 되어서도 이 한을 풀지 못한다면 (不爲轟霆有所洩)
긴 무지개 되어 하늘을 붉게 비추리라(定作長虹射天赤)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君不見)
고금의 수많은 경박한 아이들이(古今多少輕薄兒)
아침엔 친한 벗이었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는 것을(朝爲同袍暮仇敵)
『도은선생집』 권2

원래 오호도는 제나라의 왕 전횡(田橫)과 그를 따르던 500명의 신하들의 의로운 충절과 기상을 추모한 시이다. 오호도의 시대적 배경은 한(漢) 고조 때이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자 제나라 왕 전횡은 그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리고 동해바닷가의 섬으로 도망쳤다. 한 고조는 전횡을 낙양으로 불렀다. 죽음을 예감했던 전횡은 낙양으로 가던 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이 그의 신하들에게 전해지자 모두 자결하여 전횡의 뒤를 따랐다. 후일 전횡과 그의 신하들의 충절은 수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이숭인은 “아침엔 친한 벗이었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빗대 “천년이 지나고 또 만년이 흘러간들 한 맺힌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라고 한탄했다. 그는 한스러운 자신의 마음이 천둥이 되어도 풀 수 없다면 “긴 무지개가 되어 하늘을 붉게 비추리라”고 했다.

“벼슬 버리고 산사로 돌아가려 하네”
그가 겪었던 참담한 상황은 이미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시기였던 46세에 죽임을 당한 사실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더구나 함께 수학했던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사실에서 그가 처한 현실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처지의 그가 차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가 남긴 다시에 그 답이 들어있다. ‘제남악총선사방 차임선생운(題南嶽聰禪師房 次林先生韻)’은 남악에서 수행하는 총선사를 찾아갔다가 지은 것이다. 오랜 우정을 나눈 사이로 보이는 그를 속마음도 훤하게 통하는 벗이라고 불렀다.

오랜 친구, 서로 만나고 보니(相逢久面目)
서로 잘 알아 속마음도 훤하게 통하네(妙契透機關)
삼업은 모두 물처럼 깨끗하고(三業水俱淨)
한 평생 구름과 더불어 한가하네(一生雲與閑)
맑고 단 샘물은 차 달이기에 알맞고(泉甘宜煮茗)
해는 길어 산 구경하기 좋아라(日永好看山)
환속하여 유자가 되란 말이 부끄럽게도 (慙愧靈師語)
(나는) 벼슬을 버리고 다시 산사로 돌아가려 하네(休官便此還) 『도은선생시집』 권2

삼업은 신업(身業·몸으로 지은 업), 구업(口業·입으로 지은 업), 의업(意業·마음으로 지은 업)을 뜻한다. 그의 오랜 벗, 총 스님은 삼업에도 걸림이 없는 깨끗한 수행자였다. 그의 수행력은 이미 구름처럼 자유로운 승려였다.

그런데도 이숭인은 총 스님에게 불교를 떠나 유자가 되기를 권했으니 세상살이에 분주한 그의 처지에선 이 말을 한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산사는 고요하여 담연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낙토(樂土)이다. 속내를 이해할 벗이 있고, 좋은 샘물과 차가 있으며, 해가 길어 산 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니 이는 문인이 꿈꿨던 이상적 삶의 형태이다. 바로 그가 말한 세계는 “산정일장(山靜日長·고요한 산, 긴 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순일(純一)을 지향했던 유자(儒者)의 여유이요, 자연합일(自然合一)을 지향한 선비들의 이상 세계였다.

차는 바로 이런 이들의 이상적 정신 음료이며, 피차(彼此)를 소통하는 창구였다. “영스님에게 해 준 말이 부끄럽다(慙愧靈師語)”는 말은 원래 당(唐)대의 이름 높은 유학자 한유(768~824)가 쓴 ‘영스님에게 보내다(送靈師)’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승려를 환속 시켜 선비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갖고 있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