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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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가을 시 몇 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8. 26. 10:07

 

 

 

가을 청문회 / 나호열

 

 

조금 더러운 사람이

많이 더러운 사람을 야단칩니다

좀더 깨끗해질 수 없냐고

못생긴 사람이

좀더 못난 사람을 비웃습니다

좀더 아름다워질 수 없냐고,

오글오글 떠드는 모습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습니다

 

 

가을 病 / 나호열

 

그예 불덩이같은 짐승을 산으로 놓아 보냈습니다

허물을 벗어던지고 맞이하는 이 병은

애꿎은 산 하나만 태우고 맙니다

두 눈 부릅떠도 보이지 않던 길

붉게 혼자 물들어

떨어지지 않는 가슴을 지나

먼 마을로 내려 갑니다

불길 그 자리에 놓아 두고

흩뿌리는 찬 비도 그 자리에 놓아 두고

침묵을 껴 입는 나무들이

풍경소리를 내며

온몸을 젖게 합니다

산이 제 몸을 비워내기 위하여

북 울리듯 큰 이름 부르기위하여

몸을 뒤척일 때 마다

가을은 한층 깊어갑니다

결국 나는 몇 장의 바람을

더 묶어 놓았을 뿐 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겨우 완성 했을 뿐 입니다

 

 

 

가을 음악회 / 나호열

 

 

열 네 살인가 다섯인가 그 때 부터 시작된 가을이 여태 계속되고 있어요

집은 불타고 말없이 종적 감추신 아버지 아직도 소식 주시지 않고

그 해 가을 학교 강당에서는 음악회가 열렸어요

브라스밴드가 경쾌한 페르시안 마켓을 연주할 때

맨 뒷자리 높은 곳에서 큰 북을 둥둥 울렸던 것이 바로 나였어요

가보지 않은 페르시아의 시장과 이국인들의 활기찬 발걸음

인생의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듯이

가볍게 햇살을 퉁겨내듯이

한 손으로 북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마지막 장단을 골라내었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내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 차례는 독창이었는데 그 연주자도 바로 나였어요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띨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자리에 서졌습니다

불 타 버린 우리집,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는 그 집에 갈 수 없어

평생을 마음 속에서 서성거린 그 집 앞을

왜 나의목소리는 그렇게 슬퍼질 수 밖에 없었는지요

아까보다 더 큰 환호는 왜 스산한 귀뚜라미 울음으로 내게 들려 왔는지요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형제들과 함께 즐겁게 언덕길을 내려갔는데요

지금까지 그렇게 큰 무대에 서 본 적도 없었는데요

우리 엄마는요 그 시간에 술시중 드는 주모였는데요

젓가락 두드리며 창가 부르는 색시들 닥달하는 주모였는데요

지금도 그 가을 밤은 끝나지 않고 페르시안 마켓과 그 집 앞과

귀뚜라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윙윙대는 바람소리만

완성되지 않은 악보에 헝크러져 있는데요

 

 

 

 

 

가을 호수 / 나호열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깊어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없습니다

길이 없어

흰 구름만이 철새처럼

발자국을 남기고

눈도 씻고 가는 곳

당신의 얼굴

가득히 담아

바람은 가끔

물결을 일렁이게 하지만

당신이 놓아준

작은 숨결들을

속으로만 키우는 기쁨입니다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당신만을 비추는

손바닥만한

거울이 되었습니다

 

 

한 시간의 가을 / 나호열

 

 

환청이 심하다

한 시간만 기다릴꺼야

물 흐르는 소리

낮게 땅거미 내리는 목소리가

도처에 덫을 놓는다

어디쯤인지

한 시간 안에 나는

얼만큼 갈 수 있는 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인지

정적이 깊은 숲 속의 오두막인지

벌써 날은 저물어 가는데

고개 마루는 멀고 또 멀다

터벅거리며 걷다가

뛰기 시작한다

푸른 잎들은 붉은 세월 속을 통과하면서

무게를 버리고

온몸은 허공으로 휘어질 듯 팽팽해진다

이윽고 나는 새가 되기로 한다

벌거숭이로는 걸을 수 없어

봄이 오기 전까지

하늘에 머무르는 나무가 되기로 한다

 

 

 

 

 

 

가을의 기도 / 나호열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만

그 열매를 삼켜버렸다

눈물은 안으로 잠길수록

단단하게 여무는 씨앗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여

내가 그대의 몸으로 들어가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움터오를 그 날까지

이 햇볕 짱짱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시월의 장미 / 나호열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 바람을 맞으며

뚝뚝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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