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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5. 15. 23:12

90년대 신세대 문화의 아이콘,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단지 대중음악사의 사건만이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의미했고 문화적으로는 신세대라는 새로운 집단이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주체가 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서태지 신드롬과 함께 신세대 문화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90년대는 한국사회가 대단히 큰 격변을 경험했던 시대다. 군사 정권이 끝나고 개발 독재의 패러다임이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의 급격한 흐름 속에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간 전환기가 이 시기이다. 물리적으로 보면 1990년부터 90년대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해야겠지만 사회문화적으로나 정치적인 변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새로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1992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면서 이른바 문민시대의 막이 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해 서태지(좀 더 정확하게는 ‘서태지와 아이들’)가 등장했다.

새로운 시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음악의 등장

87년 6월 이후 한국 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문화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오랫동안 제도권 밖에 머물렀던 진보적 문화 산물들이 제도권 안으로 진입하면서 폭발적으로 대중화되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검열이 완화되면서 80년대 내내 대학가와 운동권에서 불리던 민중가요가 대중음악권으로 들어가면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고 소형 영화 운동을 벌이던 젊은 영화인들이 충무로로 입성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진보 담론들이 여러 영역에서 만개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90년대로 접어들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세상은 다시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 질서가 빠르게 해체되면서, 그리고 여가와 오락, 자기표현 욕구가 증대하면서 대중은 급속도로 정치와 이념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서태지는 바로 이런 시기에 등장했다.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1집이 발표되었을 때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청소년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가운데 그들의 첫 음반은 한 달 만에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그들이 내놓은 랩 댄스 음악은 삽시간에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주류로 부상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은 확실히 그전 시대의 음악과 달랐다. 댄스 음악이야 그전에도 있었지만 여럿이 함께 등장해 각기 다른 의상과 몸짓으로 자유롭게 춤을 추면서도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었던 그들의 춤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다. 거기다 그들의 음악은 흔한 댄스 음악의 기계적인 단조로움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었다. <난 알아요> 를 타이틀로 한 1집 앨범의 곡들은 록과 팝, 메탈과 테크노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버무리면서 전혀 새로운 사운드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스스로 모든 것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서태지라는 작가적 프로듀서의 존재였다. 그는 작사 작곡뿐 아니라 언론을 쥐고 흔드는 ‘영악한 마케팅 전략’까지도 스스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해내는 존재였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댄스 그룹과 구별 짓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10대 취향의 댄스 그룹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지만, 그 어떤 팀도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없었던 결정적 차이이기도 하다.

신세대 문화 시대의 서막, 서태지 신드롬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단지 대중음악사의 사건만이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의미했고 문화적으로는 신세대라는 새로운 집단이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주체가 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서태지 신드롬과 함께 신세대 문화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신세대는 있기 마련이고 새로운 세대는 늘 기성세대와 일정한 갈등을 빚기 마련이다. 소크라테스도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불평을 했다지 않는가. 그런데 유독 90년대의 신세대가 그토록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그들이 세계사적인 변화가 여러 가지 차원에서 한꺼번에 일어나는 격변기에 등장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90년대는 단기적으로는 2차 대전 후 세계 질서를 지배했던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탈냉전 시대로 접어드는 시점이었고, 좀 긴 역사적 맥락으로는 산업화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정보화의 흐름이 급속히 진행되는 시기였으며 그와 함께 디지털 기술과 영상 미디어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였다. 이 세계사적 급변기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는 과거 세대와 달리 이념과 정치에 대한 강박 관념이 적은 대신 자기표현의 욕구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컬러TV와 전자 게임, 컴퓨터에 익숙한 영상 세대이기도 했다. 이들은 욕망을 절제하기보다 드러내는 것을 더 좋아했고 집단보다 개인을 중시했으며,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던 과거 세대와 달리 소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거리낌 없는 언어로 욕망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몸짓으로 춤을 추며 강력한 사운드로 육체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서태지의 음악이 이들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문화로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폭발적 인기와 함께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을 삽시간에 바꾸어 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은 어느 순간 일체의 방송 출연을 중단한 채 잠적했다 다시 새 음반을 들고 나타났다. 새 음반을 내 놓고 활동하다 잠적 후 다시 새 음반을 내는 이들의 활동 방식은 은퇴 선언을 할 때까지 반복되었고 이후 많은 가수가 따라 하는 모델이 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낸 4장의 음반은 모두 매해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서태지라는 이름은 주류 대중음악씬을 쥐락펴락하는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서태지가 90년대 신세대 문화의 전형을 만들어낸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은 그가 연속적인 히트 앨범을 내 놓은 아이돌 스타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상징성은 그가 단순한 아이돌 스타에 머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자의식을 가진 록 아티스트에 대한 기성세대와 보수의 반감

댄스 가수로 출발한 서태지가 원래 록그룹 시나위 출신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댄스 가수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끊임없이 ‘자의식을 가진 록 아티스트’로 회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집의 <하여가> 나 3집의 <교실이데아> <발해를 꿈꾸며> 등 음악적으로 혁신적이고 사회적 메시지가 드러나는 노래들이 나오면서 그를 보는 기성 사회의 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93년 2집 발표 당시 그들이 흔히 레게파마라 불리는 드레드록 스타일로 나타났을 때 KBS는 출연 정지 조처를 내린다. 이 일은 꽤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당시 대부분 신문의 논조는 KBS의 조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이었다. 3집 앨범이 발표된 94년에는 이른바 악마주의 소동이 벌어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거꾸로 돌리면 사탄의 음성이 들린다는 얘기였다. 특히 <교실이데아> 를 거꾸로 돌리면 ‘피가 모자라…….’라는 사탄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내용이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고, 일부 기독교계에서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이 터무니없는 코미디는 오래지 않아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서태지와 그의 이름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에 대한 기성세대와 보수 세력의 반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서태지와 기성 사회의 갈등은 1995년 4집의 <시대유감> 을 둘러싼 검열 논란에서 절정을 이룬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시대유감> 의 노랫말이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개작 지시를 내렸지만 서태지는 아예 가사를 뺀 반주곡으로 4집에 수록했다. 수많은 팬들의 항의가 쏟아졌고 공연윤리위원회는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96년 대중가요에 대한 사전심의제도가 철폐되면서 이 노래는 재발매된 싱글 음반에 노랫말을 담아 제대로 수록될 수 있었다.
서태지가 이른바 ‘주류 질서의 전복자’라는 헌사를 받으며 신세대 문화의 아이콘이 되고 대학생을 비롯한 진보적 청년 세대의 지지까지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류 사회와 충돌하며 빚어낸 일련의 갈등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주류 질서의 전복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새로운 세대의 저항적 에너지를 담보하는 전복자의 ‘이미지’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연한 은퇴는 주류 질서의 전복자라는 이미지와 주류 시장 최고의 상품이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이 더는 지속하기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태지가 사라진 무대는 이미 전복자가 존재하지 않는, 주류의 논리만이 더욱 생경하게 강요되는 시장 그 자체로 남았다.

여전히 음악적 진화를 추구하는 록 아티스트, 서태지

예기치 않은 은퇴선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후 몇 년간 칩거하던 서태지는 2000년 여름 한 사람의 록 아티스트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새 음반을 내고 있고 그의 음반은 여전히 가장 막강한 시장 파워를 자랑한다. 그가 새 음반을 낼 때마다 언론은 그의 음반이 대중음악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침체한 음반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한 사람의 음악인이 그만한 기대를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대중음악의 기형적이고 취약한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여전히 우리 대중음악의 가장 강력한 브랜드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자신의 음악적 진화를 추구하는 록 아티스트의 길을 걷고 있다.

김창남의 대중문화< KB레인보우 인문학>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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