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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여말선초, 茶香에 기대 맑은 정신 지킨 원천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6. 22. 09:51

혼돈의 여말선초, 茶香에 기대 맑은 정신 지킨 원천석

<8> 운곡 원천석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제380호 | 20140622 입력

 

원씨 문중에서 소장 중인 운곡의 초상화. [사진 박동춘]

원천석(1330~?)은 여말선초(麗末鮮初·고려 말~조선 초기)의 격변기를 살았던 인물로 평생 차를 즐기며 수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젊은 시절 진사시에 합격했던 그는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림에 은둔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빼어난 경관을 찾아 유람하기를 즐겼던 그가 고려의 옛 궁궐터를 지나다가 지은 ‘회고가(懷古歌)’는 아직도 널리 회자되는 노래다. 흥망성쇠의 무상함과 변치 않는 충절을 노래한 이 시는 목은 이색(1328~96)과 야은 길재(1353~1419), 삼봉 정도전(1342~98)의 회고가와 함께 절창(絶唱)으로 칭송된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청구영언(靑丘永言)』

고려 흥망 지켜보며 무심의 경계 노래
나라의 흥망은 이미 정해진 운수에 매인 것인가. 흥성했던 고려의 수도 개경의 옛 궁궐터엔 늦가을 된서리에 생기 잃은 풀만 가득하다. ‘석양에 지나는 객’은 분명 원천석일 터다. ‘오백 년의 왕업이 목동의 피리 소리에 묻혀버렸다’는 그의 말은 바로 공(空)과 멸(滅)의 인연법을 나타낸 것이다.

승려들과 교유하기를 즐겼던 그는 『능엄경』을 애독했다. 승려의 암자를 찾아 차를 즐겼던 삶의 편린은 그의 시문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려 말, 사대부들이나 문인들은 승려들과 어울려 수려한 산수를 감상하며 시를 짓고, 차를 즐기는 것을 고상한 풍류로 여겼다. 원천석의 ‘유곡굉사(幽谷宏師)…’는 당시의 음다 풍류를 짐작하게 하는데, 그가 찾아간 무주암(無住菴)의 풍광은 다음과 같다.

새로 지은 암자에서 도를 닦으며(締搆新菴養道情)
(도 닦는 마음으로)오가는 흰 구름을 굽어보네(俯看來往白雲行)
눈은 온 천지 먼 허공까지 통하고(眼通上下虛空遠)
마음은 툭 터진 삼천대천세계와 같구나(心豁三千世界平)
바람 잦아든 다헌엔 차 향기 자욱한데(風定茶軒煙自鎖)
깊은 밤, 선방엔 달빛마저 고요하네(夜深禪榻月長明)
말없이 앉아 무주를 관하는 (굉) 스님이여(上人燕坐觀無住)
무주의 마음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無住心從甚處生) 『운곡행록』 권1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소장하고 있는 『운곡시사』표지와 일부 내용 도판.
조용한 계곡에서 수행하는 굉사(宏師)는 굉 스님을 말한다. 무주암은 굉 스님이 새로 지은 암자다. 상원사 주사굴 서쪽 봉우리에 위치한 이 암자는 치악산 변암(弁巖)에 있던 원천석의 누졸재(陋拙齋)와 가까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1374년 변암에서 살았던 원천석은 격의 없이 내왕하던 굉 스님의 새 암자가 궁금했을 터. 단걸음에 달려갔던 그는 무주암의 빼어난 경관에 매료되었다. 그러기에 도를 닦는 마음으로 “오가는 흰 구름을 굽어보는” 무심(無心)의 경계를 노래한 것이다. 속진에 찌든 사람의 눈엔 높디높은 암자의 위용만이 상상될 뿐이지만 툭 터진 시야. 삼천대천세계처럼 넓고 넓은 굉 스님의 마음은 분명 걸림 없는 선의 경계를 이룬 듯하다. 따라서 굉 스님이 수행하는 암자엔 바람마저 순화되어 고요한데 무심한 달빛이 사방을 비춘다.

이런 정적 속에 작은 미동(微動)이란 오직 다헌(茶軒)에서 피어나는 차 향기뿐. 차향은 원래 산란했던 마음을 잠재우는 마력이 있다. 차를 마신 후 들고 날 때마다 올록볼록 피어나는 차 향기는 차의 신(神)이 현현된 세계다. 차의 신을 부르기 위해 옛 사람들은 물을 끓이고, 샘물을 찾아 차에 가장 좋은 상태를 알아차리는 혜안(慧眼)을 길렀다. 바로 불의 조화를 터득하고, 오묘한 시공의 간극(間隙)한 찰나를 간파하는 능력을 기르려 했던 셈이다.

따라서 다헌에 차향이 가득 고이게 한 굉 스님의 차 다루는 솜씨는 다신(茶神)을 드러낼 수 있는 수행자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는 무주(無住)를 관하는 수행자가 아니던가. 무주는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유불도(儒佛道)에 능했던 원천석 또한 무주(無住)의 주처(主處)를 물었으니 이들의 장쾌한 법거량(法擧量·어느 정도 법을 깨달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시원하고 개운한 뒷맛을 남긴다.

상왕 태종 앞에서 수양의 됨됨이 직언
태종이 어린 시절 원천석으로부터 글을 배웠던 사실에서 학문이 출중했던 원천석의 탁마를 짐작할 수 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이 동쪽을 유람하다가 치악산으로 스승을 찾아 갔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 않았던 원천석의 깊은 뜻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전설처럼 전해지는 태종과의 인연사는 왕권을 위해 많은 사람을 살육했던 태종의 무도함에 경종을 울린 것이고, 조선의 건국 또한 결코 의로운 일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여겨진다.

후일 태종과의 질긴 인연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졌는데, 이미 상왕이 된 태종의 부름은 거역하기 어려웠던지, 흰 옷을 입고 입궐해 태종을 만났다. 태종이 그에게 “내 자손이 어떠한가”라고 묻자, 세조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를 부른 태종의 속내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훌륭한 학자를 잘 대접한다는 정치적인 명분이나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하여간 세조의 가슴 깊이 숨겨진 야심을 알아 본 그의 혜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학문의 힘인가 아니면 차를 즐겨 정신이 맑았던 덕인가. 역사의 운수(運數)를 예견한 그의 예지력은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후일 태종은 원천석의 아들을 현감에 등용해 스승에 대한 예를 다했으니 원천석은 태종에게 불신지신(不臣之臣·학문과 덕이 높아 감히 신하를 삼을 수 없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에 있는 운곡의 묘역, 강원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돼 있다.
원천석이 살았던 여말선초의 차 문화는 어떠했을까. 이 시대는 단차(團茶·떡차)와 산차(散茶·잎차)를 혼용하던 시기다. 이 무렵 중국은 대변혁기를 겪는다. 바로 원의 멸망과 함께 명나라가 건국된 것이다. 특히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차 문화의 일대 혁신을 일으킨 인물이다. 송·원대에 유행했던 단차를 금지시켰던 그는 단차를 만들기 위한 백성의 고초를 너무도 잘 알았던 군주였다. 그가 사노(寺奴)로 있을 때 단차를 만들던 백성의 고충을 피부로 느꼈다. 그가 명나라를 세운 후 단차를 폐지하는 조칙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명대는 산차가 일세를 풍미했다. 잎차를 만드는 다양한 기술은 이때부터 더욱 발전되었다. 따라서 동 시대의 혼란기를 같이 겪었던 여말선초의 차 문화는 명대의 변화된 음다 풍속이 전해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에 차 문화를 이끌어갈 구심점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이 건국된 후 차 문화를 주도했던 불교계의 몰락은 음다 문화를 이끌던 계층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은 어려웠지만 차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일부의 문인·승려 사이에서는 여전히 차를 즐기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원천석은 바로 이런 시기의 인물로, 민멸 위기에 처한 차 문화를 이어간 다인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원천석이 즐긴 차의 유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원천석이 새해를 맞아 차를 즐기던 정황은 ‘갑술신정(甲戌新正)’에서 자세한데, 이는 “(중략)…벼룻물이 얼어 붓 잡기 어렵고, 붉은 화롯불엔 차 다릴 만하구나. 누워서 눈 내리는 소리 듣노라니 내 마음 아름다움을 누가 알까(硯氷難援筆 爐火可煎茶 臥聽蕭蕭響 誰知自意嘉)”라 했다. 추운 겨울, 따뜻한 화롯불에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차를 즐겼던 그의 삶은 “내 마음 아름다움을 누가 알까”처럼 조심스러웠다.

“차 마시면 눈 밝아지고 번뇌 사라져”

아우 이선차가 보낸 차를 받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낸 ‘사제이선차(사백)혜차(謝弟李宣差(師伯)惠茶)’는 차를 즐기는 연유를 이렇게 말했다.

반갑게도 서울 소식이 산림에 도착했는데(惠然京信到林家)
연두빛 움트는 봄, 새로 만든 작설차를 보내왔네(細草新封雀舌茶)
식사 후 한 사발도 맛이 대단하거니와(食罷一甌偏有味)
술 취한 뒤 마시는 세 잔은 정말 자랑할 만하지(醉餘三椀最堪誇)
마른 창자 윤기 돌아 욕심이 없어지고(枯腸潤處無査滓)
침침한 눈 활짝 뜨여 어른거림이 없구나(病眼開時絶眩花)
이 물건 신통한 효과는 헤아릴 수 없으니(此物神功誠莫測)
잠이 싹 달아나자 시상이 마구 떠오르네(詩魔近至睡魔除) 『운곡행록』 권5

그가 받은 차는 작설차다. 산차의 일종이라 짐작된다. 그가 말한 대로 차를 마시는 첫째 이유는 잠을 적게 하는 것. 이로 인해 선승은 차를 마시며 수행을 했다. ‘마른 창자’란 감성이 메말라 버린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따뜻하고 맑은 차는 사람의 근심과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욕심이 없어진다.

또 “침침한 눈 활짝 뜨여 어른거림이 없다”는 것은 차를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는 사실을 이리 말한 것이다. 지금도 잘 만들어진 차를 뜨겁게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해진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실제 차를 마신 후의 징후는 원천석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지만 차의 아홉 가지 이로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다만 좋은 차와 물, 알맞은 다구, 또 뜨거운 온도(섭씨 90도 이상)로 차를 달여야만 이런 차의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꼭 지켜야 할 조건이다. 특히 술이 취한 후 빨리 술을 깨게 하는 것은 차다. 그러기에 원천석은 “술 취한 뒤 마시는 세 잔은 정말 자랑할 만하지”라고 한 것이다. 원천석이 즐긴 차의 이로움은 오늘도 유효하다.



원천석 여말선초의 문인이며 다인(茶人). 호는 운곡(耘谷)이고, 자는 자정(子正)이다. 그의 문집으론 『운곡시사(耘谷詩史)』 5권을 남겼다. 『운곡행록(耘谷行錄)』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