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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넘는다는 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8. 31. 10:35

뛰어넘는다는 것

 

                        -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나 호 열

「봄.여름.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요즘 한참 성가를 올리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다. 마침 이번 6월호에 한옥순님의 산문을 읽다가 몇 마디 말을 붙이고 싶어 덜컥 이번 호 덜컥 화두로 잡아 보았다.

 

 작금의 한국 영화는 양과 질적인 면에서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듯 하다.지난 달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올드보이」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아 만방에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알린 바 있거니와 이제는 헐리우드 영화에 필적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보여지는 현실에서 한국 영화의 저력이 마치 작은 거인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풍부한 자금력과 마케팅 그리고 거대한 소비시장을 거느린 헐리우드의 기획력도 이 조그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들어와서는 그 힘을 잃고 마는 것을 보면 한국영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자국의 영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스크린쿼터제가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 자유경쟁체체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오늘의 한국영화의 성과가 홍콩영화산업의 쇠퇴에 따른 반사이익이라는 것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비약적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아야할 몇 가지 요소를 지적해내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그 한 예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개성이 강한 연출자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그 선두에 김기덕이라는 감독이 자리잡고 있음을 눈여겨보자.열 편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들은 일정한 흐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前篇을 부정하고 뛰어넘으려는 열정에 가득 차 있다. 그의 「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성과 그 폭력성에 기대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학적 인간의 숙명을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동승이 힘없는 작은 생명에 가하는 폭력이 그 다음 代에서도 여지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悉有佛性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몽환적인가 하는 점을 보여줄 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구도를 염두에 둔 佛敎映畵가 아니라는 점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감독이라는 자리는 자금과 연기자와 그 이전까지의 자기가 쌓아왔던 명성이나 연륜과 혹독한 싸움을 벌어야 하는 존재이다. 거기에 덧붙여 흥행이라는 최후의 일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현실과 마주 서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감독은 그 어느 것과의 싸움에서도 타협과 비겁으로 스스로를 몰락시킬 수 없다.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실험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혼자 걸머져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것이 감독이라는 자리이다.

 

 

 잘 알다시피「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주무대는 주왕산으로 유명한 청송의 조그만 호수이며. 그 가운데에 절(세트)을 지었다. 그곳, 사계의 영상미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호수 가운데 그 절은 철거되어 이 세상에 없다. 아마도 김기덕이 노리는 바는 영화를 추상하는 사람들에게 그 추상의 덧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앞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 불교를 토대로 한 구도영화가 아님을 언급했거니와 실제로 우리는 지난 시간 속에서 불교의 교리와 성자들을 소재로 한 뛰어난 작품들을 보아 왔다. 그 작품들은 범상한 인간들에게 이 세상에 숭고함이 존재하며, 그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선인들의 궤적을 통하여 우리의 이상이 바로 저 너머에 있음을 계몽하려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김기덕이 생각하건대, 우리의 구도는 저 먼 곳에서, 우리와 상관없는 몇몇 사람이 이루어가는 범상치 않은 일이 아니다. 바로 이 곳에서 지금 우리가 치열하게 먹고,자고 배설하는 행위 즉 범상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봄, 여름,가을, 겨울이 지니면 또 봄이 이어지듯이 業은 쉬임이 없는 것이다. 나의 업은 너와 우리와 이어져 있고, 결코 업은 끝나는 법이 없다는 것...그래서「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불안과 고통,평화보다는 투쟁의 현장성을 오래오래 각인시키려는 불안을 노정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영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되새겨 본다면 관람객의 평판과 선호도에 이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도발적으로 영화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방법으로서 작가나 감독의 개성을 고집스럽게 밀고가는 도전 정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향수자들은 변덕이 심하다. 그리고 참을성이 없다. 구태의연하고 이미 구도를 알고 있거나 뻔한 수법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작품이 시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생산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그래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스스로 잊혀지지 않으려는 가여운 운명을 걸머지지 않으면 안되는 우스꽝스러움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쯤에서 우리가 왜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속내를 드러내어야할 것 같다. 우리가 시를 짓거나 수필을 쓰는 행위는 영화를 만드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종교영화의 범주에 넣는다면, 구도를 행한 분투쯤으로 보아야한다면 그보다도 훌륭하고 영상미가 뛰어난 작품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김기덕이라는 사람의 미덕은 '뛰어넘는 것'에 있다.

 

 

 '뛰어 넘는다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넓게, 보다 높게, 보다 빠르게는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에 훌륭한 정신과 덜 훌륭한 정신이 존재할 수 있는가? '뛰어넘는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창조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다르게 보는 정신활동에 다름 아니다.

 

 사물과 현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능력이다. 우리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는 관객들의 의중을 살피고 관객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약삭빠름이 아니라 관객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관객들의 무의식적 열망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수요의 욕구를 촉발시킨다고나 할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과거 체험의 공유가 아니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독자들을 작가의 의식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것, 거부할 수 없도록 늪으로 가두는 것....

 

 

 이번 6월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왜 작가들이 독자들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지, 왜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오만불손(?)하면 안 되는지 생각이 어지러웠다.

 

 

 

 * 소요문학 6월호 시평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