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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人 정몽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7. 17. 23:52

청아한 찻물 끓는 소리에 정치적 상실감 잊은 포은

<10> 茶人 정몽주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제383호 | 20140713 입력
조선 후기의 그림인 이광사(李匡師)의 고사주유도(高士舟遊圖, 간송미술관 소장본)에는 배 안에서 차를 달이는 광경이 묘사돼 있다. [사진 박동춘]
사기류(史記類)의 열전(列傳)에는 시대마다 강개한 충심(忠心)이나 인의(仁義)를 실현하려는 이들의 굳센 의지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대개 세상이 어지러울 땐 충신(忠臣)이 나오고, 태평성대의 배경엔 어진 이(賢臣)가 있다. 따라서 이들의 출현은 그 시대가 난세인지, 태평한 시대인지를 반영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 포은 정몽주(1337~1391)는 한국의 대표적인 충신이며, 다인(茶人)이었다. 격랑 속에 쓰러져가는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한 그의 충심(衷心)은 선죽교 위에서 산화했지만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보존될 것이다.

역설적인 견해지만 화분을 안았다가 떨어뜨렸다는 그의 태몽은 삶의 여정을 예견할 수 있는 암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기 전,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이미 비수 같은 살기를 품었던 것이라 한다면, 이에 화답한 그의 ‘단심가(丹心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기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고결한 선비의 기질은 난향과 같아서 속된 향과 섞이지 않는다. 혹여 그의 학덕이 은은한 난의 여향(餘響)처럼 세상에 퍼졌다면 고려 말의 역사는 다른 여정이 전개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하지만 역사는 이에 따른 결과로 드러날 뿐 가정을 용인하지 않는다.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개성의 선죽교.
한때 그는 성리학의 대가 이색(1328~1396)의 문하에서 정도전(1342~1398)과 함께 수학했다. 뛰어난 성리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자질은 스승 이색도 “학문에서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다. 그가 논(論)하는 말은 어떤 말을 하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정도전 또한 그를 존경했다. 둘은 서로 “마음을 같이한 벗”이라 맹세했지만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결국 쇠락할 대로 쇠락해진 고려를 쇄신하기 위한 그의 뜻은 수포로 돌아가고, 조선의 건국을 도왔던 정도전은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을 어찌 알랴. 정도전 역시 자신의 큰 뜻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이방원(1367~1422)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진정 그는 조선 건국의 주역인가, 아니면 실패한 개혁 정치가인가. 정도전에 대한 이 같은 양론(兩論)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몽주 초상화.
일본 관료들이 반할 만큼 뛰어난 외교관
정몽주는 뛰어난 외교관으로 평가된다. 우왕 3년(1377)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인품과 해박한 학식에 감동한 일본 관료와 승려들은 그의 시 한수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의 학덕과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편적으로 드러낸 일화라 하겠다.

당시 그가 일본에서 지은 ‘홍무정사봉사일본작(洪武丁巳奉使日本作)’ 기삼(其三)에서는 객의 외로움과 충정을 “고향 생각에 흰 머리만 늘었구나(思歸白髮生)/ 사내 대장부가 사방에 뜻을 둔 건(男兒四方志)/ 공명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네(不獨爲功名)”라고 읊었다.

그의 출중한 외교적 감각은 명과의 외교 문제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는데, 이는 친명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의 일이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는 다시 정치적인 혼란에 빠진다. 친원파들이 이 틈을 타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죽이는 일을 벌이자 명은 이를 응징하려 했다. 고려는 다시 전란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의 탁월한 외교적 감각은 이때에도 발휘돼 고려를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당시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은 ‘망윤주(望潤州)’는 장쑤(江蘇)성 전장(鎮江)현의 룬저우(潤州·윤주)를 돌아보며 지은 것이다. 차를 달이려 강물을 길어 올리는 그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낸 이 시는 다음과 같다.

쓸쓸한 회포를 위로라도 하려고(欲以慰幽抱)
하늘 끝까지 이 걸음 하였다네(天涯作此行)
시를 읊으며 넓은 바다 건넜고(哦詩浮海闊)
차를 달이려 푸른 강물 길었네(煮茗汲江淸)
물길 돌아든 금산사요(水遶金山寺)
꽃으로 감추어진 철옹성이라(花藏鐵甕城)
(이를)바라보니 그림 같아서(相望似圖畵)
너를 위해 걸음을 멈추었네(爲汝駐歸程)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 권1

윤주의 철옹성엔 봄꽃이 가득했던 듯하다. 그러므로 “꽃으로 감추어진 철옹성”이라 했으리라. 금산사는 아마 윤주에 소재한 산사로 짐작된다. 물길이 감아 돈 금산사는 물 위에 떠 있는 듯,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한 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산사와 강물, 이 광경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던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고려사 열전 정몽주 편.
차 달이는 이치로 하늘·땅의 조화 간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여정이 너무도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쓸쓸한 회포를 위로라도 하려고 하늘 끝까지 이 걸음 하였다네”라고 하였다. 장쑤성에서 북경까지는 먼 길이다. 넓은 바다를 건너는 동안 시를 짓고, 차를 우려내며, 긴 여정의 고달픔을 해소한 듯하다. 아마도 푸른 강물은 윤주를 찾아가면서 배를 타고 갔음을 의미한다. 옛 사람들이 강물을 길어 차를 달이는 광경이나 배에 다구를 갖추고 풍류를 즐기는 광경은 종종 옛 그림 속에도 등장된다. 그가 진정 차를 즐긴 다인이었음은 이 시에서도 드러나지만 난세를 몸으로 겪었던 그는 차를 통해 어떤 위안을 얻었던 것일까.

예로부터 차의 중요한 가치는 맑음에 있었다. 맑고 향기로운 차가 마음에 여유를 주는 덕목을 지녔음은 이미 고인(故人)들이 증명한 바이다. 그들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 외로움을 느낄 때도 차를 찾았다. 옛 선비들의 소박하고 사랑스런 벗이 차였음은 이들이 남긴 시문에도 또렷이 드러난다. 사물을 궁구(窮究)할 때도 선비들의 곁을 지킨 것은 차였다. 차가 그들에겐 격물(格物)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정몽주의 ‘독역(讀易)’은 이러한 음다의 유형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솥엔 찻물이 막 끓기 시작하고(石鼎湯初沸)
풍로엔 벌건 불이 이글거리네(風爐火發紅)
감리는 하늘과 땅의 작용이니(坎离天地用)
이 속에 담긴 뜻이 무궁하구나(卽此意無窮)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 권2

『주역(周易)』을 읽으며 차를 우려내는 정황이 잘 드러난 이 시는 담박한 사대부의 풍류를 잘 드러냈다. 문화(文火·약한 불)와 무화(武火·센 불)의 미묘한 교차로 완성된 순숙(純熟·차 달이기에 가장 알맞은 물의 상태)은 차의 격조를 한껏 드러낼 수 있는 탕수(湯水)이다.

차를 달이는 일에서 ‘물 끓이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초의선사(1786~1866)도 『다신전(茶神傳)』에서 “탕(湯·끓은 물)에는 (물이 끓는) 모양과 소리와 수증기의 형태를 보고 분별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기에 정몽주는 돌솥에 끓는 물과 풍로의 벌건 불빛을 색감으로 대비하였고, 음양의 이치로 나타냈다. 그가 말한 감리(坎离)는 물과 불을 의미하며, 음양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주역을 읽으며, 차를 달이는 동안 돌솥과 풍로, 물 끓는 소리와 벌건 불빛을 대비시켜 물불의 조화를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이런 형상을 보고 무궁한 천지의 이치를 터득했으니 사대부의 궁리(窮理·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법)는 이런 것이었다.

포은의 주변 정화한 맑은 솔바람 소리
한편 그의 보국충정(報國忠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하는 마음)은 ‘돌솥에 차를 달이며(石鼎煎茶)’란 시에도 잘 나타난다. 이 시는 자신을 ‘늙은 서생’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초로(初老)를 넘긴 50세 전후에 쓴 것으로 짐작된다.

늙은 서생 나라 위해 한 일도 없이(報國無效老書生)
습관처럼 차 마시며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다네(喫茶成癖無世情)
바람 불고 눈 오는 밤 쓸쓸한 집에 누워(幽齋獨臥風雪夜)
돌솥에서 나는 솔바람 소리, 듣기 좋아라(愛聽石鼎松風聲)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권2

그가 얼마나 차를 좋아했으면 차벽(茶癖· 차를 좋아하는 것이 너무 지나침)이 생겼다 했을까. 이미 늙어 버린 처지이기에 나라에 보답할 수 없다는 그의 긴 장탄식은 충직한 선비의 심회(心懷)를 드러낸 것이다. 자신을 차벽만 생긴 쓸모없는 사람이라 자탄하였으니 이 시를 쓸 당시 정몽주는 정치적인 상실감이 컸던 게 아닐까 짐작된다. 혹 “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 밤”은 그의 정치적인 상황을 표현한 것이고, “쓸쓸한 집에 홀로 누워있는” 정황 또한 당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리라. 이런 처지에서 마음이 가는 곳은 찻물이 끓는 청아한 소리, 곧 송풍(松風)일지도 모른다. 깊은 산중의 소나무는 선인이 사는 곳. 소나무 그늘 아래서 이리저리 소요하며, 자연의 원초적인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린 자라면 이는 곧 성인이며, 난세를 구할 지혜를 갖춘 인물이리라.

자연과 함께 합일(合一)된 세계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동경했던 이상향이었다. 따라서 송풍 소리를 듣는 정몽주의 주변은 이미 맑은 솔바람 소리로 깨끗하게 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옛 다인의 정겨운 서정성은 이숭인(1347~1392)의 ‘제신효사담사방(題神孝寺湛師房)’에서 “솔바람 소리와 빗소리 다병에서 들려오네(松風和雨生茶缾)”라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차를 통한 이들의 아취와 풍류는 지금의 우리들이 닮아야할 정서다. 여유와 서정성은 사람의 품성을 넉넉하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몽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可)이지만, 초명(初名)은 몽란(夢蘭)이었고, 아홉 살이 되던 해, 몽룡(夢龍)이라 고쳐 불렀다. 다시 관례를 치른 후 몽주(夢周)라 하였다. 지주사였던 정습명의 후손이다. 성리학에 뛰어났던 그는 한국 성리학의 창시자로 칭송된다. 저술로는 『포은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