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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의 섹슈얼리티 ( 시와 소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8. 26. 15:25

소설 속에 나타난 섹슈얼리티

 

 

                                        허만욱

 

 

 

1. 섹슈얼리티의 정체성, 성적 욕망의 다층적 서사

 

 

  섹슈얼리티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서구에서 대두된 성과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프로이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성과 관련된 생각이나 성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규범, 성 정체성 등 성과 관계된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을 말한다. 섹슈얼리티가 현대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푸코의 연구로 촉발되었으며, 이를 통해 성에 대한 전통적 인습과 인간의 성을 억압하는 권력 내지 그 지배 형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가능해졌다. 푸코는 섹슈얼리티를 담론의 문제이자 권력의역사적인 장치로 간주하면서 권력이 어떤 담화의 경로를 통해 가장 사적이고도 은밀한 인간의 성적 욕망이나 쾌락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규제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억압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푸코에 따르면 섹슈얼리티는 근대사회가 고안한 독자적인 역사적 구성물로써, 성을 하나의 본질로, 혹은 어떤 고정된 범위의 현상으로 규정짓는 시각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래서 섹슈얼리티는 성적인 욕망이나 성적인 정체성 및 성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적인 감정과 성적으로 맺게 되는 관계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는 성을 다양한 사회와 문화적 맥락 내에서 다른 사회관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 전제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섹슈얼리티는 성별뿐만 아니라 계급, 인종, 연령, 성적 선호, 규범, 제도들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점에서 유동적이고 다원적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성적 욕망이나 성적 정체성은 주체의 맥락적 위치에 따라 구성되는 일련의 과정이므로 남성/여성, 이성애/동성애, 게이/레즈비언과 같은 성적 범주의 경계는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성을 문제시한다는 것은 성을 사회적으로 ‘좋은 성/나쁜 성, 정상적인 성/비정상적인 성, 자연적인 성/일탈적인 성’ 등으로 위계화하는 것에 대한 도전을 말한다.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일련의 성적 위계 구조를 가지게 마련인데, 이러한 구도 속에서 사회가 인정하는 성은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것이 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성은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주변화된다.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거론하는 것은 단순히 성적 욕망이나 성 행위 혹은 이의 표현 방식을 살펴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맥락을 중층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에서 성이 개인의 내밀한 경험 영역으로만 그려지거나,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성소聖所처럼 그려지는 경우라도, 이를 사적인 체험 차원에만 국한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좀더 폭넓은 사회·경제·문화 등 중층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그렇게 해석해야만 그 의미가 명확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푸코의 성 담론은 성을 타고난 본성이나 사적 체험의 차원에서 일면적으로 해석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성을 좀더 다양한 코드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성에 대해서 절대적 긍정이나 절대적 부정으로 측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섹슈얼리티는 체제 순응적인 유순함에 가깝다가도 어느 순간 체제 전복적인 과격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는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공적인 장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소설 속의 성, 예술과 외설의 경계선

 

 

문학과 성, 특히 현대소설과 성의 관련성은 그것의 친밀성이 연구자에게 가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대상으로 향하는 길이 무한히 열려 있거나 혹은 복잡한 미로여서 자주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소설이라는 장르의 포괄성이나 다층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성이라는 개념을 무엇으로 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방식 역시 상당히 애매하다. 그러나 그 애매성은 성의 문제가 결국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외설시비는 언제나 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복잡성이 야기된다. 이때 외설猥褻이라는 개념이 선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역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늘상 이 틈에는 에로티시즘이 존재한다. 이것들의 의미는 생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궁극적으로는 은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본능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즉 열고자 하는 본능과 닫고자 하는 이성 사이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특히 성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난 이래 숙명의 꼬리표처럼 인간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언어로 표현해 낸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상 문학 속에서의 성 및 그 표현 역시 결코 피할 수 없는 주요 얘깃거리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예술(문학)이 되기도 하고 천박한 외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과 에로티시즘의 문제는 문학에 있어서도 역시 주요 모티프가 되어 왔다. 중세라는 그 엄격한 금욕의 시대에도 오히려 현재보다 더 많은 종류의 금서목록들이 있었으며, 사대부 중심의 유교문화가 득세하던 조선조 우리 판소리 사설 등에서도 많은 외설스런 표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영문학의 고전인 초서G.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와 이탈리아 문학의 고전인 보카치오G. Boccaccio의 『데카메론』, 그리고 동양의 고전인 『아라비안나이트』 등도 모두 성과 에로티시즘을 중요한 주제로 차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 성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예술적 주제를 표출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캔터베리 이야기』는 여행의 모티프를, 『데카메론』은 고립의 모티프를, 그리고 『아라비안나이트』는 스토리텔링의 모티프를 각각 에로티시즘과 연결시켜 뛰어난 예술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라비안나이트』는 세헤라자드와 왕이 보여주는 에로티시즘을 축으로 해서 성을 주제로 한 수많은 작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이야기하기’의 주제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사실 『아라비안나이트』가 시작된 배경 역시 왕비의 성적 방종과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강렬한 에로티시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아라비안나이트』는 외설물이 아닌 문학적 고전으로 평가받아 왔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성을 스토리텔링하면서, 곧 창작과 연결시켜 작가의 글쓰기 문제를 성찰하는 한 훌륭한 모티프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라비안나이트』는 이미 오래 전에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문제를 평가할 수 있는 기본 척도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와서 문학작품의 에로티시즘이 법정문제나 금서문제로까지 비화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로렌스D.H. Lawrence 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일 것이다. 성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이며 생명의 원천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이 작품은 남녀의 난잡한 성행위를 토대로 하여 관능성을 미덕으로 찬미하고 사상 및 언어의 저속성과 비속성을 조장시킬 뿐이라는 요지로 법정에 제소된 것이다. 로렌스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문명의 가식을 싫어했으며 억눌린 인간의 본성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을 성적 억압이라고 보았던 원시주의자primitivist였다. 그리고 외설시비로 법정투쟁을 벌였던 또 다른 작품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있다. 이 작품은 종교조차도 의미를 잃게 되고, 과학문명의 지배로 인해 인간사회가 억압된 상황에서 결국 우리가 귀착할 곳은 ‘생명’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이미 비평가들의 소신있는 증언과 판사들의 용기 덕분으로 해금이 되었고 독자들의 손에 들어와 있다.

 

한편 외설시비가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미국 작가 헨리 밀러 때부터일 것이다. 그는 외설 파문으로 인해 망명객으로서 파리에 머물며 반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순수문학과 외설문학의 경계를 논할 때마다 언급되는 대표적인 작가다.

 

1934년에 출판한 『북회귀선』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외설시비는 그 이후에 출판된 다른 작품들에도 그를 내내 따라다녔지만, 그는 드디어 법정판결을 통해 당당한 본격작가로서 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당시로선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담하고 솔직한 성행위의 설명, 자세하고 적나라한 여성 성기 묘사 등이 결국 인간 문명의 의례적 관습이나 위선과 도덕의 가면을 벗어던진 저항의 선언문으로써 그 작품성을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북회귀선』의 서문에서 애나이스 닌Anais Nin은 “이 작품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은, 우리 시대 불모의 토양 속에서 말라 죽은 세계를 몰아내는 한바탕의 훈훈한 세계이다. 이 작품은 그 뿌리 밑으로 파고 들어가, 그 뿌리를 소생시키기 위해, 그 밑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게 만든다?”고 하며 이 작품의 예술성을 옹호하였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문명의 모든 가식과 허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운데서 만나는 자신과의 솔직한 대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밀러는 로렌스와 비슷한 원시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밀러의 『북회귀선』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는 예술가의 영원한 정신적 방랑과 구도求道를 그려낸 점이다. 바로 이것이 끊임없는 외설시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하나의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준 핵심 요소가 된다.

 

국내소설에서도 성과 에로티시즘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가 되고 있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와 『너에게 나를 보낸다』 그리고 하재봉의 『콜렉트 콜』같은 소설이 문제작으로 대두되었었다. 특히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법정문제로까지 비화된 대표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작가에게 성의 문제는 대체로 만화적 상상력, 비현실적인 우화 공간의 구성과 관련되어 설명되거나 그들의 성적 상상력의 세계가 허위의식으로 불구화된 현실을 반영하고 그 현실 속에 억압된 무의식과 일탈 욕망의 분출의 메타포로 얼버무려지는 한편, 끔찍한 포르노 소설의 차용으로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위악적 묘사의 이면에서 새로운 성관계 묘사에 대한 과장되거나 시행착오적이거나 용감한 실험적 모색을 읽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섹스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섹스는 그저 하나의 통과의례로 전락했으며, 진정한 교류는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들은 앞으로도 부단히 성과 에로티시즘의 문제를 작품 속에서 다루어 나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관능적 자극에 그치지 말아야 하며, 더 심오한 문학적·예술적인 모티프를 표출하는 상징적인 은유로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소설이 추구해야 할 섹슈얼리티, 열린 사고와 이타적 인간관

 

 

 인간의 삶 속에서, 그리고 그 표현 장르의 하나인 소설 속에서 섹슈얼리티는 결코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성은 많은 부문을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성이 거의 지배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성은 인간의 전 생애를 지배할 만큼 특별하고 신비로운 힘을 지닌 존재로 부각된다.

 

그런데 성에 대한 표현에서 그것이 생산적이냐 소비적이냐, 또는 미적 감동을 주느냐 혐오의 감정을 주느냐의 문제는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문학 속에서 성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는 변증법의 논리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문학 속의 성을 둘러싼 모든 논의, 즉 전통과 현대, 자유와 제한, 닫힘과 열림, 나아가 예술과 외설의 문제 등은 어느 한 쪽의 개념과 시각만으로 결코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즉각적인 반응보다는 좀더 시간이 흐른 다음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관련 하에 비평가와 독자들이 이 문제를 변별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학이라 할 수 있는 문학 특히 소설에서 추구해야 할 섹슈얼리티는 어떠해야 하는가. 예술과 외설의 분별이 시대와 사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가치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의 성과 에로티시즘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진정한 이타利他의 손길로 되돌릴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 초월적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야만 한다.

 

최근 근대의 사랑의 감정과 결혼 제도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는데, 이것은 탈근대의 모색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과정일지 모른다. 인간의 자유로운 개성을 존중하고 남녀의 차이의 문제를 되짚어볼 때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청춘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고난 끝에 결혼하거나 혹은 그것이 불가능해져 비탄에 빠진 채 비극적 결말로 나아가는 구조의 사랑 이야기는 소설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섹슈얼리티가 재생산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사랑의 절대성에 대해 회의가 일기 시작한다. 재생산의 고리에서 자유로운 지금 이 사회에서 성이란 인간의 여러 감각 중 하나이고 생활의 일부분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람들은 냉정을 되찾고 온갖 금기의 억압 속에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힘들 정도로 성화性化되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앞에 놓여졌던 성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요즈음 그 어느 시대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으면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는 포르노나 성 억압의 금기를 깨는 온갖 몸부림들이 난무하는 지금의 섹스에 대한 담론들은 과도기의 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고해성사에나 등장했던 성적 언어들이 이제 공개 석상에서 거론되며, 그 위악성에 압도된 독자들은 다시 그것을 둘러싸고 온갖 담론들을 교환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신성하게 생각하는 남녀 간의 사랑의 개념은 친밀감의 일종으로 상대화되면서 다양한 인간관계 속으로 확산되어야 할 시점에 우리가 와 있는지 모른다.

 

 

허만욱 / 1961년 출생. 문학평론가. 『문학과 비평의 이해』, 『문예창작의 이해』,『현대소설의 이해와 비평적 감상』, 『여성소설에 나타난 내면의식의 형상화』 외 다수. 현재 남서울대 국문과 교수.

 

 

생명성, 생산성으로서의 몸의 귀환

                                                      정유화

 

1. 성의 문학은 위반의 시학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상호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양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동일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지녔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지만,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본성을 지녔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 본성을 ‘선한 본성/악한 본성’으로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전제로 한 것이 된다. ‘선한 본성’으로 주장한 것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이성적 욕망을 주된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며, ‘악한 본성’으로 주장한 것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감성적 욕망을 주된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선한 본성의 발현은 다름 아닌 이성적 욕망의 산물이다. 이에 비해 순자가 말하는 자기 이기적인 악한 본성의 발산은 감성적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양자의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후천적인 교육[禮]으로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 교육에 의해 인간은 윤리·도덕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대신에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은 윤리·도덕에 의해 지속적으로 억압당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선설과 성악설은 그 기본적인 차이가 노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을 억압하는 동일한 코드로 작용하게 된다. 물론 순자가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을 본성으로 보긴 했지만, 그 본성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함[惡]으로써 정신주의에 귀속당하고 만다. 이와 같은 정신주의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육체주의를 억압하는 결과를 산출하게 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코드를 성sex의 코드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인 성에 대한 의식을 보면, 거기에 육체성을 부여하기보다는 주로 정신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의식도 사회적 제도에 의한 무의식적 소산물이다. 그래서 성,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동물적 본능으로써 경계하고 억압해야 할 열등한 기호로 자리 잡게 된다.

 

문학이 추구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 탐구이다. 그것을 위해 문학은 사회적 제도를 위반하기도 하며 정신주의에 의해 억압된 육체주의를 복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예의 성이다. 문학 속에 성을 대상으로 한 주제가 시공간을 초월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정신주의 입장에서 보면, 성은 육체적인 기표로서 동물적인 것, 열등한 것, 본능적인 것, 감정적인 것, 맹목적인 것 등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성은 이성理性으로서 제어하고 훈육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신성 속에 육체성이 감금되면, 육체성은 무의식이 되어 의식 깊숙한 곳에 내장內藏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성의 억압은 인간 본질을 왜곡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문학이 위반의 시학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은 오히려 감추어진 것, 억압된 것, 왜곡된 것을 귀환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의 문학은 요컨대 몸(육체성)의 귀환을 요구한다.

 

이 글에서는 문학에 나타난 성, 즉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물론 성性의 의미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살펴 볼 수도 있으나, 이 글에서는 거기까지 외연을 확대하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항을 전제로 하여 본성으로서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위의 의미 및 성적 세계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살펴볼 것이다.

 

 

2. 우주적 유기체로서의 성적 욕망

 

 

 주지하다시피 서정주의 초기시에는 성에 대한 소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컨대 그의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가령, 「화사花蛇」라는 작품을 보면, 성적 욕망에 대한 관능적 열기가 시 텍스트 공간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물론 성적 욕망은 화사花蛇 즉, 꽃뱀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시적 화자의 감정 가치는 양가적兩價的이다. 예를 들면, 성적 욕망에 대한 시적 화자는 ‘미/추, 선/악, 이성/감성, 정신/육체, 유혹/저주, 이상/현실’ 등의 대립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기 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정주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육체적인 성적 욕망을 전적으로 긍정하려는 강한 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정주 시인이 정신주의, 이성주의에 의해 열등한 기표로 전락한 육체적인 성을 시 텍스트 공간으로 호명하여, 그것이 추구하는 욕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몇몇 시 텍스트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욕망에는 육체적인 성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예의 육체적인 성에 대한 정신과 이성의 판단을 모두 괄호 속에 넣고서 말이다.

 

 

 

따서 먹으며 자는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强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대낮」 전문

 

 

 

                              *핫슈 : 아편阿片의 일종.

 

 

 이 텍스트에는 대립에 의한 갈등이 모두 소거消去되어 있다. 성적 욕망과 행위에 대한 선악善惡의 판단은 중지된 채, 오직 성애性愛에 대한 황홀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 동안 사회 문화적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어왔던 성적 본능의 세계, 육체적인 몸의 세계가 고스란히 복원되고 있다.

 

이 텍스트에서 ‘붉은 꽃밭’은 모든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은 자유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피’로 상징되는 생명의 본능이 거리낌 없이 분출할 수 있는 곳이다. ‘피’는 정신성의 기표가 아니라 육체성의 기표이다. 서정주가 여러 꽃밭 중에서 ‘붉은 꽃밭’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꽃밭의 ‘붉은색’은 곧바로 코피의 ‘붉은색’으로 전환되어 ‘피의 세계’를 구체화하게 된다. 생명의 피를 가진 몸, 이는 현실원칙에 지배되기를 거부하고 쾌락원칙에 지배되기를 소망한다. ‘자는 듯이 죽는다는 꽃밭’,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등어릿길’이 예의 쾌락원칙을 실현해 주는 언술이다.

 

‘나’뿐만 아니라 ‘나’를 유혹하고 있는 ‘님’도 동일하게 쾌락원칙을 욕망하는 자이다. 물론 이 쾌락원칙에는 생生과 사死가 동시에 공존한다. ‘나와 님’이 함께 몸이 달아서 섹스를 하는 것은 생명의 분출이지만, 동시에 코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을 향한 세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가 성적 욕망의 세계를 긍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성을 담보로 하는 형이상적 원리보다는 감성을 담보로 하는 형이하적 원리가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잠복한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적 욕망이 계급을 중시하는 남성지배적인 사회, 자본이 지배하는 근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정주가 대상으로 한 성적 욕망과 그 성적 공간을 보면 쉽사리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대낮」에서 ‘나’를 유혹하는 인물은 여성인 ‘님’이다. 신화적 세계에서 여성은 대지모신으로서 생산성, 다산성 등을 상징한다. ‘내’가 그 ‘님’을 쫓아가며 성애性愛를 욕망하는 것은 곧 대지모신의 세계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여성주의 세계로의 회귀인 셈이다.(여성 주체의 세계) 가령 “땅에 누어서 배암같은 계집은/ 땀흘려 땀흘려/ 어지러운 나-ㄹ 엎드리었다”(「맥하麥夏」)에서도, ‘계집’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애의 공간도 도시나 마을이 아니라 ‘등어릿길로 난 붉은 꽃밭’, 즉 자연적인 공간이다. 이것 역시 자연주의 세계로의 회귀이다. 따라서 성적 욕망 및 성적 행위는 여성주의와 자연주의 세계로의 몸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려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입마춤」 전문

 

 

 여성주의와 자연주의는 남성중심주의와 달리 타자를 종속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또한 그 삶의 원리가 우주적 순행원리와 닮아있다. 부연하면 이성적 논리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 삶의 원리를 변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합해 보면, 여성주의와 자연주의의 삶은 모든 사물들이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유기체로써 평등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우주공동체적 삶을 체현體現하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시적 화자와 가시내, 석류꽃, 하누바람, 별, 노루, 개고리, 머구리’ 등의 존재는 바로 여성주의와 자연주의적 삶을 체현하고 있는 기호들이다. 이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유기체적 존재로서 타자의 삶을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은 채 각기 독자적인 삶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예컨대 ‘개고리는 개고리대로 머구리는 머구리대로’ 성적 욕망을 실현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땅에 긴 긴 입마춤”을 하며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라고 한 의미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성적 행위와 동물의 성적 행위를 다른 차원으로 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 인간 우월주의에 해당한다. 이때 성은 억압받기 마련이다. 시적 화자가 인간의 성행위를 동물적 차원으로 전환시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요컨대 그 이유는 인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한 존재에 지나지 않다는 유기체적 사유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정주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기존의 사회·문화적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기표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몸의 회귀야말로 우주공동체적 삶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서정주가 초기시를 거쳐 중·후기로 갈수록 ‘정신/육체’라는 이원론적 세계를 극복하고 일원론적 세계로 안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적 사유에 기인한다.

 

 

3. 섹스를 통한 상생의 기쁨과 생산성의 의미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본능적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본능적 욕망이 시대적 상황과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출되는 양태가 달라질 뿐이다. 말하자면 그 성적 욕망에 대한 의미 부여가 다르다는 점이다. 가령, 40년대의 서정주가 사유한 성적 욕망과 80년대의 이성복 시인이 사유한 성적 욕망을 보면, 그 시대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그 본능적 욕망에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의 성적 욕망에 대한 배설 방법과 그 의미 부여이다.

 

80년대는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양적으로 성숙하고 팽창하던 시기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있어서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외형적으로는 물질과 자본의 풍요를 구가謳歌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풍요를 가능케 한 것은 도구적 이성을 담보로 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체제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을 점유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성적 욕망 역시 자본주의 체제 방식대로 배설·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즉 생산과 소비의 방식대로 그렇게 성도 하나의 물질로서 생산─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질화 도구화된 성적 욕망은 윤리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성적 타락은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를 고착화하는 동시에 이에 순응하는 사회적 기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성복은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한 성적 욕망을 통해 두 가지 의미를 포착해 내고 있다. 하나는 ‘부/가난’의 대립항을 고착화하는 자본주의의 병폐성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성이 소거된 불모의 육체성이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이 욕망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병폐성을 반성하는 동시에, 생명의 신비성이 내재한 몸의 세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성적 욕망에 대한 시적 표현과 장치가 서정주의 그것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생명성’에 귀착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거기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다 가슴인지 엉덩인지 모를 부드러운 것이 어른거렸고, 잡힌 손과 손이 풀렸다 다시 잡히고 꼼짝할 수 없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크게 소리치거나 고개 떨구면 소리없이 불려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눌러앉아 밥을 먹고 변을 보았다 지치면 가족이나 옆사람을 괴롭혔다 쉽게 노여움이 들었고 발 한번 밟아도 불구대천 원수가 되었다 어떤 녀석은 사촌누이의 금이빨을 뽑으러 달려들었다 목을 졸랐다 조금 더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기도 했다

 

조금 더 밝아질 때 희망이라고 했다 다시 어두워졌을 때 희망은 벽 위에 처바른 변 자국 같은 것이었다 천장은 땀에 젖었고 처녀들의 가슴에선 상한 냄새가 났다 까르르, 처녀들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졌을 때 사내들은 눈꺼풀이 내려온 처녀들을 향해 바지를 내렸다 욕정과 욕정 사이, 영문 모를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희미한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아, 꺼졌으면 하고 중얼거렸다 꺼지지 않았다

 

 

                                                                        ―─「희미한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전문 1)

 

 

 이성복의 표현을 빌리면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은 유곽遊廓이다. 이곳에는 몸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처녀들이 기거起居하고 있다. 이 기거 공간을 보면, 서정주 시에서처럼 ‘붉은 꽃밭’, ‘콩밭’ 등의 열려진 자연공간과 달리 도시의 어느 밀폐된 허름한 ‘방’ 공간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유곽’은 인위적인 장소로써 몸을 감금하고 억압하는 폐쇄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곽은 그 자체로써 비정상적인 삶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유곽 안에서 이루지는 행위들이 모두 정상을 일탈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예컨대 ‘가슴인지 엉덩인지 모를’ 정도라는 언술,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는 언술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눌러앉아 밥을 먹고 변을 보’는 이상異常행위, ‘가족이나 옆사람을 괴롭히는’ 폭력행위, ‘발 한번 밟아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배타排他행위, ‘사촌누이의 금이빨을 뽑으러 달려드는’ 배금拜金행위 등도 그러하다. 또한 “크게 소리치거나 고개 떨구면 소리없이 불려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행위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곽의 처녀들이 타자의 조종에 의해 기계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성적 욕망만 배설되는 이 유곽은 희망을 전혀 내포할 수 없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래서 육체적 욕정만 배설될 뿐, 섹스를 통한 더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부연하면 처녀들의 몸과 사내들의 몸은 ‘돈’을 매개로 하여 상호 욕망을 교환하는 도구적인 몸이 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내들이 처녀들을 향해 바지를 내리는’ 폭력적인 욕정은 ‘처녀들의 가슴에서 상한 냄새가 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처녀들의 몸은 사내들의 욕정을 배설해 주기 위한 용기容器로서의 몸으로 존재하게 된다. 말하자면 생산성이 없는 부패의 몸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복 시인이 사내들의 욕정만을 부정하고 처녀들의 욕망(돈)만을 긍정적으로 수렴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내들과 처녀들은 병폐를 지닌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가령,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그러나 어느날 우연히」)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재벌과 고관의 정략적인 결합에 의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물론 부조리한 자본주의 체제로써 말이다. 그리고 이 자본에 의해 희생되는 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힘없는 사내들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들의 사회적 불만을 일소一掃하기 위해 유곽이라는 성적 배설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이들로 하여금 성적 욕망을 해소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곧 사회적 불만을 성적 욕망의 배설을 통해 교묘하게 해소하려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내들도 희생자들인 것이다. 처녀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들이 사내들과 달리 이중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본’과 ‘사내들’에 의해서 말이다. “언제부터 젖가슴은 무덤을 닮았는가”, “누가 소녀들의 가랑이를 벌리고 말뚝을 박았는가 언제부터 창녀들은 같은 길 같은 골목에서 서성거리고 초라한 사내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가”(「신기하다, 신기해, 햇빛 찬연한 밤마다」)에서처럼, 소녀와 창녀는 ‘자본과 남성’에 종속되어 불모의 몸이 되고 있다.

 

이성복 시인이 성적 욕망을 통해서 비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자본에 의해서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한 성, 곧 불모화된 몸에 있다. 분명히 남녀 간의 섹스는 육체적 욕망의 소산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섹스를 통해서 상생의 기쁨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섹스에 대한 이성복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남녀 간의 섹스에 의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는 상생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

 

 

그대가 결혼을 하면 여인은 외부로 열린 그대의 창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 그대가 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그대의 창은 하나둘 늘어난다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을지 모른다 그처럼 또한 그대는그대의 아내와 아이들의 외부로 열린 창 그대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그대를 만나지 않을 때 그대는 벽이고 누구나 벽이 된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8」 전문2)

 

 

 

 결혼은 섹스를 전제로 한 남녀 간의 성적 결합으로서 하나의 사회적 제도에 속한다. 하지만 그 사회적 제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혼에 대한 의미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령 자본과 권력을 지배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은 남성적 세계에 종속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남편을 하늘이라 칭하고 아내를 땅이라고 칭하는 세속적 언사가 바로 그 예이다. 이렇게 결혼이 주종主從의 관계를 형성하게 될 때 ‘지배/억압’이라는 폭력적 의미구조를 산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섹스 또한 남성의 성적욕망과 종족본능만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의 몸은 그러한 섹스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이성복에 의하면 이러한 결혼, 이러한 섹스는 단절과 고립, 어둠과 죽음의 세계만을 낳을 뿐이다.

 

사랑과 결혼은 이성異性에 대한 ‘나’의 신비한 체험이다. 이성은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존재로서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그 이성의 본성을 다 탐색할 수가 없다.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연된 성의 의미가 허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이성과의 섹스는 단순한 성적 욕망의 배설을 넘어서 신비한 세계에 대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의 ‘결혼’이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즉 이성과의 체험은 닫혀진 세계에서 열려진 세계로 나가는 ‘창’을 발견하게 해준다. ‘나’는 그 ‘여인의 창(몸)’을 통해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창(몸)’을 통해 얻어진 ‘아이’들은 또 다른 창을 ‘나’에게 마련해 준다. 물론 그 아이들 또한 ‘나’의 종족본능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다. 사랑에 의한 섹스의 결실로 태어난 것이다. 예의 아이들도 나의 종속물이 아니다. 아이들 역시 나와 다른 존재[他者]로서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나에겐 신비한 존재이다. 주지하다시피 아이들은 미래시간의 기표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이들’의 창을 통해 신비한 미래까지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외부로 열린 ‘나의 창(몸)’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신비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섹스를 전제로 한 이성과의 결혼은 단순한 성적 욕망의 산물이 아니다. 이성과의 섹스는 그러한 육체적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주는 정신적 차원에까지 이르게 한다. 섹스를 통한 이러한 상생성相生性과 생산성生産性은 인간 존재에게 무한한 기쁨을 선사해 준다. 이런 점에서 이성과의 섹스를 통한 신비체험이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벽 속의 어둠에 갇힌 존재가 될 것이다. 상생과 생산성은 윤리 도덕에 기초한 것으로써 이성을 전제로 한 평등성을 요구한다. 이성과의 다름을 전적으로 인정한 가운데 ‘평등성’이 마련되어야 그것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sex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이다.

 

 

정유화 / 1962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으며 1987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인 편지』가 있다.

 

 

 

 

현대시에 나타난 섹슈얼리티

──여성시를 중심으로

                                       나호열

 

 

1.

 

 

 예술, 특히 문학에 있어서의 성性에 관련된 담론은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순간부터 추문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리 배제하려고 해도 성에 관한한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도구들이 달려들어 아귀다툼을 하는 형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생물학, 의학, 사회학, 법률 등등의 여러 잣대들이 성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을 이야기할 때에도 어느 경우에는 섹스sex, 즉 성행위 그 자체로 한정하는가 하면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섹슈얼리티sexuality로 고쳐 생각하기도 함으로써 막연한 오해의 증폭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푸코의 『성의 역사』 1권 역자 서문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요약한 다음의 글들은 관점에 따라 성에 대한 문제의 출발점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줄 것이다. 『쁘띠 로베르』사전에는 섹슈얼리티를 “성본능과 그것의 만족에 관계된 행동들의 총체”로 정의하고 있으며 『라루스 대백과 사전』 생물학에서는 “생물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성적이거나 성에 연결된 현상들의 총체”로, 심리학이나 성과학에서는 “성적 만족의 다양한 양태들 전체”이며 정신분석학에서는 “성적 충동들이 뚫고 지나가는 영역”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다시 요악을 한다면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동, 성적인 현상, 성욕 또는 성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성본능, 성욕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죄악시하는 사람은 없다. 분명 그것은 인간다움의 한 표징일 뿐만 아니라 존재 확인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 성은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거나 영생의 중요한 통로로 인식되는 경우보다는 마땅히 억압되어야 하고 그 억압의 강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온갖 추악한 혐의를 덧붙여 관습화하는 행위에 익숙해져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간의 우열의식─지금은 참을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우화에 불과한─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목적과 수단 ─종족 보존과 생식의 문제─으로써의 관계로 오랫동안 그 권능과 위의가 굳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 왜 우리는 성의 문제를 예술의 영역에서 다시 다루려 하는가? 한 올 남김없이 다 까발리고 난 뒤에는 진정한 화평이,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적 사유의 사슬이,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이 오기라도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영역에서 성은 찬미 그 자체가 아니면 친미의 대상으로, 아니면 보다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측면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자주 언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의 목적은 후자의 입장에서, 오늘날 여성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성의식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데 있다.

 

 

2.

 

 

성을 다룰 때 첫 번째 걸리는 암초는 외설의 문제이다. 멀리 나갈 것도 없이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도 외설로 촉발된 표현의 자유가 심심치 않게 문제시되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통제적 권위의 농도에 따라 관용과 처벌의 척도가 급격히 변화해 왔음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선까지가 에로영화이고 어디서부터 포르노인가? 춘화에 불과했던 김홍도의 그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춘화인가? 야동이 판치는 세상에 누드화는 어디까지 예술인가? 사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열린 사고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누더기처럼 너덜해진 이성이라는 근대의 추종자이거나 아니면 사회의 정글화를 묵인하는 존재들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란 어떤 조건하에서도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개체로 인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은 길들여질 수 없는 야성의 총체이므로 어떻게 하든 통제의 울타리 안에 인간을 가둬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존재한다. 그들은 법과 윤리의 쌍검을 들고 교화 敎化의 전선에 나서는 자들이다. 이들 또한 이성이라는 유령의 광신도들이다. 예술가들은 이성의 문제에 있어 이런 양 집단과는 태생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칸트 식으로 말한다면 이성은 원심력의 궤도를 벗어난 상상력의 우주이며, 이 상상력이야말로 예술가들의 게토이다. 더군다나 문학, 더 좁게 언어의 압축과 생략을 도구로 하는 시의 영역에서 외설의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지뢰밭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의 직접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한 대상─지시체─에 대한 언표는 자의적恣意的이고 그 기표는 끊임없이 기의에서 미끌어지는 것이지만, 기표가 일으키는 파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시에서의 성의 담론은 매우 조심스럽고 방어적이다. 이에 대한 고사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퇴계가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게 될 때 어느 누옥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는데 한 소년이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우리 말에 여자의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을 자지라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퇴계가 대답했다. “여자의 소음은 걸어다닐 때 감추어진다고 해서 보장지步藏之라 하는 것이고, 남자의 양경은 앉아 있을 때 감춰진다고 해서 좌장지坐藏之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 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자의 그것을 씁이라고 하고 남자의 그것을 좆이라고 하니 그 뜻은 또 무엇입니까?”

 

퇴계가 다시 대답했다. “여자는 음기陰氣라 축축할 습濕인데 우리 말에 된소리가 많아 씁이라고 한 것이고 남자는 양기陽氣라 마를 조燥를 쓰는데 이 또한 된소리로 좆이 된 것이다.” 퇴계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진 이 소년은 백사 이항복이다. 더 나아가서 외설의 문제는 퇴계의 다음과 같은 말로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몸의 일부분으로 그것을 타고 났고 글자와 음으로 이름을 지어부르는 것인데, 그 말을 하는 것이 무례가 된다는 말 입니까? 그렇지만 음과 양이 서로 통하는 것을 꺼려하는 까닭에 부인네들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지만 정당한 마음으로 말할 때에는 백 번을 불러도 거리낄 것이 없는 것입니다.

 

 

 

3.

 

 

외설의 문제와 결부해서 우리는 ‘몸’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몸은 정신의 짝으로써 하위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정신작용도 몸에서 비롯되는 것인데(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 이 몸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우리의 정신은 더러운 것에서 태어났으므로(원인) 마땅히 더러운 물질(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정신으로부터도 몸으로부터도 추방당하는 꼴(허무)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떻게 이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인간의 성적 욕망은 동식물의 생식 매커니즘과는 변별되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번식만을 위해서 성적 욕망을 현실화 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이라는 본질적인 관념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쾌락의 관념─ 몸으로부터 시작되는─이 기계적이냐(본능적) 아니면 선택과 자유의 의지이냐 하는 것이다.

 

최근에 정진규는 「몸시」 연작을 통해 몸의 ‘기계성’과 정신의 ‘자유’가 어떻게 길항하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바 이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미학적 측면에서 승화시켜보려는 실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며 오래 전 강우식은 사행시의 형식을 통해 ‘몸’이 구현하는 에로티시즘의 아름다움을 끈질기게 규명해 왔다. 그런가 하면 오탁번은 항간에 떠도는 와이Y담을 「굴비」라는 시로 변형시켜 성의 눈물겨운 정경을 플어내고 있다.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4.

 

 

대체적으로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성을 담론화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 시대 이후 여성시인들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김준오는 「한국 현대시 어디까지 왔나」에서 페미니즘을 수용한 여성시인들을 주목하고 있으며 그들의 성의 담론은 남성 시인들의 의식과는 사뭇 다른 양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80년대 시는 유파를 초월해서 언어가 가장 학대받은 언어의 수난시대다. 이것을 성의 모순을 테마로 한 페미니즘의 여성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승자, 김수경, 김승희, 고정희의 시에서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어조는 가부장적 억압의 산물이라는 인식에서 언어가 매우 토의적일 뿐만 아니라 저주·악담의 변두리 언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90년대 김정란의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시법」이란 시제 그대로 페미니즘 시의 언어 형식은 아버지의 기호 체계적인 전통 문법을 해체시처럼 파괴한다. 이런 페미니즘 문제는 해체주의 세계관이 굴절된 결과임은 물론이다. 자주 과장된 자학의 어조를 수반한 페미니즘 시도 90년대 고통과 타락의 책임을 자아와 세계가 공유하는 고백시로 전개되면서 그 신선한 시적 정직성으로 현대시의 한 변화 조짐을 부각시킨다.

 

또 정효구는 「해방 후 50년의 한국 여성시」(『시와 시학』 1995)에서 “시의 내용상의 변화 중, 소위 페미니즘 이론의 등장 및 여성운동과 발맞추어서, 여성 시인들이 여성해방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작품 속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어볼 수 있다고 하면서 그 당시를 지배했던 넓은 의미의 민중의식, 민주의식, 해방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시대적 정황은, 여성 시인들로 하여금 여성 시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당당한 인간 시인으로서, 그들 안팎에서 씌어놓은 여성 시인의 부정적 굴레를 벗어나게 만든 중요한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고 설파함으로써 여성시인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 기제로써 성의 문제를 표면화했다는 전략이 외설의 문턱을 과감히 넘어섰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껏 금기시 되었던, 가끔씩 가부장적 사회에서 파격으로 남성 시인들에게 허용되어 왔던 성의 문제는 몇 가지 갈래로 파생되어간다. 첫 번째로는 성에 관련된 어휘의 자유로운 사용, 두 번째로는 억압되고 갈취된 성의 폭로, 세 번째로는 여성이 스스로 ‘몸’의 미학을 완성하는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첫 번째로 앞서 언급했던 바 음란하고 퇴폐적이이서 사용이 억압되었던 단어들을 시에 과감히 차용함으로써 관습의 허무맹랑함을 전도시키는 전략을 말하는데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최영미는 예전같으면 속으로 감추어 둘 수밖에 없었던 연애를 여러 번 했다고 고백하면서(「마지막 섹스의 추억」) 인간적이지 않은 인간들보다는 늘 옆에 있어주고 순종적인 컴퓨터와 사랑하는 게 낫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아아 컴─ 퓨─터와 씹할 수 있다면! ──「Personal Computer」 마지막 부분

 

 

최영미에 비해서 김언희는 더욱 과격하게 성의 성역을 치고 들어가면서 가부장적 권력의 구조를 해체시킨다. 그녀의 시집 『트렁크』를 해설하면서 이승훈은 “끊임없이 떠도는, 흐르는, 멈추고 다시 흐르는, 집을 찾아 헤매는 욕망이다. 한마디로 앙티 오이디푸스의 세계이다. …그녀의 시가 보여주는 욕망하는 기계로써의 삶이 나를 매혹시켰기…”라고 말한다. 그녀는 “모든 애비는 의붓애비”로 몰아 세우면서 “개가죽을 쓰고 오라”고 야유하기도 하는데(시 「아버지, 아버지」 부분) 그 이유는 그 아버지가 폭압의 상징으로 “아버지의 바다로 가자/ 일렁거리는 저 거대한 물침대에/ 너를 눕혀주마/ 아버지의 바다에. 널/ 잠재워주마 (「아버지의 자장가」)라고 관습에 기댈 것을 유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언희는 성의 본능을 권력과 힘의 문제로 귀속시키면서 본능의 드러냄을 통해서 왜곡된 현실을 전복시키려는 또다른 욕망을 분출하고 있다. 이제 성적 욕망은 남성만의 것도 아니고 여성만의 것도 아니며 측량할 수 없는, 럭비공처럼 튀는 자유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밑에 깔렸던 여성의 욕망이 튀어오를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다고 생각되었던 생리적 매커니즘조차도 미적 현상으로 치환해 버리는 단계까지 진입한다. 김선우는 여성의 폐경을 여성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월경이라는 어쩌면 고통일수도 있는 여성의 의식을 저버리지 않는다.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산인다/ 폐경이라니, 엄마,/완경이야, 완경!

 

 

                                         ──김선우 시 「완경」 전문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존재인 한 평등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저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복 전쟁도 아니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 차이의 이해로부터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한국의 여성 시인들은 여류의 칭호로부터 당당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여성시인들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여성성의 미화에─그 자체로서─힘을 기울이는 한편 성性을 그들의 의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성역과 비밀과 소도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시에서 섹슈얼리티를 거론하는 것은 성의 분석과 해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세기 전에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은 달을 정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달은 여전히 창공에서 빛을 뿌리고 있고 여전히 우리의 영감을 건드리고 있지 않은가. 시대는 바야흐로 유니섹스의 시대이다. 남성의 여성화, 여성의 남성화, 남자다움, 여자다움 등등의 정형화는 어딘지 낡아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의 여성시가 걸어온 길이 또 어느 길을 잡아낼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성에 대한 화두는 분명 남성과 여성간의 상호투쟁을 유발하거나 미추의 이분적인 사고에 얽매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문정희의 시 「남편」은 분명 따스한 화해의 눈빛일 터….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나호열 / 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으며,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외 8권이 있고,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2005년 녹색시인상 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으로 있다.

 

*  세 편의 글은 계간 <<시와 산문>> 기획특집으로 문학에서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