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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옥의 시> 우주의 숨소리를 음각 陰刻하는 隱者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7. 3. 22:40

 

우주의 숨소리를 음각 陰刻하는 隱者

 

                                             - 조경옥의 『말랑말랑한 열쇠』에 붙여

 

                                                                                             나호열(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1. 왜 소통이 문제인가

 

 

   우리는 소통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소통,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 국가와 민족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절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소통이 문제되지 않는 시대는 없었다. 자연과 인간의 불통은 신이나 무속을 매개로 할 때 외경과 공포의 극단을 오갔으며, 인간끼리의 불통은 애증의 방식으로, 국가와 민족 간의 불통은 전쟁의 광포함으로 소통을 꿈꾸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행해 왔던 소통의 방식은 이데아일 뿐이지 현실태는 아니었으므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완벽한 소통을 이루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소통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경로를 탐색하여야만 하는 간절한 욕구가 일어났고, 그 욕구를 실현시켜 줄 존재로 우리는 '시인' 이라는 새로운 인간을 선택했다. '시인'은 모방자라는 폄훼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사제가 아니면서도 사제의 역할을 다해 왔고, 동물의 범주에서 인간을 탈출시키는 미감의 전달자로서, 문학과 철학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었다. 시인은 현자이면서 예언자이었고, 때로는 선동가 煽動家의 역할까지도 기꺼이 감내해 내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의 불협화음은 소통을 염원하는 외침인 까닭에 그 외침의 전달 뿐만 아니라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치장하는 임무까지도 시인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한 편으로 소통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소외의 영역으로 이행되어 간다. 소외는 소통의 부재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폐쇄시킴으로서 소통의 부재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시인들은 타자의 소외를 위무하기 이전에 자신이 소외의 포위망을 헤쳐 나와야 하는 역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의 시인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쌓아온 아우라를 잃고 자신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우울에 휩싸여 있다. 그 누구보다도 소통의 부재와 소외의 위해성을 절감하면서도 시인의 목소리를 경청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절망에 또 한 번 좌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우주의 본질적인 씨앗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광대무변한 우주 저 너머로 예지의 눈길을 던지거나 간에 시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인 자신의 존재 증명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종합적 구성체로 인식하는 태도와 단자와 같은 낱개로 세분화된 것으로 이해하는 분석적 태도 사이에서 한없이 망설이고 있는 형국이 오늘날 시인이 처해 있는 현 주소 임에는 틀림 없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시인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도 같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별은 그 별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들에게만 별이 된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 현현하면서도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은자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시인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나는 시인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2. 우주를 여는 통로

 

 

  『말랑말랑한 열쇠』는 『그곳이 비어 있다』(2000년)에 이은 조경옥의 두 번 째 시집이다. 한 권의 시집을 읽을 때 필자는 시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려고 매우 조심하는 편이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경우에 더 풍성한 감성의 자유로움과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 대한 일체의 선입관이 배제되었을 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 가혹한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하는 궁금함이 일어난다. 다행이 필자는 시인 조경옥과 친분관계가 없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시를 읽어본 기억이 없으므로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듯한 야릇한 설레임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두 권의 시집 사이에 펼쳐져 있는 시인의 여러 가지 변모가 어떤 과정을 겪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다른 하나의 궁금함이 될 터이다.

이러한 연유로 조경옥의 첫 시집을 읽지 못한 독자들을 위하여 간략하나마 첫 시집의 세계를 압축하여 소개하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과 설레임을 반감시키기 보다는 오히려『말랑말랑한 열쇠』를 보다 충실하게, 기쁜 마음으로 읽는데 일조를 더 할 것으로 생각되어 몇 마디를 덧붙이고자 한다.

 

 시집 『그곳이 비어 있다』를 평하면서 이충이는 화려하지 않은 언어 구사 속에서 섬세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엄격성과 자존심을 드러낸 시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한다면 삶의 순결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에 집중하는 시작 태도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론으로서 다양한 이미지 활용과 상상력의 발휘를 조경옥 시의 장점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자연주의의 시들에 날카로운 통찰력과 현실 극복의 의지를 아로 새기기를 권유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자연주의'라는 개념이 모호한 까닭에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으나 단순한 자연 찬미나 직설적인 음풍농월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법 技法의 실험적 시도로 보아도 별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조경옥의 시 세계에 대한 일별 一瞥은『말랑말랑한 열쇠』를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조경옥의 시를 읽기 전에 우리가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조경옥이 과작의 시인이라는 점이다. 첫 시집이 발간된 이후 두 번째 시집이 나오는데 10년이 걸린 것을 보면 그가 쉽게 시작에 임하여 서두르거나 허명 虛名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0년 이란 시간은 사유의 충분한 숙성과 체험의 축적, 시작의 새로운 기법을 탐구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세월을 품고, 세월을 기다릴 줄 아는 넉넉한 기품은 쉽사리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향기를 지니고 모험에 가까운 실험의식으로 드러내는 일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고 체험이 쌓인다고 이루어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요건들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쉽사리 답을 얻어내기 힘들다.

 

 5부로 나뉘어져 있는 『말랑말랑한 열쇠』는 계절의 정서를 묘사하는 시, 사물의 관찰을 통해서 시인의 내면의식을 반추하는 시,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의 의미를 묻는 시,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에 관한 시, 기법의 새로운 시도로서 보여지는 산문시 계열로 대별하여 볼 수 있다. 이제 『말랑말랑한 열쇠』가 품고 있는 함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3. 무위의 시정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인의 대상에 대한 관찰이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그 다양함이 집약된 주제의식으로 합치되지 못한다면 시적 성취를 이뤄내기 힘들다. 주제의식을 쉽게 이야기한다면 대상의 관찰에 있어서의 일관된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초점이 흔들리면 만족할 만한 畵像을 얻어내기 힘든 것처럼 시인에게 있어서의 주관은 좋은 시를 만드는 관건이 될 것이다. 요즈음의 시인들은 체험의 영역을 벗어나서 상상력의 무한성에 내기를 걸거나 감상 感傷에 빠져 주관적 정서에 함몰되는 잘못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임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맑고 승화된 욕망이다. 나는 이를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시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과 절조를 중요시 하는 선비정신과 상통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하고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언명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은 조경옥의 시를 읽어가면서 공감대가 확대되어 가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한 공간에 우리가 있습니다

살짝만 기울여도 맞닿을 거리인데

우리 사이 공간이 무한대로 넓어지고

침묵만이 공간을 꽉 채웁니다

침묵에 짓눌린 공기를 가르려

소리를 만들어 보지만

육성이 아닌 소리는

화답할 할 수 없어 공허만 키웁니다.

 

공허함을 먹고 자라던 벽은

문 하나 만들고

단절의 자물쇠를 채웁니다.

 

혼자만의 공간에 풍덩 빠지기 전에

소통을 위한 열쇠를 구합니다

어떠한 문이라도 열 수 있는

말랑말랑한 열쇠

어디에 있을까요?

 

                        - 시 「말랑말랑한 열쇠」전문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시「말랑말랑한 열쇠」는 조경옥의 시정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단절과 갈등으로 얼룩진 삶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소통의 '열쇠' 가 단단한 광물질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소재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평범한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인식은 '열쇠'가 말랑말랑 하다면 소통을 가로 막는 자물쇠 또한 말랑말랑 하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 老子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말랑말랑 하다는 것, 부드러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천 번 만 번 희망을 외치는 것보다 눈물겨운 일이 아니겠는가! 직선이 아니라 구불거리는 곡선으로 인식되는 봄 - 「봄은 곡선을 그리며 온다」이나 꽃이 피는 줄도 모르게/ 꽃으로 피어난다 /꽃이 진다 /꽃이 지는 줄도 모르게 -「 은행나무 꽃」에서 보이는 무위 無爲의 에너지를 체감하는 것은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보다 그릇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자칫 가벼운 풍류로 헤아려질 수도 있겠지만 조경옥이 꿈꾸는 진정한 '소통'은 대면을 통한 이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삼투되어 가는 과정, 즉 동행이라는 시, 공간적 합일의 정신에서 체득되어지는 것이다.

 

 

 

 

꽃길 따라 꽃마음 찾아들고

움켜쥔 마음길 툭 툭 터져 온기가 흐릅니다

골짜기를 나서는 발길 따라

봄빛 아롱아롱 함께 갑니다.

 

                                              -  시 「변산바람꽃 」마지막 부분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이 계절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으나 좀 더 눈여겨보면 조경옥의 계절시는 감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이 세상의 사물들은 서로 이격되어 있으면서도 꽃길 따라 꽃마음이 따라가고 발길 따라 봄빛이 함께 간다는 동행 의식으로 전환되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냉정하면서도 체험을 오래 숙성시킬 줄 아는 시인의 공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온몸으로 지어낸 문장이다

거듭된 퇴고로 피말린 문장이다

햇빛, 바람, 구름

물, 소리, 떨림

하루도 같지 않은 날들

잎맥 사이사이에 스미어 있다.

 

존재로서 또 다른 존재를 키우고

온전히 받고 온전히 주는 것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수사를 뛰어넘는 비장미다.

                                            -  시 「단풍」 전문

 

 

 시인은 단풍을 통해서 우주의 혈맥을 찾는다. 한 장의 단풍잎에서 시간의 퇴적과 압축, 푸른 잎을 붉게 물들이는데 우주의 온갖 에너지들이 깃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통찰을 거두어들이면서 '소통'이 서로 다른 개체들의 이해를 통한 화합이 아니라 모양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다는 생각을 뒤엎고 본래부터 하나였다는 만물동근 萬物同根의 이치를 깨닫는데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다른 여럿이 아니라 같은 하나라는 동양적 사유는 분석적이고 개체를 분리하여 존재를 규명하려는 서구의 논리적 사유에 밀리면서 소통과 소외의 문제 또한 서구적 논리로 풀어보려는 오류를 거듭해 왔다. 조경옥이 보여주는 기법은 바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였던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적절한 대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내딛지 않고 멈추어 선다. 말을 멈추고 발길을 거두어 들인다. 왜냐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한 마디를 더 내뱉을 때 시가 교조적이 되어버리거나 감성적 호소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사제 司祭의 역할도 아니고 교사 敎師의 역할은 더더욱 아니며 자신의 삶을 증언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사제에게, 교사에게, 역사가에게, 정치가에게 필요한 것은 경전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거울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정신의 수련이며 그러한 수련을 통해서 기꺼이 시인은 타인의 거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거울 속에는 무수한 시인의 아픔과 고통이 어려 있기 마련이다.

 

 

한번 붙들린 손끝은

헤어나지 못한다

근질근질 스멀스멀

아픈 기억 다 기어 나오도록

긁고 긁어 기어이 피를 보고야마는

삶을 이은 흔적

 

                                  -  시 「상흔」부분

시「상흔」은 시인의 도정이 경전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설파한다.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로서 대접받는 풍토에서 오직 붓끝으로 헤아려지는 예藝가 도 道를 앞지르는 풍경을 무수히 보아왔던 터에 영육을 문지르고 피를 말리는 고통 속에서 거울로 탄생하는 시인을 만나기는 정말 어렵다. 체험의 숙성이 생략된 상상력으로 포장된 시는 한 때 환호 속에 묻힐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검gum 처럼 버려지기도 쉽다. 이와 같이 조경옥은 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시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4. 세월을 품은 풍경 속으로

 

 

  가슴에 슬픔이 차오른다.『말랑말랑한 열쇠』를 읽어 내려가면서 가슴에 차오르는 슬픔이 따스해짐을 느낀다. 시인 조경옥은 사라지고 옆으로 기어가는 소나무가 보이고, 저수지를 지나며, 만월을 꿈꾸는 모자란 달을 의지해서 오래 전에 미련 없이 떠난 옛집에 당도한다. 그곳은 허물어지고 거미줄이 우주를 휘감고 있으며 뿌리걸음을 걷고 계신 저승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풍경 속에 시인이 자리 잡으면 그 시는 시인의 내력이 되지만, 풍경 속에 시인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 시는 시를 읽는 독자의 풍경이 된다.「옆으로 기어가는 소나무」,「저수지」, 「모자란 달이 만월을 꿈꾼다」,「 뿌리걸음」,「 옛길 따라 옛집 간다」 와 같은 시들이 후자에 속하는 시편들이라면 「어머니」연작, 「그루터기, 그 오래된 길」, 「신광사에서」와 같은 시들은 전자에 들 수 있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작 詩作의 원리에 따라서 화자의 거리조정이 실패할 때 시들은 진술이 되고 설명이 되며 시인의 내력을 그러내는데 조급함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전문을 인용할 수는 없으나 「그루터기, 그 오래된 길」은 대화체의 산문시로서 드물게 나타나는 조경옥 시인의 실험작 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산문시의 성격과 정의가 심화된다면 분명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시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서 후자에 들어가는 시편들은 시인의 세밀한 관찰에서 비롯되는 회화적 이미지와 사물의 본질이 아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 속에 독자들을 침잠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비탈길의 그 나무

옆으로 기어가는 소나무

(중략)

세상에 옆으로 크는 나무 있으니

옆으로 눈뜨는 이도 있겠지

같은 방향을 오래 보면 알게 될까

눈물겨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

                                                 -  시 「 옆으로 기어가는 소나무」부분

 

 

측량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무수한 말이 잠긴다

답을 기다리던 물음말도

가라앉아 물이 되는

저수지는 묵언수행 중이다.

                                                - 시 「저수지」 마지막 연

 

 

 

 이 밖에도 길다랗게 달빛길이 열리면/이끌리듯 달빛 아래 모여든다 / 주춤거리던 산들도/ 허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가만가만 내려선다. -「모자란 달이 만월을 꿈꾼다」부분, 아득한 곳에서/ 더듬거리며 하나 둘 기어나오는 기억들이/ 굽이진 길 옆 미루나무가 되었다가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도 된다 -「 옛길 따라 옛집 간다」부분 처럼 주관적 정서가 배제된 풍경의 묘사는 조경옥 시인의 탁월한 재능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기왕에 재능을 이야기한 까닭에 몇 마디를 덧붙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조경옥의 시가 전위적이고 감각적이라기보다는 전통적 서정에 기울어 있음은 『말랑말랑한 열쇠』를 읽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흔히 전통 서정시를 비판할 때 내세우는 '퇴행적 정서로의 함몰'이 조경옥의 시편에서는 대체로 성공적으로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 「거미줄」은 쇠락한 폐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적막이 흐르던 집이 살짝 기울어지면 /그곳을 그들만의 세상으로 채우는 거미가 있다. 거미는 불온과 퇴폐의 상징이다. 야비함의 거미줄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거미줄에 걸리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거미줄에 걸리기 전부터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슬도 거미줄에 걸리면

조롱조롱 빛나는 보석이 되더라.

 

 

 어디 이 뿐인가? 끈끈한 부성애를 그린 「뿌리걸음」은 나무가 지니고 있는 여성적 상징을 일시에 에너지가 충만한 남성적 이미지로 치환하는 예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탈길을 가로지르는 뿌리

나를 불러 세우는 아버지 다리 힘줄 같다.

 

땅 속으로 오래 걸었을 뿌리

가파른 그 길에 튀어나와

자빠뜨리고 일으켜 세운 이 얼마나 될까

허걱허걱 걷는 내 걸음에 아버지 심중이 실린다.

 

 

이와 같이 조경옥은 무심한 듯 보이는 사물에 시간의 이끼를 아름답게 덮을 수 있는 저력을 지니고 있다.

 

 

5. 시인은 은자 隱者이다

 

 

  조경옥은 정직한 시인이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 자신이 깨달은 것이 아니면 시르 옮기지 않는다. 체험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순간에 폭발하는 감각과 환상에 말을 던지는 어리석음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심성이 시인으로서의 조경옥을 바로세우기도 하고, 발목을 잡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의 앞에서 첫 번째 시집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 바도 있거니와 이 번 시집이 첫 번 째 시집이 지닌 특징을 심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적인 성취를 거두어들이는데 전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소통의 문제를 화두로 삼았다. 인뢰 人籟가 가득한 세상에서 소통은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끝난다. 하늘을 우러르거나 땅에 귀를 대지 않아도 우주는 끊임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멀리 나아가고 그 먼 곳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조경옥은 바로 이곳에서, 눈 앞에 있는데도 숨어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사물과 현상과 사건들이 우주의 숨소리임을 설파한다. 마지막으로 내려놓는 시 「깃털의 무게로」는 시간과 공간에 갇혀있으면서 너와 나의 소통을 꿈꾸는 자유를 노래한다.

 

 

 

깃털이 날린다

바람 타는 가벼운 깃털

앞장서 달리는 닭장차에서

닭의 몸뚱어리는 두고 깃털만 빠져나와 자유롭다

비상과 하강을 거듭하며

갇혀있는 나를 유혹한다

차창에 갇힌 내 몸

몸에 갇힌 내 의식

아, 간지럽다.

 

바람이 창 밖에서 불면

닫힌 창 안도 바람을 탄다

바람이 닿는 자리마다 날개가 돋는지 근질거린다

여물지 못한 나는

몸뚱어리 꼭꼭 여미고

날갯짓 잠재우는 노래만 불렀다

날개 퍼덕여 훨훨 날아갈 노래는 왜 부르지 못했을까

 

가볍게 닭털이 날린다

갇힌 닭의 몸을 놔두고서 훨훨 날아간다

창을 삐긋이 연다

숨소리 같은 게 새어나간다

내 혼이 깃털에 얹힌 것인가

내가 날고 있는 것인가

몸이 가볍다.

 

 

그렇다! 조경옥은 우주의 숨소리를 음각 陰刻하는 隱者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