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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사진적 기억의 문학적 재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7. 14. 20:27

사진적 기억의 문학적 재현

오강석

■TV드라마와 기억 상실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TV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 있었을 것이다. 키워드는 ‘기억상실’이다. 한국의 TV드라마에서 기억상실증은 이제 하나의 트랜드trend가 되어버린 듯하다. 드라마 작가나 제작진들이 매스컴의 ‘막장드라마’라는 질타를 받으면서도 기억상실증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청률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다는 얘기다.

기억은 그 사람의 역사다. 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는 것을 조상에게 물려받은 ‘집단 무의식’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의 시청자들이 ‘기억상실 막장드라마’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고단한 삶을 살아오면서 가슴 깊숙이 쟁여놓은 잊고 싶은 기억에 대한 ‘집단 무의식’의 발현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억 회로가 컴퓨터 주기억장치와 다른 점은 자정 기능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두뇌는 인지한 결과를 그대로 저장하기도 하고, 입맛에 맞게 수정 가공하여 저장하기도 한다. 또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한 기억은 폐기(망각)하거나 ‘은폐 기억’의 형태로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한다. 차이는 의도적 재생이 가능한가 여부이다. 하버드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진정한 위대함은 잊는 데 있다.”고 규정했다. 잊고 싶은 기억, 잊어도 좋은 기억을 골라서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자율신경의 산물인 기억은 의식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몸이 지우고 싶어 하는 기억을 남겨두기도 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을 지워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기억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도 있다. TV드라마 ‘아이리스’에서 707특임대원 김현준은 소주병에 슬쩍 눈길을 준 것만으로 라벨에 찍힌 소비자상담실 전화번호와 바코드 숫자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NASA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던 킴 피크는 미국 전역의 전화번호를 달달 외우고, 영국의 스티븐 월트셔는 37분간 도쿄 상공에서 시내를 내려다 본 뒤 10미터나 되는 캔버스에 빌딩과 도로, 유리창의 수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인간카메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정도의 기억력은 의학적으로는 망각 회로의 손상으로 인한 일종의 정신장애로서 ‘서번트증후군savant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경우 기억의 문제는 과도한 망각에서 발생한다. 현대인들은 기억의 상당부분을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많이 이용되는 컴퓨터 주기억장치는 200나노초(2000억분의 1초)로 작동하지만 휴대하기에는 부피가 너무 크기 때문에 휴대용 기억장치로는 PDA가 많이 이용된다. 그 결과 생활정보를 저장해놓은 컴퓨터의 기억이 지워지거나 PDA를 잃어버리면 통장 비밀번호나 인터넷 ID 심지어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디지털치매’가 발생한다. 수험생의 전유물이었던 기억력이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기억력과 뇌과학 서적들이 봇물처럼 출간되고, 기억력이 좋아지는 음식이나 음악이 매스컴에 연일 소개되는가 하면 ‘재혼은 기억력 부족’이라는 노랫말(양혜승 <화려한 싱글>)이 인기를 끌고, 사진 기억을 가공한 사진집이나 조리개를 한껏 조여 기억의 날줄과 씨줄을 풀어낸 소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나』,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들이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 있기도 하다. 이제 기억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중요한 생존 수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일생동안 두뇌 기능의 10%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이 노년에 그 10%를 지키기 위해 세계 명산의 이름을 외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귀감이 될 만하다.

■사진적 기억과 문학적 기억

기억이 없이는 감동도 없다. 기억은 모든 예술적 창작과 감상의 원인이며 전제이다. 예술작품의 창조는 상상력의 결과이며 그것은 작가의 기억을 근간으로 한다. 워즈우스의 “창의적 과정의 원류는 평정한 상태에서 되불러 온 기억 활동에서 생긴다.”는 말처럼 기억은 작가의 감정과 정서를 구성하는 근본 구조이며, 축적된 체험의 여과를 거쳐 발현하는 고유하고 내밀한 인식이다. 인식에서 발원하여 정서적 변화로 종결되는 감상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용자의 기억이라는 필터의 여과를 거치게 된다. 따라서 같은 작품이라도 수용자가 속한 문화권, 교육, 연령 등에 따라 인식과 반응의 결과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작가와 수용자가 기억을 공유하는 체험의 광장이며 과정인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카메라 회사의 광고 카피는 사진의 아카이브archive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2000분의 1초에 총체적 기록이 완성되는 사진에 필적하는 기억회로는 없다. 모든 사진은 일차적으로 피사체의 외연denotation으로 읽힌다. 그러나 두터운 외피를 뚫고 들어가면 유리처럼 투명하거나 또는 상형문자처럼 난해한 실체에 도달하게 된다. 독자의 기억은 그 속에서 사진의 내재적 의미구조를 증폭시키고, 무성생식시키며 진화한다. 사진은 시선의 기억이며 죽어버린 과거의 현재다. 사진 읽기는 선행된 사진 행위(촬영)의 인덱스를 출발점으로 하는 의미론적 분석이며, 사진이 구성하고 있는 ‘순간’에서 ‘현재’를 인식하는 작업인 것이다.

기억을 수정 가공하여 입출력시키는 것은 ‘문학적 기억’의 영역이다. 문학적 기억은 주제 중심적이며, 글쓰기로 변모하는 상상력의 원천이다. 사진의 경우도 조리개 심도를 조절하여 주제에 포커스를 맞추고 배경을 흐리게 처리할 수 있다. 조리개를 조이면 전체 화상이 또렷해지고 많이 열수록 심도深度는 얕아진다. 투르니에는 이에 대해 “주인공 중심으로 묘사하는 스탕달은 조리개를 3.5로 개방하고, 배경과 일화 등을 상세히 소개하는 발자크는 조리개를 16으로 조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진적 기억은 필연적으로 단편적, 평면적일 수밖에 없으며, 기억을 역사적, 관념적 코드로 저장 인출하느냐, 정서적, 문화적 코드로 저장 인출하느냐 하는 점에서 사진적 기억과 문학적 기억은 근본적 차이를 노정한다. 변학수는 「문학적 기억의 탄생」에서 “문학(창작)이란 기억의 왜곡 작용에 불과하다. (…) 그러나 아무리 왜곡해도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또한 기억이다.”고 말한다. 문학(창작)은 남길 기억을 선택하고 그 방법을 결정하는 작업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국무총리인사청문회를 역사적 코드로 기억하는 것은 사진적 기억이며, 위장전입을 옹호하는 국회의원의 발언을 정서적 코드로 기억하는 것은 문학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준은 입출력의 경우 동일하게 적용된다.

■기억의 지문指紋 데자뷰

“와본 적이 있는 곳이야.”

은희경의 장편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의 준은 중얼거린다.

은희경이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 처음 가는 길인데 언젠가 와 봤던 곳 같고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딘지 낯이 익고,(…)”라는 기시감旣視感을 데자뷰Deja vu라고 한다. 데자뷰는 코드화되지 않은 기억의 무의도적 인출이거나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 이는 플로랑스 아르노가 규명한 현상으로 에밀 보아락이 ‘이미 보았다’는 뜻의 프랑스어인 데자뷰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과거에는 데자뷰 현상이 충족 불가능한 바램의 구현이거나 신체조절기능의 저하로 발생했다면 현대에는 이와 무관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끔 경험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빈번하게 발생한다.

기시감의 확산은 감동 결핍을 초래하며 그 발생 원인은 상당부분 사진에서 연유한다. 현대인들은 사진, TV, 영화 등을 통해 매 순간 수많은 이미지(광의의 사진)를 접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크고 작은 충격으로 뇌리에 각인되거나 또는 무의식의 창고에 쌓이게 된다. 기시감은 무의식의 창고에 쌓여있는 수많은 이미지들 또는 그것들이 분열하고 연합하며 만들어낸 파생 이미지의 발현이다. 문제는 기시감이 작품에 대한 수용자의 감동을 심각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거나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감동은 감소되기 마련이다. 소설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개발하려고 노력하지만 독자는 웬만한 이야기에는 기대한 만큼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소재가 사람의 혓바닥으로 요리를 하는(조경란 「혀」) 등 엽기적이 되어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데자뷰는 예술계 전반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표절 시비와도 무관하지 않다. 의도적인 표절은 논외로 하고, 작가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표절이 되어버린 현상은 승용차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만큼이나 난해하다. 태초의 ‘말씀’ 이후로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었다. 작가의 뇌리에 각인된 은폐 기억이 우연한 기회에 무의도적으로 인출된 데자뷰의 흔적이라면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축적된 정보량이 증대되고 유사한 기억이 점증하면서 데자뷰 체험 빈도가 급속히 늘고 있으며 이는 장르를 망라한 현대 예술 전반이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기억의 퓨전화와 멀티 작가

시각예술의 전위인 회화의 역사는 인류의 탄생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그러나 회화가 예술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르네상스의 발원으로 종교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부터이다. 동양의 문인화에서는 그림이 시의 보조기능 쯤으로 치부되었고, 서양에서는 회화가 대상의 ‘복제물’이며 문학에 비해 열등한 표현 양식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천재가 출현하여 “영혼의 창인 눈으로 감상하는 회화가 귀로 듣는 문학보다 더 우수하다.”고 증언하기까지 회화는 문학으로부터 참담한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다. 르네상스 이후 위상을 확고히 한 회화는 사진의 예술계 입문 초기 호된 시어머니가 되어 사진은 대상의 ‘복제물’이며, ‘촉각적 가치’가 없다고 구박했다. 그런 류의 논란은 191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시각매체의 급속한 발전과 아방가르드의 다양한 실험의 결과 벤야민이 「사진의 작은 역사에 관하여」에서 주장한 ‘사진은 인류의 기억능력과 시각체험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매체’라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 이후 사진은 20세기를 관통하며 사회 전반에 급속히 보급되었고, 이는 사진과 회화와 문학이 도전과 구축의 불화 관계를 청산하고 보완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세기 말에 도래한 디지털시대는 장르를 붕괴시키는 표현양식의 통합과 해체 작업 즉, 문자와 이미지를 ‘오려내고 복사하고 짜깁기’한 결과물인 퓨전 예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탄생시켰다.

사진과 문학은 상상력과 사고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매우 가까운 장르이며, 사진은 원초적 멀티예술인 시와는 일찍부터 교분을 쌓아왔다. ‘시가 사진을 텍스트의 삽화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평을 받은 브레히트의 사진 에피그람epigram 「전쟁교본」은 그 효시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역사 기록 사진에 시를 접목시킨 이승하 시인의 「폭력과 광기의 나날」이 그것이다. 이후 자신이 찍은 포트레이트 사진과 시를 결합하여 사진을 시어詩語로 구사한 신현림 시인의 「세기말 블루스」, 구본창의 사진에 신경숙의 에세이를 접목시킨 「자거라, 네 슬픔아」, 윤대녕의 소설과 조선희의 사진을 병치시킨 사진 소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전경린의 소설에 계동수의 사진을 덧붙인 「첫사랑」 등이 출간되었다. 특히 박청호의 소설과 김지양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라푼젤의 두 번째 물고기」는 동일 소재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치한 새로운 담론 형태를 모색하려는 시도이며 기억을 퓨전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힌다.

최근 문학계에서 활발히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접근 방식은 퓨전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퓨전은 화학적 결합으로 시너지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보여주는 문학’, ‘말하는 사진’의 형태로 나타나는 문자 개념의 혁명적 변화다. 이는 기존의 언어관습과 전통적 의미작용의 파괴를 전제하는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의미한다. 축적된 실패의 체험만이 그 성공을 담보할 것이다. 아직은 실험 단계인 퓨전 예술에 대한 기대와 우려 속에 장르의 벽을 넘어 총체적 표현 수단을 활용하려는 실험이 부단히 시도되고 있다.

■기억의 복원

2008년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의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는 ‘화재 전 모습대로의 복구’라는 대전제에 따라 기존 자재를 최대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숭례문이 새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사라진 부분을 매우고 있는 것은 유사성일 뿐 진정한 의미의 ‘복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25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4년여가 소요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복원된 숭례문이 예전의 숭례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빨리 공사를 마치고 아름답고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사진적 기억과 문학적 기억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적 기억이 죽음으로부터의 재생이라면 문학적 기억은 가공된 회상이다. 숭례문 복원 공사장은 죽어버린 기억이 탄생하는 기억과 다차원적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상호교류하고 생성 변화하는 현장이다. 복원된 숭례문을 보며 우리는 사진적 기억의 문학적 재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오강석 /

194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신문사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며, 200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여행기 『아! 사하라』, 『다시 가 본 베트남』 등이 있으며 현재 인스쿨갤러리 학예담당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