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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의 전망과 반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2. 12. 19:56

 

한국시의 전망과 반성

ㅡ 오세영,최동호,김재홍 문학평론가와의 대담 (신년대담)

 

시인/작가 : 김재홍 (문학평론가,경희대교수)

 

참석자:오세영(서울대 교수, 시인, 본지 주간)

최동호(고려대 교수, 평론가, 시인)

김재홍(경희대 교수, 평론가ㅡ사회)

일 시:1999년 1월 7일 오후 3시

장 소:시와시학사 회의실

 

김재홍:신년을 맞이해서 두 분 선생님들을 모시고 1990년대 우리 시단이 어떠했으며, 특히 지난해 시단이 어떠했고 그것을 화두삼아 앞으로 전망이랄까, 내년이면 또 2000년대가 되는데 이런저런 시단에 관한 전망을 말씀 나눠보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세영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오세영:방학 중이라 한동안 바쁜 일은 끝내고 새해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재홍:네, 최동호 선생님은 어떠세요?

 

최동호:네, 저도 역시 학교에 있으니까, 입시문제 등등 해서 바빴고요, 또 한 가지는 20세기를 마감하는 해가 됐는데 뭔가 멍한 느낌도 있고 지나간 세기와 새로운 세기 사이에서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김:신년 좋은 계획 세우신 것 있으세요?

 

최:저로서는 시를 좀더 열심히 써 봐야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요.

 

오:시인이라면 꾸준히 시를 쓰고 좋은 시를 써야겠지요. 최 교수와 같은 생각입니다.

 

김:시인이시면서 평론가이시고, 또 시 교육자이자 문학사가신데 비중 있는 오늘 대담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를 쓰시면서 우리 시단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시는 두 분이기에 우리 시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시단은 어떻습니까? 우리 시단의 정황, 이런 것들을 말씀 나눴으면 좋겠는데요. 일반적인 시작 태도랄까, 최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많이 읽고 있지는 못하고 제가 읽은 범위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종전에 저희들은 시쓰는 것이 상당히 무겁고 비장하고 사명감에 가득차고 당위적인 주장을 많이 했는데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우리 시들은 상당히 좀 가벼워졌다고 할까요, 경쾌해졌다고 할까요, 사회적인 중압감이나 사명감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 거죠. 그 대신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시가 경박해졌다,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시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런 비판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정말 시가 시적인 것을 되찾고 시를 즐길 수 있는 시점에 놓여진 것이 아니냐, 무슨 혁명가나 지사나 서구적인 모던보이를 흉내내는 감각적인 것들을 떨쳐버리고 정말 자기적인 것, 개성적인 것, 주체적인 시를 쓸 수 있는 분위기는 충분히 형성이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오:네, 저도 최 교수님과 같은 생각인데요. 요즘 특히 젊은 세대의 시들이 뭐라고 할까, 코믹하다고 할까, 가볍다고 할까 이런 경향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 세대가 시를 쓸 때만 해도 시에서 무슨 감동을 바라기도 하고 감동된 것을 썼는데 요즘 젊은 시인들은 감동보다도 재미같은 것을 시로 쓰지 않나 싶습니다. 젊은 시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재미있는 시다?라는 말은 자주하지만 ?감동을 준다?는 말은 별로 들어본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어떤 토픽이랄까,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 개인적인 사소한 체험, 이런 것들을 쓰기 때문에 시가 가지고 있는 공적 기능이랄까, 이런 것이 많이 사라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컨대 시라는 예술 자체가 어떤 엄숙성이랄까, 초월성이랄까 하는 것들을 상실하고 좋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유희적인 차원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이런 느낌을 갖게 되지요.

 

김:두 분 말씀을 듣다 보니까 90년대 시단이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긍적적인 측면이라고 할 것 같으면 7, 80년대 우리 시를 지배하던 거대 담론, 사회학적 상상력이랄까 정치적 상상력이 차츰 극복되어 간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는 긍적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러면서 유희적인 차원, 유행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 언어유희랄까 이런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라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올해가 99년이 아닙니까? 세기말에 이르렀는데 뭔가 새로운 질서, 갈등과 혼란을 넘어서서 2000년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우리 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잘못된 부분은 성찰하고 미흡한 부분은 보완해야 하겠지요. 아까도 우리 시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씀드린 셈인데 여기 덧붙인다면 요즘의 우리 시는 문학적 완결성이랄까 형상성 같은 것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심지어는 아무 것이나 느끼는 것을 쓰면 시가 된다는 태도로 시작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요. 이렇게 된 현상에는 나름의 이유들도 있을 것입니다. 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7, 80년대를 주도했던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빈 광장에 내던져진 것과 같은 허무감이랄까 허탈감에 사로잡힌 시인의 정신적 방황 같은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고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방황과 정신적 고뇌를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러한 경향 중에서도 부정적인 측면들이 행했다는 사실이지요. 지적 허무주의나 분열된 자아의식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 극복을 통해서 새롭고 가치 있는 인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한 관점에서 저간의 우리 시가 그와 같은 방향성을 띠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김:네,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것, 다시 말하면 시적인 진지성․순수한 열정, 이런 것들이 좀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고, 더 나아가서 시의 기본이랄까 하는 것이 부족한 아쉬운 점도 발견됩니다. 시라는 것이 최소한의 가치덕목 같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상실되어가는, 그럼으로써 시 자체가 상실될 위기감마저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말씀으로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최 선생님 어떠세요?

 

최:그 부분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도 해보고 했는데, 시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이제는 오히려 너무나 많은 자유가 표면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억압이 있을 때는 그 억압을 이기기 위해서 긴장의 강도가 오는데 예를 들면 식민지 시대, 독재정권과 같은 이런 외적인 억압이 지금은 없어졌거든요. 이런 억압이 없어진 시대의 방만한 분위기, 그것에 편승하는 일종의 해방감, 긴장이 상실되면서 더 좋은 작품이 나와야 하는데, 외적 긴장의 상실과 더불어 자신의 시적인 긴장마저도 해체하고 그냥 자유롭게 쓰면 되는 것이다, 뭐 이렇게 생각하고 쓰는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작품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음미하고 탐구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그때그때 느끼는 대로 쓰면 시가 되고 내뱉으면 뭐가 된다라는 듯한 분위기가 시단의 일부에 확산되어 있는데 이것은 특히 젊은 시인들 또는 시인을 지망하는 시인 지망생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어요. 그래서 이것이 정말로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 오히려 장애요인이 되는 그런 경향마저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조지훈 선생 같은 분은 「승무」 한 편을 쓰기 위하여 일 년 이상 고민하고 찾아가 보고 고치고 고뇌하여 한 편의 작품을 탄생시키지 않았습니까? 요새는 생각나는대로 쓰면 하룻밤에도 수십 편을 쓸 수 있다. 이렇게 큰소리치는 사람을 만날 때, 본인은 자신의 천재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종전에 시를 너무 무겁게 생각했다면 요새는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느낌입니다. 마치 휴지조각에 낙서하듯이 하는 것을 시라고 하고 그것이 마치 진실한 것처럼 얘기되는 분위기 이런 것들은 새해를 맞이해서 일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요즘 시단에 일종의 정신적인 거품이나 공백, 공황의 조짐이 엿보인다는 뜻도 되겠군요. 어떻게 보면 미학적 긴장 또는 시적 위의의 상실 시대다 이렇게 보여진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점에서 두 분 말씀이 참다운 시정신보다는 시의 산문화랄까, 산문적인 수준으로 떨어져버리는, 미적 긴장, 정신적인 압축․응결 이런 과정이 없이 일회용 시, 소비적인 시 행태 이런 것들이 상당히 만연한다 이렇게 제게는 들리는군요.

 

최:좀더 따끔하게 말하자면 제대로 된 산문도 채 안 되는 걸러지지 않은 것들을 마구 남발하는 경향은 앞으로 새롭게 자기반성도 하고 자기극복도 해야만 우리 시의 저변이 좀더 토대가 굳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젊은 시인들은 역시 새로운 의식을 반영하는 세대인 까닭에 그들의 시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시인들을 보면 우려할 만한 경향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중 하나가 지나치게 센세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센세이셔널리즘이란 충격적인 인상을 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려는 행위라 할 수 있는데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품의 판매는 홍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마케팅은 센세이셔널리즘과 이에 편승한 유행의 창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가령 동일한 상품이라 하더라도 홍보 전략에 따라 그 매출이 달라지고 또 같은 상품이라도 그 포장이나 디자인이나 모델의 혁신 여하에 따라 대중의 구매력에 대한 자극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상품의 홍보나 디자인은 센세이셔널리즘을 고려하지 않고 성공을 거두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의식의 특징으로 ?새로움?에 대한 컴플렉스를 든 것도 자극이지요. 그리해서 유행과 한탕주의를 만들의 상품의 대량 소비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도―아마 그와 같은 자본주의 병리현상 가운데 성장해서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굚시 창작을 너무 센세이셔널리즘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아마도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처럼 시라는 상품에 독자라는 구매력을 자극하려는 의도이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상품은 일시적인 효용성을 충족시키면 그만이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는 일회용 상품이 아니며 시인은 유행이나 일시적인 시선 끌기로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무명의 신인으로서 일단 시선을 끈 것만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할지는 모릅니다만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부담이 있지요. 문학 나아가 삶의 오염에 대한 도덕적 책임, 깨어 있는 비평으로부터 사게 되는 혐오, 문학사적 평가 등이 그것입니다.

 

김:네, 시작 태도랄까, 전반적인 경향을 말씀하다 보니까 문제점까지 다 짚어주시는 것 같은데 요즘 시작의 두드러진 경향성이 있습니까?

 

오:경향성이란 것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하겠습니다. 시류를 좇는 시인들은 아마도 그것을 경향이라 하는 것 같은데 예컨대 우리 시단에서 소위 ?해체시?라 부르는 그러한 경향입니다. 혹자는 이를 포스트 모더니즘시라고 합니다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한 경향의 시라고 해야겠지요. 이러한 경향이 분명 우리 문단에 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은 이들이 지나치게 시류를 추수하며 의미 있는 문학 운동이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는 그 대부분이 문학적 형상화 이전의 단계를 날 소재로 표출하고 있지요, 둘째는 문학적 건강성이 상실되어 과연 그것이 인간 발전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되고, 셋째는 모두 국화빵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획일적인 것이어서 개성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서구 문학 사조를 그것이 발생한 사회 문화적 콘텍스트를 무시한 채 그것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과장되게 모방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들은 새롭고 실험적인 정신으로 전통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겠으나 제가 보기에 그것은 실험과도 거리가 멉니다. 첫째 엄밀히 말하면 서구의 경향을 모방한 것이지요.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오늘의 우리는 다국적 자본주의의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는데 지금 우리 시단에서 유행하고 있는 소위 ?해체시?라는 것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세계 무대에 내보인다 합니다. 그 누가 그것을 실험적이라고 하겠습니까. 마치 원숭이의 흉내나 진배 없겠지요. 둘째 국내 시단에서도 획일적인 국화빵 찍기의 시를 쓰고 있으니 이 역시 부화뇌동에 다름이 아니지요.

 

김:최 선생님은 어떠세요?

 

최:시작의 경향이랄까, 이런 것을 원론적으로 얘기하자면 크게 종전의 어떤 담론들에 의해서 지배되던 중심권의 상실 그래서 널리 확산되는 시단의 분포도가 몇몇 유명한 시인들이나 몇 개의 그룹으로 말할 수 없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을 몇 명의 시인이나 몇 개의 유파로 말할 수 없는 시단의 확산화 경향 같은 것을 들 수 있겠지요. 이런 경향들 속에서 자기 길을 찾는 데 있어서 방황과 혼돈이 있지 않느냐. 차라리 그 이전에 20년 30년 시를 써 온 중견 원로 시인들은 나름대로 길을 가고 있는데 젊은 세대들의 경우 이것도 모방해 보고 저것도 모방해 보고 이것을 추종해 보고 저것도 해보고 마치 자기 트레이닝을 하면서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이런 경향은 어느 시대든지 젊은 시인들이 경험하고 극복해야 할 그런 단계입니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세기말적인 것과 더불어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져 보이고 또 이것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데 패러다임의 대안으로서 마치 해체시가 나온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대안은 되지 못하고 어떤 하나의 현상이나 표피적인 양상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증일 뿐이고 그러니까 젊은 시인들은 나름대로 이렇게 시인으로 길을 가겠다 나는 정말 이런 시를 쓰면서 내 일생을 시인으로서 나의 이름을 성숙시키겠다 이러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오세영 선생님의 말씀처럼 센세이셔널한 것,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 때문에 시가 심화되지 못하고 재미있는 것 더 나쁘게 말하면 일시적인 것, 개그적인 것, 그때 들으면 기발하고 좋아 보이지만 지나가면 뭐가 뭔지 생각이 안 나는 시들, 우리 현대시사를 보면 그 나름의 세계가 있으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음미하고 낭독하고 읊조리면서도 그 자체가 생명력이 있는 시들 아닙니까? 김재홍 선생님 말씀처럼 일회용 반창고 같이 또는 일회용 휴지 같이 버려지는 시들, 최근에 신인 심사나 이런 것을 해보면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투고량이 무척 많아졌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5편 내외라 하면 50편, 100편 이렇게 내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많은 양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의, 시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정말 긴축된 시, 정말 공이 들어간 시, 정말 되풀이해서 읽을 수 있는 시들이 나와져야만 우리 시단이 좀더 다져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좋은 말씀이네요. 두 분 역시 우리 시단과 평론계의 중진이면서 대학에서 시를 연구하고 가르치시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제가 보기에도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런 서구적인 경향을 피상적으로 추수하는 모방에 관한 잘못된 풍조, 획일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행적인 모습, 독창성이나 다양성, 개성을 찾지 못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또 하나는 모색과 혼돈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 아니냐 그런 점에서 시가 말초화하는 경향, 파편적이고 소비재화하는 경향, 일시적인 센세이셔널을 추구하는 부박하고 경박한 경향성이 요즘 두드러지는 한 모습이다 이런 말씀이 될 것 같군요. 전반적인 우리 시의 문제점, 우리 시단의 문제점을 진단해 주셨는데요, 그럼 좀더 구체적인 얘기를 나눠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시단에서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든가, 작품 같은 것, 이런 것에 관해서 말씀을 나눠봤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우선 원로 중진분들 가운데는 어떤 분들의 작업이랄까, 정진하는 모습이 보입니까?

 

최:제가 보기에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80 소년 떠돌이의 시』를 비롯한 시편들, 또 김춘수 선생, 김종길 선생 이런 분들이 계속해서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고 신경림 선생 같은 분도 좋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좀 내려와서는 중견시인으로서 이 자리에 계신 오세영 선생이나 황동규, 정현종 이런 분들도 계속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젊은 시인들 쪽에서 보면 여류시인으로는 나희덕, 최정례 같은 시인이 지난해 좋은 작품을 보여준 것 같고, 젊은 시인들 중에는 안도현, 장석남, 이정록 같은 시인들이 자기 나름의 활동을 보여주지 않았나, 약간 그로테스크한 점에 있어서는 박정대 같은 시인도 활발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분들을 다 놓고 보자면 대체로 시의 기본적인 틀을 지켜가면서 자기 나름의 세계를 보여주는,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에서 보자면 너무나 전통적인 계열의 시인이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하겠죠. 이런 분들의 활동을 눈여겨 보는 것은 이렇게 혼돈된 시대일수록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전통이라는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고 전통적인 것을 자기의 목소리로 자기의 내면으로 심화한 사람만이 혼돈의 시대에 자기의 목소리로 자기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 그런 분들의 활동을 눈여겨봤습니다.

 

김:혼돈된 시대, 세기말의 전환기에서 자기 나름의 길찾기에 성공하고 있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뜻이 되겠군요. 오 선생님은 어떤 분들의 업적이랄까, 작업에 주목하고 계시는지요?

 

오:아까 말씀드린대로 요즘의 우리 시단, 특히 젊은 시단은 획일주의로 치닫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시를 쓰는 시인들을 평가하고 싶군요. 기성시인들은 이미 평가가 나 있고 설령 기존의 평가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굚실제에 있어 잘못 평가된 시인들이 많고 우상화된 시인들도 한 둘이 아닙니다만굚이 옹색한 지면에서 이를 거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므로 젊은 시인들에 국한하여 몇 사람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안도현, 김용택, 남진우, 고재종, 이재무, 이승하, 함민복, 장석남, 이홍섭, 권대웅, 오선홍, 복효근, 유성식, 서림, 이동백, 이문재 등이 우선 눈에 띕니다. 여류로서는 이인원, 김수영, 나희덕, 이경, 조예린, 허혜정, 최영미 등이 한 세대를 이루지 않을까 합니다.

 

김:상당히 많은 분들이 거론이 됐는데, 무엇보다도 저는 지난해 작고하신 박두진 선생님이 새삼 떠오르는군요. 지난 한평생 지조있는 시인의 길을 걸어오셨는데 갑자기 작고하셔서 안타깝습니다. 특히 제게는 『시와시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연작시 「수석영가」를 연재해서 격려해 주시기도 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현역 시인 가운데서 제가 볼 때 새삼스럽게 조병화, 김춘수 선생님, 홍윤숙, 김남조 선생님이나, 고은, 이형기, 정진규 선생님이 떠오르는군요. 특히 이형기 선생님 같은 경우에 『절벽』같은 시집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병 중에서도 절망체험 그것을 시로 표현한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해봤고요. 김광규, 정호승 시인도 활발한 느낌을 줬습니다. 또 지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송수권, 이성선, 나태주, 이기철 시인 등도 주목할 만한 것이구요. 일일이 예거할 수는 없지마는 젊은 시인 가운데도 진지하게 자기 개성을 탐구하는 분들도 많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인 징후도 없지 않지만 양심적이랄까, 진지한 열정으로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어둠 속에서도 밝음을 느낄 수 있고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단의 이런저런 얘기를 해봤는데 좀 요약해서 시단의 문제점이랄까 이런 것을 간략하게 짚어보시면 어떨까요?

 

오:비평은 시창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까닭에 우리 시단이 만일 어떤 부정적인 측면으로 가고 있다면 비평 또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겠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 비평의 문제점은, 첫째 비평가들이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어 그 집단의 문학권력에 의존하거나 그 문학권력을 유지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비평가들은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바라보거나 평가를 하지 못하고 소속된 집단의 눈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 집단이 문학을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체험한 바와 같이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우리 비평가의 상당수는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볼 수 있는 능력도 또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도도 애초부터 없지요.

둘째는 비평가로서의 소명의식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 우리 비평가들은 발표된 작품들을 제대로 읽고 비평에 임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소속된 집단의 의사에 따라 선택적으로 읽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비평의 객관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지요.

셋째는 시류에 너무 민감합니다. 대세가 그러니 뒤에서 북을 치는 형국이지요. 한마디로 작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자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최근의 한 가지 예를 보면 어느 일간지에서 해방 이후 50대 시인을 선정했는데 어찌해서 김수영 같은 시인이 그 순위에서 첫번째가 될 수 있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아마도 그 일간지의 특집 기사는 우리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비평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서…….

 

김: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적 이념이라든가 가치덕목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에꼴화가 아니라 일종의 현실적 담합 또는 섹티즘화 되는 경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오:결국은 이런 거지요. 비평가가 자신의 문학과 자신의 비평 기준에 의해서 좋은 작품을 좋다고 해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심지어는 비평가가 좋은 작품을 좋다고 해야 하는데 그 작품을 좋다고 하면 자기가 소속된 그룹에서 자기를 어떻게 대할까 하는 것조차 계산에 넣지 않으면 비평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된 것이죠.

 

김:오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저도 비평계의 말석에 있는 사람으로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드는군요. 저 자신도 그점에서 얼마나 움츠리고 눈치보아 왔는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드는군요.

 

오:죄송합니다. 두 분 비평가를 비롯해 특정인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느낌이 그렇다 그런 뜻입니다.

 

김:어떻게 보면 비평의 섹트화, 집단이기주의 경향을 지적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최 선생님은 어떠세요?

 

최:저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상호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집단화가 아니라 마치 이권단체나 권력단체 비슷한 줄세우기 이런 것들이 문제점이고 또 용기가 필요하다고 할 만큼 저희들 모두 다 용감해야 하는데 조금씩 서로 비겁하면서 조금씩 서로 타협하면서 어정쩡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그래서 우리시가 좀더 진취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것들, 두 분 얘기 중에 지난해 90년대 후반에 열심히 활동했던 분들 중에 빠졌던 분, 예를 들면 장호 선생, 최하림 씨도 좋은 시집을 냈죠. 이기철씨, 그리고 김명인, 김정란, 최문자 같은 분들도 지속적으로 활동을 했고 지방에 있는 시인으로는 속초의 최명길, 광주의 고재종 씨도 좋은 작품을 보여줬고 마산 쪽에서 박태일, 대구에 송재학, 울산에서 정일근 같은 시인이 계속 활동을 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저와 더불어 두 분 선생님이 거론하신 시인을 보면 참으로 많은 분들이 열심히 활동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에 눈에 띄지는 않았어도 그야말로 성실하게 시작에 임하시는 분들도 있었을테고요. 비판적인 부분들, 부정적인 부분들을 얘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고 우리 시단의 전체적인 총량은 역시 상당히 동적인 힘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판단됩니다.

어떤 분들은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서구에서 이미 시는 끝났다. 유독 아직 한국에서는 시가 살아있는 것 같다. 어떻든 저희들이 얘기한 부정적인 징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열심히 활동을 하고 훌륭한 활동을 했다고 거론할 수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시가 아직은 잠재적인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통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이 전통을 창조할 수 없죠. 그러나 전통을 견지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상당한 자신감이 요구됩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말 이것을 하고 싶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평론가의 경우도 그렇고 시인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것을 가진 시인만이 전통에 저항하고 새로운 전통을 찾을 수 있고 그런 것을 가진 평론가만이 용기있게 우리 시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앞길도 지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좀더 진지한 것, 좀더 진실한 것, 시류적인 유행을 추구할 것이 아니고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것을 소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평론가와 시인들이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시단도 그렇고 평단도 그렇고 정치계라든가 법, 경제계 모두 현실 쪽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지요. 조직이나 권력 등 현실법칙이 지배하는 정치권과는 달라 문학이라는 것은 진실법칙이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볼 때 시단도 그렇고 평단도 그렇고 진실법칙에 기반을 두고서 객관정신을 가지고 좀더 총체적인 시각을 확보하고 시야를 열어가는 공정성 또는 객관성이 매우 부족하다 할 겁니다. 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가 관심이 없는 또는 그 그룹에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그런 폭력적인 비평 풍토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것이 오늘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카프문학시대부터 오랫동안 이 땅에 고질병처럼 작용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현상이 7, 80년 민족문학을 거치면서 어느 면에서는 더 예각화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패거리비평, 집단이기주의비평, 권위주의적인 문단권력 형성 이런 것들이 해체되고 극복되는 데서 우리 시와 평론의 바람직한 미래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으로 집약해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오:제 생각으로 우리 비평의 이와 같은 풍토는 다른 지식인의 분야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유학 엘리트의 나쁜 유산이 알게 모르게 답습된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조선시대 유학 지식인들의 두드러진 부정적인 특징들로는 학문과 정치의 일원화, 명분과 이념에의 지향, 부화뇌동과 당파의식 등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이 모두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없는 사회구조와 그 중에서도 유일한 학문이라고 할 유학굚성리학이 정치이념화 된 결과입니다.

현대의 한국 지식인들도 비록 그가 배운 지식의 내용은 서구적인 것이지만 지식에 대한 태도나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은 여전히 조선왕조의 유학 엘리트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 패거리 짓기기나, 뒷북치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만 비평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작품 분석은 뒷전으로 미루고 작품에 담겨진 이념이나 시대를 추상적으로 거론하는 것, 그 안에 반영된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으로 작품의 우열을 판단하는 것, 구체적인 작품 창작과 아무 관련이 없거나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논설조로 주장하는 것 등도 모두 이 패턴에서 이해되는 것들이지요.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단 한 편도 문학적으로 거론이 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시를 식민지 시대의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그렇게 추켜세우고 또 그와 같은 매스컴의 조명 아래 그 자신들도 훌륭한 평론가로 성장했으니 한국 비평의 실체가 과연 어떤 것이었나 유추해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모르나 그 어떤 비평가도 자신의 과오를 겸허하게 성찰한 사람을 저는 아직 우리 문학사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시류의 프리미엄을 타서 대가연했을 따름이지요. 그러니 아류들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작가 시인이라면 누군들 비평을 신뢰하겠습니까. 우상화되는 시인들조차도 마음속으로는 아마 그런 식의 비평을 경멸하고 있겠지요.

 

김:문학이 때로는 이념 선전의 도구가 되거나 정치 투쟁의 장이 되기도 했고 문단권력 추구의 방편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일 겁니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끝으로 우리 시의 바람직한 활로랄까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이런 점들이 새해에 이뤄졌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들을 요약해서 오 선생님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한마디로 우리 시는 건강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건강성이란 물론 애매한 표현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덕성을 전제한 것입니다. 이때의 도덕성이란 도둑질하지 말라는 따위의 실천 윤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 있는 인간 발전에 도움을 주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새롭고 실험적이라고 해서 정신병적 행동을 권장하거나 근친상간을 부추겨서는 안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건강성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근자의 우리 젊은 시단은 삶의 건강성을 해치는 이와 같은 병적 징후가 농후합니다. 데카당스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데카당스를 통해서 보다 인간다운 문명을 건설하자는 것이지요. 19세기의 데카당스도 데카당스의 쾌락을 향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명의 위기를 인식한 데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건강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 시도 데카당스를 극복하여 새로운 문명의 시대로 나가는 데 노력을 하자는 뜻에 있습니다.

 

김:도덕성의 회복,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찾아서 노력하는 것이고 시의 시다운 확보의 길이다 이런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최 교수님께서는 어떠세요?

 

최:저는 오 교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한 가지 더 강조해 말씀드리고 싶네요. 보다 더 진정성을 가져야 되겠다. 건강성, 도덕성과 관련된 말이지만 제가 진정성을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날 컴퓨터 세대에게는 모든 것이 가상화되거든요. 가상공간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예술이 가짜화될 수도 있기 때문에 진정성이 전제되지 않은 가상화는 그때는 좋은데 그것이 마치 중독이 되어서 자폐성에 빠지게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진정성을 가져야 되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희 시는 텍스트에 너무 의존해 왔다. 인쇄된 매체만 보고 이것이 시의 전부라 생각해 왔습니다. 시의 자기부정 즉, 극단적 해체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저는 시의 구술성, 낭송시, 살아있는 목소리를 전하는 쪽에 시인들이 좀더 관심을 가지고 소위 노래로 불려질 수 있는 시에 대한 관심도 좀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첨가하고 싶은 것은 지금이 세기말 아닙니까? 혼돈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드렸는데 오세영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어요. 극과 극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 내 편 아니면 네 편 이렇게 되는데 새로운 세기를 조망하고 보다 더 넓은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기 삶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고 미래에 대해서도 그런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갖지 못할 때 시는 부분으로 떨어지고 극단화되고 지역화된다 이런 것에 대한 회복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두 분 말씀을 듣다 보니까 우리 시단의 문제점이랄까 이런 것이 선명하게 짚어지는군요. 저 나름대로 한 가지만 더 추가해 말씀드리자면 좀 더 우리시가 깊어져야 되겠다 하는 철학성의 심화가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점에서 우리시가 더 깊이 아름다워져야겠다는 소망, 즉 예술성의 심화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감동을 주는 시, 진정성이 솟구치는 시가 되어야겠지요. 너무 획일주의화하는데 그런 점에서 개성의 다양화, 개성의 가치가 새롭게 인정되는 시대, 그것이 존중되는 시대가 이루어져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두분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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