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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에게 노벨상 대표를 허하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19. 17:52

정호승에게 노벨상 대표를 허하라 장재선의 풍월 | 2013-09-17 22:09:53
장재선(jeijei2) http://cafe.munhwa.com/literarture/5489 




언제는 그렇지 않았을까마는 세상이 힘 있는 자들의 힘겨루기 탓으로 시끄럽다. 젊은 시절부터 영감님이라는 소리를 들어온 자들이 축첩제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칼춤을 추어댄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이 기득의 성인 것을 알면서도 갖은 풍악을 울리며 패거리 지어서 함께 춤추는 자들이 있다. 이 판을 키운 자들은 반대편에서 세상의 온 판을 자기들 손으로만 주무르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세상이 왔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렇게 한꺼번에 힘을 다 모아야 직성이 풀리는가. 힘을 나눠 써야 하는 대명천지가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그리 서투르게 힘을 뺏어오려 하다가 힘겨루기의 판에서 꼴사납게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가.

각다귀판에 시달리면서도 머리가 어지럽진 않았다. 근자에 정호승의 시집 '여행’을 품고 있는 덕분이다.
같잖은 자들에 대한 분노로 주먹이 쥐어질 때 읽는 시.

이제는 주먹을 펴야 한다
주먹을 펴지 않으면
아기가 엄마 젖을 만질 수 없듯이
주먹을 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져야 한다
- ‘내 손에 대한 후회’ 중

이 시집은 지난 번 가을 들머리에서 혼자 간 자전거 여행 때도 백에 넣어 다닌 것이다. 그 때 나는 이 시집을 펼쳐보지 않아도 우리 산천의 풍경과 함께 시집 속으로 자주 들어갈 수 있었다. 잠깐이라도 사람을 떠나 있어서 사람이 조금은 그리워지니 그가 여행하는 ‘사람의 마음의 설산’이 어디 있을지 짐작을 하고 싶어졌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 ‘여행’ 중

나는 본시 경구를 잘 견디지 못한다. 신부, 목사, 승려들께서 이런 저런 교훈적 말을 내릴 때도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하물며 시인의 시에서랴.
정호승이 이번 시집에서 이런 경구를 줄 때 몸을 비틀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게 돌을 던지던 당신에게
내가 빵을 던지지 못해 미안하다
당신이 내게 돌을 던질 때
내가 십자가를 던지지 못해 미안하다
- ‘산책’ 중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잠시나마 몸을 비튼 것이 겸연쩍어진다. 정호승의 이번 시집에 실린 경구들은 이른바 인간의 예술을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쉽게 말하면 종교적 명상과 예술적 미학이 적절히 어우러지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와 동문수학한 류모 시인의 그것과 다르고, 종교시의 본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한 대시인의 그것과도 다른 정호승 류의 시예술이다. 그의 시를 대중적이라고 낮춰 보려 한 자들에게 입을 없애고 차나 한 잔 들라 하는 권차가(勸茶歌)이다.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
눈을 없애고
찻잔에서 우러난 작은 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곡우를 몇십년 지나는 동안
찻잎 한번 따본 적 없고
지금까지 우전을 몇천년 만드는 동안
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
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
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
마침내 귀를 없애고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
홀로 잠들어라
- ‘차나 한잔’ 전문

어느날 내가 키우던 개가 말했다
죽기 전에 내게 꼬리를 주고 싶다고
나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으나
다음 날 아침 내 몸에 꼬리가 붙어 있었다
나는 놀라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 발가벗고
아무리 꼬리를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꼬리가 달린 남자가 되어
개처럼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그 꼬리로 시를 쓰라고
누구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킬킬거렸다
그동안 개 같은 인간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은 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을까
나는 꼬리가 달린 시인이 되어 성당에 가서
의자에 앉지는 못하고 서서 기도하다가 울었다
지금까지 내가 인생에게 속으며 살아온 것은
내가 인생을 속이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 ‘꼬리가 달린 남자’ 전문

울면서 기도하는 시인은 침묵과 여백을 소망한다. 이 소망은 정호승 만의 절창을 낳는다.

봄이 와도 내 혀가 자라지 않기를
산수유 피는 노란 봄날이 와도
더 이상 내 혀에 봄이 오지 않기를
해마다 내 혀는 자라
꽃이 피고 가지마다 거짓의 푸른 우듬지는 돋아
나는 후회한다
무릎을 꿇고 참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춘이 지나면 운주사 석불들이
한해동안 자란 혀를 스스로 자르듯
나도 내 혀를 잘라
곰소젓갈 담그긋 천일염에 담그거나
배고픈 개들에게 던져줘야 한다
침묵의 말을 잊은
내 거짓의 검은 혀를 위하여
봄이 와도 내 혀는 산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라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 ‘혀를 위하여’ 전문

늙어가는 아버지를 용서하라
너는 봄이 오지 않아도 꽃으로 피어나지만
나는 봄이 와도 꽃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봄이 가도 꽃잎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내 평생 꽃으로 피어나는 사람을 아름다워했으나
사람이 꽃처럼 열매 맺길 바라지 않는다
늙어간다고 사랑을 잃겠느냐
늙어간다고 사랑도 늙겠느냐
- ‘산수유에게’ 전문

아버지라는 단어는 정호승의 글에서 예술보다 종교에 더 가까운데, 그것을 넘어선 것이 ‘산수유에게’가 아니겠는가, 감히 생각해본다. 최근 정호승의 상가를 찾은 김용택 시인이 함께 조문을 온 안도현 시인에게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정시인의 시가 있었지? ”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도 본 듯 합니다.”
대답은 그들과 더불어 자리를 하고 있었던 내가 했다.


텅 빈 아버지의 입속에 마지막으로
귤 향기가 가득 아버지의 일생을 채우도록
귤 한 조각 넣어드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아픈 것이라고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 중


그날 당신이 떠나던 날
당신을 만나러 조문객들이 자꾸 몰려오던 날
나는 문간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뒤집힌 그들의 구두를 정리했다
이제 산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과
죽은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이 다르랴
- ‘신발정리’ 중

정호승은 자신이 상을 당한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았으면 했다. 김용택, 안도현 두 시인에게 그걸 당부하는 음성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정호승은 점점 귀가 어두워진다고 했다. 누군가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생물학적 나이가 귀를 잡수셔야 할 정도가 아니기에 좀 망연한 심정이 됐다. 그가 베토벤이 된다면 한국문학사에 낙수거리가 생기는 것이지만, 제발 그런 일이 없이 문학사의 본문에 실릴 작품을 더 만들기를 기도했다.

알려진대로 그는 그늘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는 해가 뜨는 동쪽보다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봐줄 줄 아는 시인이다.

벗이여
눈물을 그치고 정서진으로 오라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히
노을 지는 정서진의 붉은 수평선을 바라보라
해넘이가 없이 어찌 해돋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 ‘정서진’

그의 시 ‘정서진’을 읽다가 엉뚱하게 노벨문학상에 생각이 뻗쳤다. 평생의 시업을 통해 그늘을 사랑해 온 시인 정호승이 한국의 대표 선수가 되는 것도 좋겠기 때문이다.
그 상을 주관하는 나라의 외교관을 최근 만났더니 그는 “국가별 대륙별 안배가 있는 그 상이 당분간 한국에 올 가능성이 희박한 게 사실”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에는 노벨상 따위를 넘어서는 작가와 시인들이 수두룩하지만, 국가적 과제가 돼 있는 상 자체의 수상만 놓고 보면 미흡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 작가는 표절 문제가 현지에서 운위되고, 모 시인은 국내 문학계의 찬반이 걸린다는 식이다. 한 큰 작가의 경우는 소수자 배려, 여성 우대의 전통이 뿌리 깊은 스웨덴에서 지지를 받기 힘들고, 또 한 큰 작가는 대하소설 전통이 없는 북구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르웨이 국회의원들이 선정하는 노벨평화상은 항상 문제가 되지만, 문학상은 스웨덴 문학인들이 작품과 작가를 엄밀히 검토하기 때문에 공정성을 인정받는다고 했다.
그깟 노벨상에 목멜 필요가 있냐는 게 내 생각이긴 하지만, 문학 장르가 퇴조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조속히 수상함으로써 부흥의 기운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일이 아니겠는가. 그 외교관의 말마따나 한국의 대표선수를 집중적으로 밀어볼 필요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호승이 아니겠는가 싶다. 현실에 늘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 쪽의 패싸움에 기울지 않고 보편적 사랑을 노래하며 예술적 성취를 해 왔다는 것.
문제는 번역이다. 앞서 언급한 단어 ‘집중’은 그래서 쓴 것이다.

정호승은 누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분명하다. 그는 누구에겐가 들림을 받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가 이미 대표선수가 돼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