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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바치는 詩人의 노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7. 29. 00:03

 

아버지에게 바치는 詩人의 노래

• 박해현 논설위원 hhpark@chosun.com

      조선일보 입력 : 2011.07.28 22:27

"한평생 밭만 일군 아버지 닮지 않겠다 다짐한 시인그 아버지가 떠나고 나니

무심코 거울을 볼 때마다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무덤가에 詩 스무 편을 바치니 어느덧 날이 저문다

 

 "'바닷물이 수챗구멍으로 역류하곤 했다/ 장마철이면 수문통 사람들은/ 연어처럼 싱싱한 종아리를 걷고/ 무릎까지 올라온 바닷물을 따라/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검은 바닷물에서 악취가 났지만/ 그것은 그들의 냄새였다'.인천 수문통(水門通)에서 성장기를 보낸 박형준 시인은 연작시 '수문통'을 써왔다. 수문통은 제물포항(港)의 서북쪽 만석동에서 북쪽의 송림동까지 이어진 해안가 저지대였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문이 있어서 '수문통'이라고 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해산물과 생필품을 실어나르는 쪽배가 다녔다. 1980년대 말 도로로 복개되기 전까진 갯벌을 따라 갈대가 무성한 곳이었다. 그곳에 6·25전쟁 때 피란민이 몰려와 판자촌이 들어섰다. 폭우가 쏟아지면 수문통 사람들은 하수구로 역류한 바닷물을 허겁지겁 퍼내야 했다.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쏟아진 날 박형준 시인을 만났더니 수문통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들려줬다. 그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장마철 새벽에 눈을 뜨니 부엌이 물바다가 됐다. 바닷물과 함께 생선도 하수구에서 올라왔다. 공장에서 야근하고 돌아온 누이가 넘실대는 물을 퍼내기 바빴다. '그 사이 바다는 꾸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멀리 사라진다/ 그런 날엔 아침의 연탄불을 바라본다/ 다 타버린 불꽃이/ 하수구의 먼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환상, 나는 누이의 가슴에 머리를 묻는다'.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은 박형준 시인은 최근 다섯 번째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를 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을 잇달아 수상한 그는 '가난한 삶에서 분출된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란 평을 받아왔다.

 

 박형준의 시는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사물의 결을 따라가면서 삶의 내밀한 풍경을 형상화하기에 곱고 산뜻하다.박형준은 전북 정읍에서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2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가 작은 아버지는 평생 밭만 일궜다. 한글도 깨우치지 못한 채 흙과 씨름했다. 형과 누나들은 "아버지처럼 살진 않겠다"며 도시로 돈을 벌러 갔다. 어린 형준은 철길에 떨어진 껌 종이 향내를 맡으면서 도시 냄새를 상상했다. 열두 살에 인천으로 올라온 그는 수문통에서 공장을 다니던 형·누나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동경했던 그는 달동네의 비루한 삶을 처음 접하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문학을 통해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날 출구를 찾았다. 1980년대 후반 제물포고에 진학한 뒤 문예반에 들어갔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우울한 그의 영혼을 어루만져 줬다.박형준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춤'을 낼 무렵 부친상을 당했다. 그는 아버지가 누운 관에 자기 시집을 넣어드렸다. '아버지의 손가락/ 드나들던, 채소밭/ 밭흙을 몇줌 그 위로 뿌려주었다'.

 

시인은 어릴 때 결코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존재의 거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어머니를 기리는 시는 몇 편 썼지만 아버지에 대해선 무심했던 그는 아버지를 추억하며 스무 편이 넘는 시를 썼다. 이번에 펴낸 시집의 제1부는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다.시인이 반(半)지하 방에 살 때 아버지는 쌀을 등에 지고 찾아왔다. '비좁은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아들을 위해/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돌아앉아' 계셨던 아버지였다. 시인은 '글씨 그만 쓰고 밥 먹거라/ 방해될까 봐 돌아앉지 못하고/ 내 등을 향한 듯한 그 사무치던 음성'을 그리워한다. 시인은 '어린 시절 머리맡에 놓인/ 밀가루떡 한 조각/ 동구의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점심 무렵 돌아와/ 막내를 위해 만들어주던 밀가루떡'을 다시 먹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의 머리맡에 슬며시 밀어넣을 시 한 편을 써봤으면 한다.시인은 아버지 무덤가에 핀 붉은 꽃을 꺾는다. '죽어서도 당신은 붉디붉은 잇몸으로 나를 먹여살린다/ 석산꽃 하염없이 꺾는다/ 꽃다발을 만들어주려고/ 꽃이 된 당신을 만나려고'란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뜨면 밭 곁에 묻힌다. 밥그릇을 닮은 봉분 사이에서 농부들은 밥을 만든다.

 

시인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고향 마을에 갈 때마다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본다고 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비루한 현실을 살더라도 시인은 밝게 빛나는 은하수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지금 은하수 어디쯤을 건너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