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마을 소식들

황혼, 詩로 세상에 저항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14. 10:23

 

[황혼, 詩로 세상에 저항하다]

젊은 너희들이.. 늙은이 취급 받는 설움을 알아?

국민일보 | 입력 2013.09.14 04:14

 

노인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굴의 주름은 그가 살아온 88년 세월을 담은 듯 깊게 파여 있었다. 노인은 자신에게 남은 하루하루가 매우 소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도 매일 그날의 소회(所懷)를 메모지에 적는다. 1991년 교편을 놓은 뒤 20년 넘도록 거른 적이 없다.

 

이 메모를 토대로 지난달 19일 시집 '나이 들어 추억하는 것은 모두 슬프다'를 냈다. 시집을 읽은 지인들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그의 시(詩) 74편은 억눌려 있던 노인이 세상에 던지는 '조용한 외침'이었다.

 

 

 

 

조옥현(88) 할아버지는 동이 틀 무렵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을 쓰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마당엔 나무가 많은데 이제 잎이 많이 떨어질 때다. 이불을 갠 뒤 아침은 주로 고구마나 감자를 쪄 먹는다. 세월이 지날수록 친구가 줄어들다보니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아야 했다. 신문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산에 오르는 취미도 생겼다.

 

외출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한다. 딱히 만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이를 먹으니 친구도, 전화 걸어 줄 이도, 마땅히 찾아갈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가 재직했던 인천고의 교사 모임은 13명으로 시작했지만 대부분 세상을 떠나 이제 4명 남았다. 그는 "언젠간 마지막 한 명만 남는 순간이 올 텐데…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올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이 그리운 눈치였다. 인터뷰 사흘 뒤 그는 기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좋은 청년, 좋은 감정을 일으켜 주어 고맙소. 이 기분을 오래 간직하며 기뻐하고 싶네'라고 적혀 있었다.

 

외출할 때는 주로 정장을 챙겨 입는다. 젊은 사람들에게 늙은이 취급 받는 게 서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로 서울 수송동 종묘공원을 찾는다. 노인들이 장기나 바둑 두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그의 낙이다. 종로5가 광장시장도 자주 들른다. "재래시장은 할머니들이 물건 파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져 좋다"고 했다. '타인의 삶'을 구경하는 게 아무리 좋아도 오후 5시까지는 반드시 집에 돌아온다. 늙은이가 복잡한 퇴근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젊은이들에게 괜히 방해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란다. 그는 "늙은이의 자격지심일까, 평소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자주 고민한다"고 했다.

 

잠시 이야기를 멈춘 뒤 한마디 덧붙였다. "나이 먹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려 하지만 가끔은 젊은이들 때문에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서러울 때도 많아요." 그가 '서러웠던' 에피소드는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여든 정도 됐을 때 TV가 고장 나 새 것을 사러 매장에 갔다. 점원은 할부로 계산해도 이자가 붙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더니 "할아버지는 70세가 넘어서 할부가 안 된다"고 말을 바꿨다. 조 할아버지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할부도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돌아설 때 내가 한없이 작아지더라.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청계천을 지나다 가냘픈 새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한 청년이 새를 팔고 있었다. '젊은' 잉꼬라고 했지만 사서 집에 오니 하루 만에 털이 빠지고 기운이 다했다. 젊은 장사꾼이 거짓말을 했구나 싶어 바꿔 달라 하려고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청년은 퉁명스런 말투와 태도로 돌변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 발 물러서며 '아, 늙어서는 안 되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한밤에 낚시를 갔는데 한 40대 남자가 "할아버지, 아직도 낚시하시네요?"라고 말을 걸어왔을 때도 늙은이가 됐다는 생각에 무척 슬펐다.

 

"늙으면 헛소리가 많아진다"고도 했다. 낮에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내뱉으면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또 헛소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면 젊었을 때보다 반성과 후회가 많아진다. 그는 요즘 하루에도 수차례 '마지막'을 생각한다. "존경 받고 싶다는 생각보다 적어도 원망만큼은 피하자는 생각이 더 절실하다"며 "자식들에게 피해주지 않게, 조용히 삶을 마치고 싶다"고 했다.

 

조 할아버지는 1925년 전남 보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자식들 끼니를 챙겨주지 못할 때가 많아 늘 미안해했지만 공부만큼은 애써 뒷바라지했다. 광주사범학교를 마치고 보성의 작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수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로 옮겼을 즈음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그 무렵 사회와 나 자신에게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는 그는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오사카의 한국인 소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치며 근처 유치원 여교사를 만나 결혼했다.

 

시집에는 아내 이야기가 많다.

 

'아침 여덟시/ 아내가 무척 바쁘다/ 속옷만 입은 채/ 아내가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내가 물었다/ "지금 뭐하고 있어요?"/ 아내가 대답한다/ "아침 안 먹을 거예요?"/ 아내는 우리가 30분 전에 아침을 먹었다는 사실을/ 벌써 까맣게 잊고 있다/… 치매가 아내를 딴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다.'('바쁜 아내' 중에서)

 

그는 결혼 후 아내와 함께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신문배달을 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다 다시 공부를 하려고 25세에 도쿄 메이지대학에 입학했다. 조 할아버지는 "당시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목의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잔뜩 매달려 있었다"며 "그때부터 나무가 울창한 집에 사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대조동 그의 집 마당엔 나무가 많다. '아내와 나의 할 일'이란 시에는 은행나무가 등장한다.

 

'예쁘게 물들었던 은행나무 잎이/ 하룻밤 사이 변색되어/… 아내는 거의 종일 마당에서 서성인다/ 마당에 떨어진 은행알을 줍는다/ 그 독한 냄새에도/ 일일이 꼭지까지 따서 줍는다/ 은행을 줍는 일이 아내의 일이고/ 그런 아내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오사카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들을 가르쳤다. 자녀가 생긴 뒤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고, 서대문중(현재 한양중), 연희여중, 불광중 등에서 33년간 교사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했다. 조 할아버지는 올해로 23년째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그동안/ 몇 번이고/ 가진 것 모두를/ 자식들에게 넘겨줄까말까 생각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뒤돌아볼 것들이 많아서다/…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가진 것 전부를 넘겨준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를 지탱해주는 힘/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살아있음의 증거' 중에서)

 

그가 속한 '85세 이상' 고령 인구는 현재 43만6000여명이다. 불과 2년 만에 7만6000여명이 늘었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는 시집의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꽃피는 내년 봄날을 기다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다만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지금도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양새가

 

초라하고 불쌍하다.

 

생기 없는 얼굴.

 

그 초라함을 덮어보고자 머리에 염색을 한다.

 

하지만 모양새가 아니라 몸이 이미 망가지고 있다.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가는 길,

 

어지러워 가드레일을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탓하겠는가.

 

무상(無常)한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젠 어디를 가나 늙은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나 어린 사람들이 상대해 주지 않는다.

 

병원에 가도 으레 노인은 그런 정도 아픈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늙은 할아버지,

 

인간사회에서 조금씩 소외되고 떨어져 나가고 있다.

 

고함이라도 쳐서 저항하고 싶다.

 

인기기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