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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과 현대문화

인성과 현대문화 제 6강: 예절의 의미와 필요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8. 18:04

 

인성과 현대문화 제 6강: 예절의 의미와 필요성

 

 

 

문제 :평등사회에서 예절이 필요한가?

 

 

1. 예禮의 의미 ⇒ 東方禮義之國

●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 : 공경 恭敬과 겸허 謙虛

 

2. 예절 禮節의 의미

● 일정한 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하여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생활규범

● 경장애유 警長愛幼: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함.

3. 예절의 두 가지 측면

● 개인예절( 자기관리의 측면)과 대인 예절(사회규범)

 

4. 위계질서와 위치

● 위계位階: 사회생활에서 높고 낮음, 선후, 많고 적음, 강약의 차례.

● 朝政 某加爵 조정 모가작: 벼슬의 상하

● 鄕堂 某加齒 향당 모가치: 일반사회에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

● 輔世長民 某加德: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위하는 덕망의 높고 낮음

5. 구사 九思와 구용 九容 : 소학과 이율곡의 擊蒙要訣(1578년)

● 구사 九思

1. 視 思明: 눈으로 볼 때는 밝고 바르고 옳게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2. 聽 思聰: 귀로 들을 때는 그 소리의 참 뜻을 밝게 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3. 色 思溫: 표정을 지을 때는 온화하게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4. 貌 思恭: 몸가짐, 옷차림은 공손해야겠디고 생각한다.

5. 言 思忠: 말 할 때는 참되고 거짓없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6. 事 思敬: 어른을 섬길 때는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한다.

7. 疑 思問: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물어서 완전히 알겠다고 생각한다.

8. 忿 思難: 분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어려움에 이르지 않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9. 見得 思義: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보면 그것이 정당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 구용 九容

1.足容 重 (족용중):

 

발을 옮겨 걸을 때는 무겁게 한다. 그러나 어른의 앞을 지날 때나 어른의 명령을 따를 때는 민첩하게 한다.

 

 

2.手 容恭(수용공)

손을 필요없이 놀리지 않으며 일이 없을 때는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拱手한다

 

3.目容 端(목용단)

눈은 단정하고 곱게 떠서 지긋이 정면을 보아야 한다. 치뜨거나 곁눈질 하지 않는다.

 

4.口容止(구용지)

 

입은 조용히 다물어야 한다. 입을 헤벌리거나 껌을 씹거나 하면 교양있는 입모습이 아니다.

 

5.聲容靜(성용정)

 

말소리는 항상 나직하고 조용해서 시끄럽게나 수선스럽게 하지 않는다.

 

6.頭容直(두용직)

 

머리는 곧고 바르게 가져 의젓한 자세를 지킨다. 머리가 흔들리면 자세가 흩트러진다.

 

7.氣容肅(기용숙)

 

호흡을 조용히 하고 안색을 평온히 해서 기상을 엄숙히 한다.

 

8.立容德(입용덕)

 

서 있는 모습은 그윽하고 덕성이 있어야한다. 기대거나 비뚤어진 자세는 덕이 없어 보인다.

 

9.色容莊(색용장)

 

얼굴은 항상 명랑하고 씩씩하고 생기있게 한다. 씩씩한 안색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제 6강 참고자료

  6. 송호근 칼럼/ 제사를 회상함

  [중앙일보] 입력 2013.02.12 00:25 / 수정 2013.02.12 06:47

 

사회학설을 잘 쇠셨는지, 오랜만에 친인척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기억을 갖고 돌아오셨을 터, 이참에 오백 년 전통에 항거한 무용담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필자가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조상도 모르는 놈!’이 된 사연을 말이다. 부친은 이 말을 달고 사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과 자웅을 겨루느라 제례를 과도하게 발전시킨 영주(榮州) 출신이라 더욱 그랬다. 부친은 호를 아예 효응(孝應)이라 지으셨다. 효로 조상 은덕에 응하면서 사시는 신조는 탓할 바 아니나 그 실행 의무가 베이비부머인 장남에게 온통 실린다는 게 문제였다. 유교 문화의 막내 세대, 그것도 충효사상에 세뇌된 베이비부머에게 부모의 신념과 조상숭배는 종교였다. 그러니 종교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면 불화다. 오십 줄까지 효응 선생의 신조에 착실히 응하던 중 불경스러운 회의가 들었다. 이 많은 음식, 투여한 노동, 친인척의 출석, 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허망함은 도대체 뭐지? 제사 후 느긋하게 음복하시던 효응 선생의 표정과는 달리 장남의 지식창고에는 반란이 싹텄던 거다. 반란은 곧 기획연구로 이어졌는데 제례를 창안한 조선 유교의 비밀을 기어이 밝혀냈다. 그것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실행 방식이었다.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경복궁 좌측에 종묘를 지어 조상숭배의 기초를 마련하고,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곡식신과 토지신에 길운과 풍년을 빌었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설 제사를 정중하게 지낸 후 필자는 연구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유교가 종교 기능을 벌써 상실했고, 한말(韓末)을 기준으로 친가, 외가, 처가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분명하므로 이제 제사는 무용하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소멸됐음을 부가했다. 주자학 선조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백리 안에서 사셨던 효응 선생의 표정은 곧 험악해졌고, 베이비부머의 반란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그 최후통첩에 결국 무릎을 꿇는 게 오륜(五倫)의 도리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만 베이비부머의 합리성을 발동하고야 말았다. ‘저의 앎과 지식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세대 간 전선에는 화염이 인다. “조상도 모르는 놈들!” 철저한 사전 모의에도 불구하고 이 호통 하나로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성곽으로 투항했고, 장남에게도 얼른 항복하라는 묵언의 신호를 보냈다. 필자는 제사 간소화론으로 타협에 나섰지만 효응 선생은 분노에 치를 떨며 노구를 끌고 귀가했다. 협상은 깨졌다.

 

필자는 연구결과를 칼럼에 썼다. 며칠이 지나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동 태생의 70대, 명문대 출신 공무원이었다고 밝힌 노신사의 질문은 이랬다. “사실 나도 제사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역사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경로를 말했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했다.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투항했다. “나도 그렇게 할랍니다!”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결렬된 협상의 작은 전리품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한 평화다. 그러니 ‘조상도 모르는 놈!’을 되뇌고 계실 효응 선생이 걸린다. 설은 잘 쇠셨는지, 일가 친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갖고 돌아오셨는지, 귀성객들이 보낸 고향의 설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