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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다시 읽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27. 22:22

 

최인호 (전직) 소설가 , (전직) 대학 교수
생몰1945년 10월 17일 ~ 2013년 9월 25일
출생지대한민국 서울
신체A형
데뷔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선
경력미주 순회 한국현대문학낭독회 회원
수상2011년 제14회

 

"하늘이 고인에 재능을 주셨고, 이젠 편히 쉬게 하실것"

故 최인호 작가 빈소 각계 조문 이어져

문화일보 | 김영번기자 | 입력 2013.09.27 14:01 | 수정 2013.09.27 15:01

  • "작품 활동도 왕성했지만 늘 낙천적이고 쾌활하게 자신을 열어놓은 분이라 건강을 회복하고 더 좋은 작품을 쓰려니 기대했는데 이리 일찍 가시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최인호 작가의 빈소를 찾은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 씨는 짙은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 "고인은 '타인의 방'과 같은 작품을 통해 새로운 감수성을 드러낸 작가"라며 "산업화 시대의 증상과 왜곡된 존재의 실체를 폭로하는 작품으로 시대의 변화를 보여줬다는 데서 문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25일 별세한 최인호 작가의 빈소에는 전날에 이어 26일에도 문학계를 비롯, 정·관계, 종교계 등 각계 인사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고인과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이날 빈소를 찾아 "늘 바르게 살아온 고인이 그립다"면서 "하나님이 고인에게 재능을 주셨고 이제 편안하게 쉬게 하실 것"이라는 말로 추모의 뜻을 표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1960년대 대표 소설가 김승옥 씨도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뇌졸중 투병으로 말하기가 편치 않은 김 씨는 수첩에 '별들의 고향 원작 최인호, 각본 김승옥, 감독 이장호'라고 적으며 1970년대부터 계속된 고인과의 친분을 회고했다. 김 씨는 1968년 대종상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당시 활발하게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고인이 어떤 분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엔 "좋아"라는 짧은 말로 답을 대신했으며 올해 봄에 고인을 만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소설가 출신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천막농성 차림 그대로 빈소를 찾았다. 김 대표는 "문단을 위해서나 당신의 삶을 위해서나 좀 더 우리와 함께 했어야 할 분인데 안타깝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김 대표는 "등단했을 때 알려지지 않은 김한길을 최초로 인정해주고 중앙 문단에 소개해주시며 각별히 저를 이끌어줬던 선배"라며 "문단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큰 별이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과 연세대 동문회장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빈소에 다녀갔다. 또 소설가 조정래·박범신·김홍신 씨, 김형영·김남조·이근배 시인 등 다수의 문인이 찾아와 조문했다. 연예계에서도 배창호 감독과 배우 신성일·손숙·안성기·강석우·윤유선, 가수 조영남·이장희 씨 등이 줄지어 빈소를 찾았다. 고인이 연재물 '가족'을 실었던 샘터사를 비롯해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현대문학, 열림원 등 출판계에서도 조화로 고인을 애도하고 관계자들이 직접 빈소를 찾았다. 김성구 샘터사 대표는 "고인은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왕도의 비밀' '상도' 등을 쓴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소설 대가였다"며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철저하게 공부했고, 대하 역사소설을 쓸 때도 언제나 글의 깊이를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인과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혔던 박범신 씨는 트위터를 통해 "그이는 작가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면서 "떠나고 남는 게 뭐 대수겠는가. 내겐 아직도 타고 있을 그이의 불꽃이 보인다"며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김영번 기자 zerokim@munhwa.com

원고지 위에서 작가로 죽겠다던 그.. 명복을 빕니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3.09.27 14:37
[오마이뉴스 최오균 기자]

"나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에 빚을 지고 있으며"라고 말했던 최인호 선생은 그의 말대로 슬픔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시대의 아픔을 주옥 같은 글로 답하며 한 송이 꽃으로 사라졌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는 그의 마지막 작품 <최인호의 인생>에서 노래했듯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꽃잎으로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갔다. 암투병 중에도 끝내 펜을 놓지 않고 창작열을 불살랐던 그가 아니던가.

"제 소원이 있다면 환자로 죽지 않겠어요. 작가로 죽겠습니다. 원고지 위에서…"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그는 한 장의 원고지 위에서 유언처럼 마지막 글을 쓰다가 꽃처럼 사라져 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보살상 앞에서 나는 합장을 하고 송주하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려다 말고 나는 고개를 돌려 관세음보살상을 다시 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생떽쥐베리가 쓴 '어린왕자'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이 어린 왕자의 환영으로 부활했단 말인가."(<최인호의 인생>,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중에서)

그가 법정스님을 보내며 쓴 글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늘 법정 스님을 존경해왔다.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라는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한 그는 종교를 초월해 살아간 이 시대의 작가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톨릭 신자이면서 어떻게 불교에 심취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엄마와 아빠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고.

최인호 작가가 소설 쓰고 스님에게 혼난 이유

그는 소설 <길 없는 길>을 집필하면서 5년여간 절을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길 없는 길>은 경허 스님의 궤적을 찾아다니며 한국불교에 대해 작가의 눈으로 심오하게 써 내려간 글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가톨릭 신자인 그가 어떻게 불교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고 생생하게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발로 뛰어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1989년부터 소설 <길 없는 길>이 <중앙일보>에 절찬리에 연재되던 시기에 나는 우연히 그를 어느 카페에서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너무나 감명 깊게 소설을 읽고 있었기에 다소 무모하게 그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저는 최근 선생님의 작품 <길 없는 길>을 아주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교에 대해 심오하게 써내려갈 수 있지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그 책 때문에 스님들한테 많이 혼나고 있답니다."

그의 말인 즉, 불교에 대해 '쥐뿔'도 알지 못하면서 초조 달마대사 이후 경허선사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선맥에 대한 내용을 함부로 소설로 쓸 수 있느냐는 경책을 스님들로부터 자주 듣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님만큼 한국불교에 대해 알기 쉽고 자세하게 서술한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괘념치 마세요."

"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숨결을 보내주세요... 내 가슴에 꽃이 필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청년 작가 최인호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말한다. '내 정신의 아버지가 가톨릭이라면 내 영혼의 어머니는 불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자신을 부르고 싶다.' 당시 그는 머리를 깎고 정말로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 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었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최인호의 인생> 중에서)

그는 이렇게 독자들의 숨결로 가슴에 한 송이 꽃을 피우며 그가 그렸던 작품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저 세상에서도 꽃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지 않을까? 그러나 그를 보내는 것은 이 시대의 아픔이자 나에게는 매우 슬픈 이별이다.

故최인호 '소설 읽기'로 추모 열기 이어져

'인생' '인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등 작품 판매량 급증

 

머니투데이 | 이언주 기자 | 입력 2013.09.27 16:25
[머니투데이 이언주기자]['인생' '인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등 작품 판매량 급증]

'영원한 문학청년 고(故) 최인호 작가의 별세 이후 고인이 남긴 100여 종의 서적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오프라인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는 타계 전과 비교해 최고 35배 이상 판매량이 증가하는 등 추모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서울의 대형 서점 등에서는 독자들이 몰려 한 때 책 재고가 동나기도 했다.





지난 25일 타계한 소설가 최인호 /사진제공=뉴스1

교보문고 측은 "오프라인 영업점이 250부, 인터넷 교보문고가 600부 가량 판매량을 보이고 있다"며 "최 작가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바로 책을 구매하는 회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최 작가의 작품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많이 찾고 있으며(61.5%), 가장 많이 찾는 연령대는 30대, 40대, 50대, 60대 순이며 도서 주 구매층인 20대는 60대보다 구매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인의 책 중 유작이라 할 수 있는 '인생' '인연' '최인호의 인생'을 비롯해 5년간의 투병 중 손가락에 골무를 끼워가며 써낸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도 많은 독자들이 찾고 있다.

현재 고인의 빈소에는 문학, 종교, 정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 26일에는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빈소를 찾았다. 이날 유 장관은 고인과 고교 동문임을 언급하며 "학교에서 워낙 문재(文材)로 소문이 나 신화적인 존재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편 고인은 지난 25일 오후 7시 2분 별세했다. 2008년 침샘암 발병 이후 5년간 투병생활 중에도 꾸준히 집필활동을 했다.

서울고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고인은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겨울나그네' 등을 발표하며 문학성과 대중성을 고루 인정받으며 한국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발인은 서울성모병원에서 28일 오전 7시30분, 영결 미사는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이날 오전 9시 정진석 추기경이 직접 집전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故 최인호 작가에게 은관 문화훈장 추서

연합뉴스 | 입력 2013.09.27 17:18 | 수정 2013.09.27 17:32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정부는 지난 25일 별세한 최인호 작가에게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추서하기로 했다.

27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고인에 대한 훈장은 이날 오후 7시께 모철민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서울성모병원에 차려진 빈소를 방문해 유족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고인은 소설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해신' '유림' 등을 꾸준히 펴냈으며 2008년부터 침샘 부근에 발병한 암으로 투병했다.

cool@yna.co.kr

자전소설 '가족', 최인호의 저력 보여

35년 최장수 연재… 진솔한 중산층 삶에 독자들 공감 불러

 

한국일보 | 박선영기자 | 입력 2013.09.27 21:15
최인호만큼 자기 문학의 외연을 최대치로 확장한 작가도 흔치 않다. 비단 영화와 연관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수많은 산문을 쓴 에세이스트인 동시에 몇 권의 그림책을 쓴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최인호 글의 힘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준 작품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35년간 월간 샘터에 연재한 자전소설 <가족>일 것이다. MBC 라디오 방송 '여성시대'가 27일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을 '최인호 추모 특집'으로 꾸밀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이 국내 최장수 연재소설 <가족>의 힘이다.

최인호의 '소설로 쓴 자서전'<가족>에는 그의 아내와 큰 딸 다혜씨, 작은 아들 도단이(성재씨)가 그대로 등장인물로 나온다. 그러니까 그의 자녀들은 일평생을 '유명인'으로 산 셈. 1970년대 막 태동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도시 중산층 가정의 단란하고도 진솔한 모습에 독자들은 크게 공감했고, 때로는 시샘하기도 했다.

가족들끼리 티격태격 지지고 볶으면서도, 결국엔 사랑하고 화해하는 일상이 소설의 주를 이루지만, 가족ㆍ친지 외에 주위 사람들과의 인연, 일상의 단상 등도 특유의 세련되고 날렵한 필치로 담담하게 서술돼 있다. 2007년 연재 400회를 기념해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을 간접 체험한 독자들에게는 최인호의 대표작이 '타인의 방'이나 <별들의 고향> 같은 소설이 아니라 바로 이 <가족>이다. 그래서 트위터에는 "마치 나의 아버지를 잃은 것 같은 서글픔이 몰려온다" "내가 마치 그 집 식구인 것 같았는데" 같은 글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올라오고 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통속작가'로 폄하된 대중작가 최인호

"과감한 감수성 혁명" 데뷔초 상찬 이어져
'별들의 고향' 연재 후 문학적 성취 평가절하

 

한국일보 | 이윤주기자 | 입력 2013.09.27 21:15
  • 소설가 최인호 앞에는 '감수성의 천재', '시대에 영합한 통속 작가'란 엇갈린 수식어가 함께 붙는다.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겨울 나그네> 등 시대를 풍미한 소설은 최인호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통속작가 꼬리표를 붙어 그의 문학적 성취를 평가절하 했다는 지적이다.

    최인호는 데뷔 초 세련된 문체로 도시문학의 지평을 넓히며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 그를 '30년대의 이효석, 50년대의 손창섭, 60년대의 김승옥'에 비교했을 정도로 재능을 아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단편 '술꾼' '처세술 개론' '타인의 방' 등을 발표한 1970년대 초반 문단에서는 "1960년대에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문학평론가 조남현)란 상찬이 이어졌다.

    ↑ 최인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겨울나그네’의 한 장면

    ↑ 최인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그러나 197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별들의 고향>을 분기점으로 그는 본격문학과 거리를 둔 대중작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유흥가 여성 경아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최인호를 스타작가로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스티스 문학'이란 신조어를 만들며 이후 출간된 그의 모든 소설을 평가 절하시킨 원흉으로 꼽힌다.

    이선미 경남대 국문과 교수는 "소설이 영화화되고, 당대 사회적 분위기와 엮이면서 폄하됐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논증하지 않고, 미리 통속작가란 관념을 갖고 평가하는 면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가가 <별들의 고향>을 연재, 출간한 1972~75년 사이 단편 '황진이 1' '전람회의 그림 1', 중편 '무서운 복수' 등 문학계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은 상당수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한다. 절정의 역량과 보기 드문 대중성을 과시하지만, 작가는 "과장된 수사, 팽팽한 속도감, 관능적인 분위기, 생동하는 문체, 흥미 만점의 구성, 우상파괴적 제스처. 어느 하나도 오늘날 대중에게 어필하지 않는 것이 없다"(문학평론가 이동하)란 평가를 듣는다.

    작가는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나눠 자신을 폄하했던 당시 문단 풍토에 대해 "민중과 대중이 다르다고 생각하여 민중문학은 고급문학이니까 비상업적이고 대중문학은 저급하니까 상업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민중문학이라고 내세우는 것 자체가 상업주의 아닌가"(동아일보 1979년 11월 8일자)라며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한편, 유년시절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던 작가가 가장으로서 부담감을 느껴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해석도 있다. 최씨는 1975년 1월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0년대의 예술가들은 생활과 예술을 완전히 분리시켜 어느 한편, 그것도 생활 쪽이 희생되는 일이 많았다"며 "(70년대 예술가인 저는) 가장으로서의 생활의 책임이 철저히 요구되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갈등을 느끼면서 생활과 예술 양자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계간지 <문학과지성> 봄호에 '타인의 방' '술꾼' 등을 재수록하며 미학적 평가를 시도한 김병익 문학과지성 상임고문은 '그의 문학이 퇴폐적이라면 그 문학이 가능하게끔 한 이 사회가 퇴폐적이라는 말이 되고 이 세계가 타락한 상업주의의 구조라면 그의 문학 또한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순수한 작가가 떠났다”

    기사입력 2013-09-27 03:00:00 기사수정 2013-09-27 03:00:00

    빈소에 각계 인사 조문 줄이어

    26일 오후 최인호 작가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례미사는 28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베드로(최인호 작가의 천주교 세례명)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베드로∼.”

    고 최인호 작가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26일 가톨릭 교인들의 위령 기도 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빈소에서 나직이 반복되는 기도문과 찬송가를 배경으로 각계각층의 조문 발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날 오전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빈소를 찾아 유가족을 위로했다. 이 전 장관은 “문학가들이 문단 밖 활동을 많이 하는데 고인은 문단 외의 일은 하지 않았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순수한 작가가 떠났다”고 애도했다. 그는 “(고인은) 1세대 청년문화를 이끈 작가였다. 지금의 한류 문화의 물꼬를 튼 사람이다”라고 회고했다.

    소설가 출신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장례식장을 찾았다. 천막 농성 차림 그대로 빈소에 온 김 대표는 “저를 중앙 문단에 소개해 주셨던 분이 고인”이라며 “조금 더 우리와 함께했어야 할 분인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조의를 표했다. 연세대 총동창회장이기도 한 박 회장은 “작가는 대학(연세대) 1년 후배였다. 학교의 자랑이었고 좋은 책을 더 볼 수 있었는데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인이 35년간이나 소설 ‘가족’을 연재한 월간 샘터의 편집장을 지낸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씨는 “1975년부터 원고를 받으며 1년에 한 번씩은 모여 식사를 했다”며 “그는 진짜 좋은 사람이었다”고 떠올렸다.

    이 밖에도 빈소가 차려진 25일 밤부터 26일까지 시인 김남조 김후란, 소설가 조정래 김홍신, 영화감독 배창호, 영화배우 안성기, 가수 조영남의 조문이 이어졌다. 김홍신 씨는 “어느 날 형(최인호)과 만나 ‘평소 형의 작품을 많이 비판해 괴롭다’고 했더니 형이 ‘그러니까 김홍신이지. 우리는 이제부터 형제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고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적도의 꽃’(1983년) ‘고래사냥’(1984년) ‘깊고 푸른 밤’(1985년)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년)을 연출한 배창호 감독은 “고인이 우리가 보는 길 위에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깊이 있는 말씀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이 영화들의 주연을 도맡았던 안성기 씨는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놓인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빈소에는 정진석 추기경과 염수정 서울대교구장, 강창희 국회의장,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 등이 보낸 조화가 가득했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추모의 열기는 이어졌다. 소설가 이외수 박범신 공지영은 트위터를 통해 고인의 명복과 안식을 빌었다. 누리꾼들도 페이스북 등에 고인의 작품이 원작인 영화 포스터나 동영상 편집본을 올리며 우리 시대 영원한 청년작가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빼곡한 사전, 눌러 쓴 원고 … 창작의 온기 고스란히

[중앙일보] 입력 2013.09.27 00:25 / 수정 2013.09.27 01:30

마지막 집필실 찾아가 보니
투병 기간에도 매일 나와 일해
손때 묻은 성경이 고인을 지켜
후배 위로했던 박완서의 편지도

서울 한남동 최인호 작가의 집필실 책상 한가운데에 소화(小花) 테레사 성녀의 사진이 놓여있다.

 

24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진 테레사 성녀는 투병 중에도 이웃과 세상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최인호는 테레사 수녀에게서 암과 싸우는 힘을 얻었다. [김경빈 기자]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최인호의 인생』)

 암투병 5년 끝에 25일 세상을 떠난 최인호(1945~2013)는 죽는 순간까지 작가이고자 했다. 병들어가는 육신은 창작에 대한 열정을 지폈을 뿐이다.

 26일, 고인이 2002년부터 타계 직전까지 집필했던 서울 한남동의 출판사 여백미디어를 찾았다. 10여명의 직원이 책을 만드는 이 곳에 작가의 방이 있었다. 암 투병 전후로 썼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의 인생』 등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 책상 위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빈 원고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작가는 컴퓨터를 쓰지 않았다. 수많은 이야기는 이 원고지와 만년필에서 시작됐다.

 그는 악필로 유명했는데, 아무도 읽지 못해 편집자에게 직접 쓴 글을 읽어줬다고 한다. 사실 그가 악필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작가는 구상을 오래 한 뒤, 한 번에 집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야기를 토해낼 때 손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여백미디어 서경현 대표는 “머릿속에 컴퓨터가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 누구도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지난 추석, 병원 입원 직전까지 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오전 9시쯤 도착해 작품 구상이나 집필을 하고 나서 오후 6시쯤 퇴근했다. 젊은 작가들의 신작 소설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책꽂이엔 편혜영 작가가 지난 8월 펴낸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가 놓여 있었다. 한 켠에 가지런히 꽂힌 국어사전, 영한사전, 고사성어 백과사전에선 모국어와 분투한 고인의 일생이 전해졌다. 그는 추석 전만해도 “걱정하지 마라. 몸이 나으면 열심히 쓸 테니까”라며 직원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최인호씨의 손주가 연필로 그린 고인의 초상화. (사진 위)

 아래는 선배작가 박완서씨가 생전에 고인에게 책을 보내며 동봉했던 편지.

 

 

병마와 싸울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건 신앙이었다. 손때로 누렇게 변색된 성서는 육중한 무게로 책상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고인은 프랑스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1873~97) 수녀의 사진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글 좀 쓰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 때문에 책상엔 눈물 자욱이 자주 찍혔다. 죽기 직전까지도 예수의 생애를 소설로 쓰고 싶어했다.

 가족·친지에 대한 애끓는 애정도 전해졌다. 손주가 그린 초상화, 어린 시절 형제들과 찍은 사진, 아내와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흑백사진은 늘 그의 곁을 지켰다. 벽 한 켠엔 박완서(1931~2011) 작가가 생전에 고인에게 보냈던 편지가 붙어있었다.

 박 작가는 “나도 기도를 보태겠습니다. 제 기도는 나보다 먼저 최인호를 데려가면 가만 안 있겠다는 하느님을 향한 으름장입니다. 나는 백 살까지 살 작정이니까 앞으로 이십 년 이상은 내가 보장할게요”라며 후배 작가를 위로했다.

 고인은 사무실에서 전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판사 직원들의 금기어는 “몸은 괜찮으시냐”였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안부를 물으면 작가가 되려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고인은 방사선 치료로 목이 부었지만 죽 대신 밥을 먹으려고 할 정도로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서 대표는 “차라리 환자처럼 사셨으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환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고인은 글 못쓰는 배고픔이 가장 두려웠다. 죽음과 가까워질 수록 생의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문학이었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