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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관한 몇 가지 형태의 상상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2. 6. 01:29

 

나무에 관한 몇 가지 형태의 상상력

김양헌

 

1. 뿌리를 그리워하는 열정 - 식물적 상상력

 

시인이 인간과 그 사회에 절망할 때 가장 친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자연을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런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절로 끌려간다/ 나의 자연으로"( 정현종, 「나의 자연으로」)라고 노래했으리. "죽어가는 혼돈 속에서 ... 정신의 뿌리 흔들리며 절망 쪽으로 아득해"(손진은, 「음악」)지는 순간 시인은 자연을 느끼고 거기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며, "나무 아래 내 마음을 기대"(허수경, 「꽃핀 나무 아래 」)어 세상살이의 고통과 존재의 덧없음을 이겨내고자 한다. 자연은 도시문명의 헛된 일상 속에서 삶의 뿌리, 정신의 뿌리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마지막 탈출구로 인식되어 왔다. "神은 망했다"( 이갑수, 「神은 망했다」)라고 노래할 때 이미, 역설적으로 시이라는 이름의 자연에 우리는 깊이 빠져들어가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근에 시집을 낸 일련의 시인들은 동물보다도 식물을 더 많이 시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똑같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존재인데도 동물의 유동성보다 식물의 정태성에 더 쉽게 빨려드는 것 같다. 동물은 오히려 인간에 비유하여 현대사회의 비인간화나 도시인의 속물성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매개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석제는 동물을 소재로 한 일련의 시들( 「철판 위에 오리」, 「달인네 마을 소」, 「오징어」,「 신의 집에 거하는 소」,「노루잡기」등)을 통해 처참하게 죽거나 죽임을 당함으로써 죽음조차 비인간화한 세계의 실상을 드러낸다. 동물이 부정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새 정도인데, 그것도 추상적이거나 나무 또는 숲의 일부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노루나 사슴, 칡범 따위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자연으로서 동물, 한 존재자로서 동물은 점차 우리시에서 그 의미가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

식물에 관심을 크게 두는 것은, 시적 이미지로 쓰기에는 오히려 너무 낡아버린, "뿌리를 가진 존재"라는 지극히 소박한 식물적 상상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뿌리를 갖지 못한 존재, 부유하는 도시인으로서 원시의 대지에 따뜻하게 몸을 눕히고 싶은 열망이 이런 단순한 상상력을 새삼 자극한 것은 아닐까. 뿌리 뽑힌 삶에 관한 고통스러운 인식, 도시문명 속을 유랑하는 존재의 부자유, 절대적 혹은 절대적이라 보이는 지향할 가치의 부재, 그러한 것이 '익명의 살의를 숨기고 있"는 "사막도시" (장옥관, 「가을 여치」)속의 시인들에게 "뿌리로 돌아가는 그 고요함"( 허수경, 「도시의 등불」)을 그리워하게 한 것이다.

 

열어 보이라면

뽑힌 풀뿌리처럼

마른 가슴

- 이진명, 「地龍의 노래」 부분

 

잘린 뿌리 쪽의 깊은 절망 위로

그대 앉아 흐느낀다

 

- 문인수, 「봄날」 부분

 

뿌리 뽑힌 것들 生으로 가둬 놓고

갈대 같은 것 허릿자락이나 꺾어놓은 얼음 평면을

하오의 햇살은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 손진은, 「겨울 못에서 2」 부분

마당가 풀더미 뿌리째 뽑히고

고스라지는 마지막 빛

백일홍 어깨가 기울어지네

 

-장옥관 , 「백일홍 붉은 그늘 」부분

 

재가 되어 아득한 뿌리에 다가갈 때 까지

붉은 꽃, 사랑하는 네 속에 살아

타오르는 불빛으로 살아

 

- 채호기, 「사랑하는 네 속에」 부분

 

이와 같이 시인들은 "뿌리"의 부재를 노래한다. 잘리고 뽑힌 뿌리처럼 우리의 삶도 잘리고 뽑혀 헛되고 헛된 것으로 인식한다. 허무와 절망만이 시인의 의식을 감싼다. 그러나 시인은 허무와 절망을 노래함으로써 그것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거나 극복하고자 한다. "잘린 뿌리 쪽의 깊은 절망 위"에서도 "나무 들꽃 이름 모를 풀의 뿌리들이 안긴 땅 속에 /여리나마 맑은 바람길을 틔어 주"(이진명, 「地龍의 노래」)려고 한다. 이것은 뿌리를 상실했다는 절망감이 역설적으로 뿌리를 그리워하는 애정임을, 본질과 근원을 향한 열망이 그만큼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 얼음 사이 뿌리 뻗으며, 마음껏/ 땅 끝 황천까지 닿고 싶다"( 송재학, 「짧은 봄날」)는 극한의 절망 속에 숨어 있는 불타는 열망 같은 것!

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나무로 이끈다. 서정시의 주요한 제재로 등장하고 있는 '모란/ 국화/ 장미/난초/ 목련/ 진달래'처럼 꽃이나 풀과 같은 여린 식물성 보다는, 생태적으로 인간보다 거대하고 긴 생명력을 지닌 나무가 식물적 상상력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강렬한 색채 이미지와 불꽃처럼 피었다 지는 비극성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긴 하지만, 꽃과 풀의 뿌리는 이 지독한 현실의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운 나약한 이미지를 안고 있다. 정적인 풀/꽃에 비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동적인 흐름을 가질 수 있는 나무가 시인들의 상상력에 더 큰 자극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나무들만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온전히 간직"(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0」)한다는 인식으로 시인들은 나무를 노래한다.

 

 

나무는 始原의 푸른 물줄기를 콸콸 불뿜는다

 

- 박용하, 「청동 구리빛 나무들의 노래 1」부분

 

 

2. 유년의 마을 혹은 황금 연못의 길목에 선 나무

 

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 - 식물적 상상력, 혹은 나무의 상상력은 흔히 유년의 그리움으로 변주된다. 유년에 관한 추억은 현실(있는 세계)을 벗어나 이상세계( 있어야할 세계)를 꿈꾸는 욕망과 결합하면서 오래 전부터 시인들의 의식을 지배한 주요한 모티프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형태의 작업이 너무 자주,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제는 낡아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유년은 젊은 시인들에게조차 아직까지, 어쩌면 새삼스런 필요 때문에, 중요한 제재가 되고 있다. 여전히 유년은 서정의 뿌리다. 유년으로 가는 길에는 꽃이 피고 새가 울며, 어머니가 반기고 흙내음이 진동한다.

우리의 유년에는 늘 시골냄새가 난다. 도시의 유년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도시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이 왜 없을까마는 그것은 우리 민족의 시적 정서에 맞지 않다. 유년의 그리움/ 추억은 현실/ 도시 문명의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농촌공동체를 향한 인간적인 열망, 농경사회가 반만년 역사의 배경인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이나 마찬가지다. 도시문명에서 파생하는 뿌리깊은 절망, 1980년대는 흐릿하게나마, 혹은 그릇된 토대 위에 섰을지라도, 그 절망을 넘어설 어떤 전망이 있던 시대였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것이 당대의 지배적인 알레고리,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절망의 뿌리는 근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뒤엉켜버렸으며, 마침내 절망의 밤은 일상사가 되고 말았다. 1960년대의 절망을 한 시인은 "新聞을 펴라// 이 〔이〕가 걸어나온다"( 김수영, 「이 」)고 표현했지만, 요즘은 신문을 펴면 이가 아니라 "살찐 구더기 떼" (송재학, 그 아래, 더 깊이 내려간」) 가 훅, 쏟아진다. 오늘날 절망은 자신의 몸을 뜯어먹고도 잘도 커가는 거대한 괴물이다. 유년은 이 괴물로부터 달아나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고, 혹은 이 괴물을 무찌를 비책이 묻혀 있는 비밀의 성이기도 하며, 또는 그것마저 사랑하게 해주는 마범의 샘물이 흐르는 성지( 聖地) 이기도 하다. 유년은 포근한 모성의 자태로 우리에게 온다.

장옥관의 유년에는 "넓은 강이 다독거려 놓은 새 순 푸른 보리밭"이 보이고, "포플러숲"이 따뜻한 "겨울 햇살"(낙동강」)을 받고 있다. "마을 어귀 오래 묵은 아카시아 나무"을 지나면, "투닥투닥 풋감 떨어지는 소리" (「아카시아」 ) 들리고, 유년의 나무들 그리운 손을 내민다. 이러한 유년에 관한 따뜻한 추억은 현실적인 절망의 옷을 벗어버리는 행위며, 그 절망의 고통을 치유하는 의식 (儀式)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하나대"와 "압구정동" 사이 그 머나먼 거리를 하나의 정서적 틀 속에서 이해하려는 유하의 입장과 만난다. "해리장 서는 날 하나대 상나대 사람들 새벽같이/ 일어나 땟국절은 얼굴로 사박사박 십리를 걷는 소리"( 유하, 「삼백 년 묵은 규목나무 아래 서면」듣는 것과, "배나무 숲 있던 자리 梨田碧海된 지금 "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바람부는 압구정동에서 주윤발이나 최진실, 심혜진을 노래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나 마찬가지, "쫓기다 쫓기다 더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고 생각될 때 ....... 시간의 고랑을 타고 찰찰 흐르는 물소리로 거슬러오르는 물고기 떼" (장옥관, 「꽃잎 필 때」) 처럼 시인은 유년의 고향으로 흘러간다. 사막도시에서 화려하게 탈출하는 꿈을 꾸며.

이진명의 유년은 동화적이고 설화적이다. 마주앉아 "밤바람 소리를 읽고", "바위의 일생을 이야기 하"고, "물방울 소리를「 내던 새의 이야기를" 하는 오소리나무는 "예나 지금이나"(「산」)변함이 없다.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는 이 시대에 유년의 기억만은 시간의 물결을 가로질러 시인의 가슴 속에 남아 절망의 고통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허수경에게는 그것이 쓰린 생애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음을 다 놓고 갔던 길은 일테면/ 길이 아니고 꿈이었"(허수경, 「꽃 핀 나무 아래」)다는 뒤늦은 자각, 그것이 현재의 쓰린 생애를 더욱 쓰리게 한다. "그곳을 떠나던 날/ 강가에 밤나무 밑 친구들 몇 울고...... 내 귀는 바람빠진 공처럼 쓸쓸했"(채호기, 「몸 밖의 그대 4」)던 회한 서린 기억 또한 유년을 넘어서는 언덕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유년의 언덕에 서 있는 나무는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는 존재로 변주되고, 새로운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가끔 깃을 털고 때까치가 날고 나, 미류나무에 기대어 마을을 내려다보면 하나, 둘 불켜진 창마다 가슴은 언제 나 설레어 이런 날 종일 누군가를 기다렸으나

 

- 허수경, 「원당 가는 길」부분

 

그 산 속에 있었지요 온통 마른 가지 부딪는 숲길을 지나

길게 굽어 있는 오르막 넘어서면

골과 골 사이 번쩍이는 저녁의 황금 연못

 

- 장옥관, 「황금 연못」 부분

 

"황금 연못"이나 "원당 가는 길의 마을"은 현실에는 없는 세계다. "황금 연못"은 "사람 없는 산 속"에 있고, "미류나무에 기대어 내려다보는 마을"은 "길 아닌 길 건설의 무감동"과 대비된다. 그것은 유년의 기억에서 되살아난세계이면서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이다. 시인들은 그곳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미류나무를 심고 숲길을 낸다. 그 나무들은 통과제의의 모습을 하고 그곳에 서 있다. "굴뚝들이 치솟는 밤/ 짐차들 시간을 가르며 어디론가 질주를 하"(장옥관, 「낙동강」)는 세계에서 시인의 의식을 끌어내주는 "무슨 신비에 어려" (이진명, 「숲을 통과하다 」)있는 숲이고 나무다. 역으로 그 숲을 베어버린 자리에 도시가 건설된다. "배나무숲"을 베어내고 "압구정동"을 세운 것 처럼, 시인의 의식은 그 베어버린 "배나무숲"을 거치고 " 삼백 년 묵은 규목나무 아래 서 " 서야 "하나대"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무는 유년과 "황금연못" 으로 통하는 '주술적인 길'이다. 그 길을 지나 만나게 되는 세계는 현실과 확연히 다른 곳이다. 유년은 유년으로 머물지 않고 현실의 절망을 이겨내는 꿈의 세계, 무(巫)의 세계로 변주된다. 과거는 꿈의 미래다.

 

나는 봅니다

먼저 간 내 마음이

상징의 둥그런 지붕을 이룬 곳

강 건너 왕국

그곳 왕국에서만 자라나는 無憂樹

그 그늘 아래

나는 만날 것입니다

그때 너, 먼저 간 너는 나를 지우고

나는 그리운 너를 지우리

그렇게 함께 앉아 쉴 無憂樹 그늘

잎새와 잎새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손에 받으며

흔적처럼 앉아서

그 흔적마저 지우게 될 것을 기다리며

 

- 이진명, 「無憂樹 그늘 아래」부분

 

그곳은 크낙한 목련나무가 있는 "복자수도원"(이진명, 「복자수도원」)이며, "함게 앉아 쉴 無憂樹 그늘"이 있는 왕국이다. "그리운 나라/ 보이지 않는 지도의 한 점"( 장옥관, 「牛耳島 」)이며, "천년 전의 왕국/樓蘭"(이진명, 「逸話」)이다. 나무는 그곳 (있어야할 세계)과 이곳( 있는 세계)을 변별해주는 징표다. 그곳은 소도( 蘇塗)의 한가운데 자리한 신성한 나무다. "그곳 왕국에서만 자라나는" , 시인만의 독특한 주문이다.

 

 

3. 절망의 나무, 혹은 '나무 - 몸' 되기

 

그러나, 현실은 쉽게 꿈을 잉태하지만, 꿈은 현실을 낳기 어렵다. 꿈이 화려하면 할수록 절망도 그마늠 깊어진다. 유년의 아름다운 여로에서, 마침내 시인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추억은 이미 식은 시간이기 / 때문이다 "( 박용하, 「춘천 悲歌 3 」). 그 꿈의 왕국은 "죽음을 가지고 넘어야 (이진명, 「逸話」)하는 곳이며, " 내 약도로는 갈 스수 없는 "( 이진명, 「하늘나라」)하늘나라이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시인은 일종의 포획된 짐승 같은 "(허수경, 「저 잣숲」)존재임을, "생선국에 풀죽은 쑥갓"(허수경, 「무심한 구름」) 같은 자신의 삼을 깨닫는다. 현실은 여전히 절망이며, 유년의 기억조차 고통으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절망의 나무가 시인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린다.

 

나무들은, 누렇게 뜬 잎을 버리지도 못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다. 형벌의 팔들을 가까스로 들고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피가 말라, 여윈 껍질만 비틀린 채

제 몸 하나 눕힐 자유마저 없이!

 

- 엄원태,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부분

 

엄원태의 나무는 '고통과 절망이 한계에 이른 세상의 아름다움' 을 보여준다. 그것은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수동적인 나무다. 시인의 눈은 나무가 아니라 절망과 고통의 처절한 아름다움, 사라져가는 것에 관한 연민에 놓여있다. 송재학의 시는 이러한 절망의 나무가 역동적으로 변주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온전히 살아 아름다운 나무가 없다. 그의 상상력은 모든 나무들을 절망의 고통, 그 자체로 있게 한다. 그의 나무는 유년의 세계에 있을 때조차도 뒤틀린 욕망의 얼글을 하고 있다. 그의 현실에는 "죽음이 세운 검은 광목천이 펄럭"(「살레시오네 집」)이고, 앞날마저 "어디에나 널린 흰 빨래처럼/금방 더러워"( 「저물녁......시간을 버리다」)진다. 그 속에 "벗은 나무들이 흰 뼈처럼"( 「雪害1」) 선다.

 

사람은 벅처럼 더러워지고

거친 길들의 백양나무조차 볼 수 없다

 

-「살레시오네 집 」부분

그녀 귓가에는 뒤산 바위들이 굴러내립니다 삽짝은 검은 바위에 짓눌리고 마당귀 감나무도 벼락맞듯 썩어가고 뒤란 장독마저 부서집니다

- 「썩은 나무 」부분

 

오리나무며 피나무며 生木들이 벌건 재가 된 채 무너지고

 

-「 가을날에서 봄날까지 」부분

 

침엽수림의 병든 나무들이 끝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 「툰드라에서 툰드라까지」 부분

 

이 외에도 그의 시에는 도처에 "늙은/병든/썩은/부러진"나무가 널려 있다. 꽃나무는 "뽑히여 흰 뿌리 드러나기도"(「먼 산」 )하고, "병든 나무의 뿌리에는/ 우레 소리만 성급하다" ( 「단풍」). 그의 나무는 절망의 저승사자다. 한 번 끌려가면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블랙홀이다. 으스스한 정적의 바람조차 숨을 죽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나무는 "없다/ 썩는다/ 뽑힌다/ 쓰러진다/병든/ 벗은" 등의 부정적인 시어와 결합하고, "벼락/우레(굴러내리는) 바위/불꽃"같은 역동적인 시어와 함께 놓임으로써 미묘한 힘을 갖는다. 그의 나무는 절망 속에 깊이 침잠해 있는 정적인 나무가 아니라 , 절망과 뒤엉켜 절망을 싸워내는 동적인 나무다. 그래서 그의 나무는 힘을 가지며, 그의 시는 얕은 허무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는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가장 깊은 절망의 뿌리에서 오히려 나무는 욕망의 꽃을 피우려 한다. 그것은 "經典'을 향한 욕망이다.

 

그 나무의 욕망의 끝은

수만의 經典이다

나무의 꿈은 제 뼈와 무늬 파헤치는,

늙은 중의 칼 끝 움직이는

손과 팔의 불끈한 근육에.. 이어지는

늙은 중의 고요한 물길이다

- 「희고 부드러운」 부분

 

세속의 욕망은 절망으로 통하고, 절망의 끝은 지순한 욕망으로 통한다. 지고지순한 세계, "經典'의 욕망! 희고 부드러운 자작나무를 앞에 놓고 늙은 중은 세상의 욕망이며 절망 모두 버리고 팔만대장경을 각인한다. "살얼음의 추위 살얼음의 번뇌", "새벽과 햇빛/ 빗소리와 짐승발자국 흐린 등불"( 「희고 부드러운」)다 감싸안고 늙은 중의 칼 끝에서 나무는 "아무도 보지 못할 분홍 속꽃"(「속꽃」)으로 피어나려 한다. "늙은 중의 고요한 몰골", "經典"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상상의 과정에서 시인은 나무를 극단으로 의인화한다. 나무는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하고 힘을 발휘한다. 나무는 곧 화자가 되기도 한다. 나무와 인간의 하나됨? 나무- 몸의 상상력!

 

갑자기 히말라야시다 검은 둥치가 쿵, 그에게 기대온다

마침내 그는 중얼거린다

저 히말라야시다와 몸 바꿀 수 있다면!

 

- 장옥관, 「병든 사내」 부분

 

대숲은 여자의 가슴 상처와 여자의 긴 생각의 옛집을 찾아 제 빈 속에 늙은 여자를 품고 한층 푸른 빛을 띱니다

- 송재학, 「가을날에서 봄날까지」 부분

 

옷을 벗고 잎잎이 누우면

소용돌이치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결 위에 뜨는 숨결

나무의 꼿꼿한 성기가

나의 질 속으로 들어온다

햇빛의 볼륨을 높여라!

내 몸을 초록음의 공명으로 부르르 떨게 하는

나무의 힘찬 射精!

 

- 채호기, 「햇빛의 볼륨을 높여라」 부분

 

나무의 의인화 또는 나무 - 몸의 상상은 채호기의 시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나무와 섹스하기'는 "죽음을 치고 튀어오르는" (「햇빛의 볼륨을 높여라!」) 끔찍한 오르가즘, "불똥튀는 에로티즘"(「허공의 푸른 길」)을 보여준다. 물론 그것도 절망의 다른 모습일 따름이다. 1980년대를 상처투성이로 살아왔고, 1990년대를 절망으로 살고 있는 자의 처절한 환멸의 표현이다. "발을 힘차게 내디뎌도/발바닥 끝에서 실뿌리 하나 자라지 않고/ 가슴에선 새 한 마리 부화하지 않"(「혓바닥」)는 현실, 그래서 그는 몸을 버리려 한다. 아니, 몸을 뚫고 나와 새로운 몸, "몸 밖의 그대"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스스로 나무가 된다. 나무와 몸을 바꾼다.

 

늦은 아침 깨어

낮은 뒷산에 오르니

새로운 바람이 옷자락을 붙잡고

낯 선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에 나의 뿌리가 내려지고

내 겨드랑이와 손가락 끝에서

초록잎들이 돋아나

그늘을 이룬다.

이따금 새들이 찾아와

머리 위에 놀다 가고

피 대신 수액이 몸 속을 흐른다.

 

- 채호기, 「半人半樹」 부분

 

 

4. 스스로 집을 짓는 존재의 나무

 

채호기와 송재학의 나무는 확실히 장옥관이나 이진명의 나무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한낮에 나무들 잎 비비는 소리"( 이진명, 「淸談」)고요히 들려오고, 가을 나무들이 "잎새에 떨어지는 작은 햇살에도 금세 몸을 뒤"(장옥관, 「소리에 대하여」)트는 미세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동적이냐, 정적이냐, 거친 언어냐, 세련된 시어냐 - 이것이 이들 시인들이 절망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이다. 물론 채호기와 송재학, 이진명과 장옥관 사이의 변별성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송재학의 시는 절망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비명"(「붉나무」) 이고, 채호기의 시는 절망을 막 뚫고 나오려고 "끊임없이 폭발하는 빛폭약"( 「백지위에서」)같은 것이다. 이진명의 시는 "길에서 조금 비켜 서 있"( 「복자수도원」)는 고요한 관조의 모습이며, 장옥관의 시는 "세상의 없는 길을 찾아" (「바퀴에 대하여」)떠도는 욕망의 흔적이 깔린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이들 모두는 "현실의 부정"이라는 추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진명의 "용서"조차도 결국은 부정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방법적으로도 그들은 절망의 끝에 꿈의 추구 - '낯 선 세계/經典의 세계/복자수도원/황금 연못-라는 서정시의 전통적인 양식을 배치한다.

그런데, 손진은의 나무는 이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일상인들의 시각을 뒤바꾸어 놓으면서, 한두 송이 꽃이나 풀이 보여주는 여리고 섬세한 서정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을 보여준다. 그의 나무는 채호기나 송재학의 그것보다 역동적인 모습도 아니면서 수동적이고 대상적인 것 또한 아니다. 물론 의인화한 것도 아니며 현실의 부정이나 꿈의 추구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스스로 억누르기도 하는 힘( 「숲」)을 가진 하나의 존재다. 그 힘으로 "날아가는 새들 불러들이기도 하고/힐끗거리며 지나가는 구름 얼굴 붉히기도 하"(「詩」 )는 나무다. 인간이 바라보고 판단하는 대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존재하며, 한 존재자로서 다른 존재와 교감한다. 시인은 그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만 그것을 느낄 뿐이다.

 

부챗살모양 잎을 늘어뜨린 채

큰 나무가 그늘 드리울 때

작고 앙증한 줄기 끝에 여린 잎들며 꽃을 매단

어린 것들 날아오르려 퍼득거린다

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이 두근거리는 몸짓들 사이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자라는 죽음이며 상처까지를 어루만지는 햇살

전율하는 숲이 반쯤은 솟아오르고

반쯤은 스스로를 억누를 때

열려진 사물들 속에서

잎파랑처럼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떠는 모든 육체들

그 힘으로 구름은 하늘에 천천히 흐르고

그 힘으로 가볍게 떠 있는 공중의 새들

 

- 손진은 「숲」 전문

 

"큰 나무"와 "여린 잎들이며 꽃을 매단/어린 것들"이 모여 퍼득거리는 숲, 우리가 일상 속 멀리서 바라보는 숲은 늘 고요로 가득 차 있지만, 손진은의 숲은 "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있어 스스로 존재하고 햇살과 교감하며, 사물들의 닫힌 입을 열어 "숨 쉬며 물결치며 팽창하는 언어"(「 시」) 로 말하게한다. 손진은의 나무는,

 

위로는 하늘과 서늘히 내통하고

아래로는 그늘이며 죽음까지를 끌어들이고 있는

오오 그 속에 키우는 새들 불안한 잠

솜털처럼 부드럽게 다독거리며 출렁이는

삶과 죽음 넘어

어떤 속살의 내면을 흔드는

 

- 「미루나무」 부분

 

존재다. "순수한 기쁨에게로 혹은 상처에게로 열려 있는 나무들" (「스스로 열리기」).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그래서 "덥석 우리 허튼 인식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 「콩깍지 혹은 집」) 나무다. 이 나무는 자신의 힘으로 "그림을 그리듯 하늘에/기하학적인 공간을 각인하"( 「詩」)여 존재의 집을 짓는다. 결과적으로 손진은의 시는 관념을 거느린다. 그의 나무는 관념의 나무다. 관념의 나무는 그 뿌리를 현실의 땅 속에 묻지 않는다. 그것은 가볍게 사회적 절망을 떠나 즐겁게 존재의 바다에 떠 있다. 존재의 집을 짓는 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역사적 시간은 멈춰서고 사회적 공간은 무의미해진다. 그의 시는 스스로 즐겁다. 일견 "무익한 듯 보이는" 이런 작업이 미묘한 "향기"(「시」)를 준다. 김춘수의 작업이 그러했듯이.

장옥관의 나무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의 나무를 움직이는 힘은 외부에 있다. 외부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저물 풍경 속 2」). 그것은 나무나 숲이 스스로 발하는 힘이 아니라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힘으로 보인다. 그 힘으로 나무는 "품 속에 깃드는 새들을 안아 보기도"하고, 뿌리를 '한 뼘 더 땅 속으로 뻗어가"며 우주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간다.

 

한 그루의 나무가 흔들릴 때 마다 어둠은 깊어가고

별빛은 더욱 또렷해지고 깊푸른 풀벌레소리가

빈 자리를 가득 채우지 언덕 아래 못물이 출렁거리지

어떤 힘이 그를 흔드는 것일까

흔들리며 그를 깊어지게 하는 것일까

 

- 장옥관, 「저물 풍경 속2 」부분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모습이 나무다. 시인은 나무를 흔드는 "어떤 힘"에 관해 명상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장옥관의 나무는 이런 모습보다도 유년이나 이상향의 세계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손진은의 시에도 과거로 흘러가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가 보이지만, 그때조차도 나무는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으로 처갓집 가는 길, 눈발이 날리고 어둠은 내리는데 "길을 끌어안고 내려올 것도 같은 마을 불빛은 아직 멀"어 불안한 그 때,

 

산등성이 길가의 가문비나무 고로쇠나무 같은 것들

처갓댁 식구들처럼 손 벌려

축복처럼 눈덩일 풀썩 던져

 

-「 1990년 1월 1일」

 

준다. "축복처럼" 즐겁고 능동적인 나무다. 읽는 이미지 덜컥, 손 벌리고 말 것 같은 즐거운 나무다.

그러나, "그늘이며 죽음까지를"껴안고 어루만지는 사물들(나무, 숲 또는 하늘 등)을 인식하는 시인의 어깨 위에 아득한 절망 가볍게 내려앉는 모습 보인다. 모든 사물이 존재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지만, 그 기쁨은 "죽음이며 상처까지"모두 끌어안은 다음에 오는 설레는 그 무엇이다. "불안 쪽으로 몸 내맡기다가", "삶과 죽음을 넘어"(「미루나무」)서야 얻을 수 있는 고요한 기쁨, 어쩌면 그것은 「여름 무논」에서처럼 "섬뜩한" 싸움 뒤에고요 같은 것은 아닐는지. 그의 시에도 "살얼음 낀 강이/ 가슴으로 흐르고"(「겨울 못에서 2」)는 아득한 절망의 흔적이 보인다. 그 절망의 현실적인 고통을 그는 존재의 역동성을 노래함으로써 뛰어넘으려 한 것일까?

유년의 나무나 절망의 나무, 혹은 존재의 나무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어떤 변별적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나무에 관한 상상력이 다양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출된 양상일 따름이다. 나무에 관한 여러 가지 상상은, 광주의 변방에서 죽지 않은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던 1980년대를 살아내고 절망과 혼돈의 199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 시인들의 의식 속에 각인된, 팔만대장경 팔만여 개의 서로 다른 나뭇결이며, "늙은 중"의 매섭고도 고요한 칼자루 같은 것이다. ( 『문화비평』 1992 )

 

『푸줏간의 물고기』(김양헌, 시선사 2005) : 196 -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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