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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시의 전개 및 실천방안 모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6. 1. 09:41

    녹색시의 전개 및 실천방안 모색 


                                                나호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


                                    -옥타비오 파스



1. 녹색시의 정의와 그 기반


 생명의 원형을 상징하는 녹색과 시가 결합될 때 우리는 만만치 않은 파장에 직면한다.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는 노발리스의 언명은 근대 이성의 부정을 함의하고 있으며 ‘녹색시’라는 새로운 전형은 휴머니즘과 반 휴머니즘의 그 어디쯤 어정쩡한 자리에 위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스운 얘기로 녹색은 인간만이 감지할 수 있고 인간이 작명한 색의 구분임을 상기할 때 휴머니즘에 대한 스멀거리는 조소를 금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시의 威儀는 무엇일까? 시인은 (豫)見者인가? (發)見者인가?”라는 지루하고 부질없어 보이는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녹색’ 또는 ‘녹색시’의 행로는 빛나거나 더욱 암담해 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잠시 되돌아보면 보기에 따라서 우리 문학사는 조급한 경향성, 계몽성에 너무 깊이 함몰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편 가름과 낯가림이 심했던 측면이 있다. 새로운 이슈를 들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세간적 욕망과 엘리트주의가 시인의 고요한 숙성을 기다리지 않음으로서 오늘날의 시인들을 강박하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 새로운 문제를, 기법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문에 불과한 주문과 응답 사이에서 전략으로서 소모되는  ‘녹색시’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이지엽은 서정과 믿음의 시학, 생명과 구원의 시학, 해체와 모순의 시학, 꿈과 욕망의 시학, 속도와 쾌락의 시학, 고독과 죽음의 시학, 존재와 성찰의 시학, 시대와 삶의 사학으로  한국 현대시의 층위를 구분하면서 생명과 구원의 시학은 80년대 이후 자각되기 시작한 환경파괴에 맞서 생명의 존엄을 긍정하는 생명시의 기반이며, 그 부정적 반응이 고독과 죽음의 시학이라고 주장한다.1) 

 

 생명을 중심으로 놓고 그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축과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과 경이로움에 대한 재발견의 축이 오늘의 녹색시의 기반이 되는 것임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환경과 생태에 관한 동일한 관점으로 생명시, 환경시, 생태시, 녹색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잠정적 결론을 내린다면 그 답은 ‘아니다’이다.

환경과 생태의 개념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실천 방향에 있어서는 다른 길을 걷는다. 환경은 제한적 개발을 묵인하지만, 생태는 인간이 쟈연의 일부분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녹색시’의 개념은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인간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시2), 환경은 인간과 그 둘레를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는 반면에 녹색은 자연과 인간의 둘레를 허물고 세계의 정화를 표현하므로 녹색시는 예술성과 현실성에 기반을 둔다는 관점3), 녹색시는 생태시와 환경시를 포괄하는 개념4)등 으로 명확하게 정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과제는 ‘녹색시’가 하나의 유행적 조류로 사라지지 않고 시창작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고 이미 많은 시인들이 선점한 환경파괴에 대한 고발과 자연 찬미의 업적을 뚫고 ‘어떻게 새로운 거점을 마련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낸다

                                            

                                       - 최승호 「공장지대」전문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 나태주 「촉」전문

  

2. 녹색시의 전개와 성과

 

  시인들의 숙명은 옥타비오 파스의 언명처럼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의 해답을 찾아나서는 고행에 있을 것이다. 시인이 걸머진 화두가 대중들에게 호응을 받든, 감화를 주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시인이 고독한 까닭은 그의 시선이 밖으로 쏠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고 흔들리고 파편화되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현실에 응전하는 시인의 태도는 천편일률일 수 없고 창작의 방법론 또한 상이하기 마련이다.


엄경희는 「한국 생태시의 위상」이란 글에서 작금의 환경시나 생태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즉 우리의 환경시나 생태시의 내용은 주로 ①아름다웠던 과거의 자연이나 농경문화에 대해 회상하고 있는 경우, ②자연이 붕괴되고 있는 현재 상황을 단순하게 드러내고 있는 경우, ③독자를 비판 의식보다는 감상적인 쪽으로 유도하고 있는 경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①의 예


한겨울에 다리공사를 한 적이 있다

콘크리트를 치는 삽질 속으로 소복눈이 쏟아졌다. 내장을 삶는 가마솥에도, 김장김치와 돼지비계를 볶는 솥뚜껑 위에도, 수제비만한 눈송이 뛰어들었다. 공사를 마치고 거푸집을 떼내자, 돼지 불알만한 구멍들 숭숭했다. 오줌보만한 것도 두엇 있었다. 그래도 볏가마니 그득한 경운기가 다니고, 트랙터며 콤바인 잘도 건너다녔다. 그런데 삼 년 만에 다리를 철거해야 했다. 산골짝 다랑 논까지 경지정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다리는 한나절도 안 되어 가라앉았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냇물을 막고 철근더미가 둑에 쌓였다

엉성했던 콘크리트의 구멍과 교각 틈바구니에 둥우리가 껴 있었다. 새들이 지푸라기며 보드라운 이끼로 공사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둥우리 위로 리어카가 지나가고 트럭이 부릉거리는 사이, 주먹만한 비곗덩어리와 돼지 불알 속으로 어미 새가 먹이를 나른 것이었다. 배고픈 눈송이와 돼지 오줌보에게 한 꾸러미씩 새알을 건넨 것이었다. 얼었다 풀렸다 하던 너털웃음과 김 무럭무럭 솟구치던 솥단지를 점찍어놨던 새들. 눈송이와 새들의 하늘 길처럼 아름다웠던 논두렁도 경지정리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논배미의 이름도 몽땅 사라져버렸다

사람 한 명 부르지 않고 레미콘이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었다. 헛배 부른 익룡의 내장 안에 사람 하나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하늘 깊숙이, 다시 새들이 날고 있었던가. 눈송이와 돼지 오줌보에 둥지를 트는 새가 있었다.

이정록, 「눈송이에 둥지를 트는 새」 전문(제비꽃 여인숙, 민음사, 2001)

②의 예

섭새마을부터 정선까지
길이 없으리라.
道理(도리)없으리라. 우선, 만지동이 잠기면
만지동 사람 목이 잠겨
아리랑 가락 나오지 않으리라.
그 위 된꼬까리 여울물 소리 없고
어디에서든 구석진 수달의 사랑은 끝나고
어라연의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은
별을 비추지 못하리라.

이하석, 「동강댐 막으면」 부분(녹, 세계사, 2001)

③의 예


 서해에 닿기 전에, 만경강과 동진강은
개펄에 이르러
진흙에다 몸을 문지르며 좀 놀았는데요

밤이 되면 물가에 알을 슬어 놓고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도둑게들의 발자국 소리를 다 듣고
손바닥만한 대합이 달빛을 한입에 넙죽 받아먹는 소리를 다 듣고
갯지렁이가 허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자기 삶을 밀고 나가는 소리를 다 듣고
때로는 가까운 바다에서 새우 떼가 꼬리로 일제히 세상을 탁탁 치는 소리도 다 들었다는데요

그때서야 바다로 스며들어
바다하고 한 몸이 되었다는데요

씨펄씨펄,
개펄이 소리 없이 죽어 가요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울음바다

강은 인제 망했어요

안도현, 「개펄에서 놀던 강」 전문(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현대문학북스, 2001)


 엄경희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환경과 생태를 주제로 한 요즘의 시들이 도식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보들은 사실을 더 사실적으로 아니 더 포장해서 놓여진다. 감각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영상들은 그동안 문학이 시가 감당해 내었던 계몽과 예지의 영역을 쉽게 침탈했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양상은 카메라 렌즈가 들어갈 수 없는 의식의 내면을 즉물적으로 반사해 내거나 분지된 세계의 조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추스르고, 자연의 호흡을 생명으로 환치하는 시인의 또 다른 의무는 막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폐해를 알면서도 그 거미줄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야유는 결국은 나 자신을 뜨겁게 껴안으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그 순간에도 그 자연을 핍박하는 모순은 견디기 힘든 수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소로우처럼 깊은 삼림에 은거하며 자연을 느끼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되새기기에 오늘의 현실은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 자신을 비롯한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일이 말살되어 가는 자연의 숨결을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절실하다는 생각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5)


 시인의 의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나 대중들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는 형벌을 감수해야 하는 의무이다. 그 의무를 회피할 때 시인과 시는 교조주의의 달콤한 환상에 빠져들기 쉽다.

 

3. 녹색시의 미래와 시인의 역할


생명과 대화하려면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의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들어야 한다. 생명의 소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하늘의 소리가 아닌 땅의 소리이다. 현대인은 고통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현대인은 고통으로 소통하는 법을 잊어간다. 연민을 배우는 방법은 자신이 가슴을 통해서 뿐이다. 아픔을 통해서만 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통이나 아픔의 텍스트가 없고, 사유나 치유의 메타 텍스트도 없다. 절박한 현실은 언제나 한 줌의 안온함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휘발된다. 생명의 절대적이란 또한 순간적일지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상실의 고통 위에 새살이 돋아나 다른 대상을 찾아가면서 아픔은 치유된다. 오래 간직되는 것은 지상의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이 덧없기에 아름답고 사라지기에 하나뿐인 생명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잠깐동안 놓쳐버린 매듭처럼 익숙한 어떤 생명의 언어를 발견했을 때, 녹색시는 비로소 시작된다. 매듭이 없는 인간은 고달프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와 내일이 아닌 오늘의 시, 녹색시를 쓴다. 6)


 이충이는 지금까지 논의해 온 녹색시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적인 서정시나 관념시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시의 대안, 방법론으로 녹색시의 경계를 넓힌다. 최근의 경향이 抒情의 개념의 외연을 확대해서 ‘시 쓰는 행위’ 자체를 서정으로 보는 추세임을 감안할 때 의미의 충돌이 야기될 수 있기도 하고 , 이충이의 녹색시의 정의가 충분히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다고 보기도 힘들지만, 현재의 녹색시가 처해 있는 장벽을 뛰어넘고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려고 하는 시도로서는 마땅히 음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생명주의를 긍정하면서도 생명들의 유기적 관계, 즉 먹이사슬과 같은 거시적 동화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개체로서의 시인,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인식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성찰은 현실적 상황에 맞닥뜨려 있는 현존과 그것을 넘어서는 체험의 고통의 증언에 바쳐진다. 그러므로 그에게 녹색시는 자연 훼손에 뒤따르는 고발과 분노로 점철되어지는 막연한 자연회귀의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실존의 외마디 외침으로 각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생명주의의 요약이고 녹색시의 정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환기하는 것은 시인이 자연으로 숨어들어가 隱者가 되어야 한다거나 일방적인 자연의 찬양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 의미를 달리한다.


 이미 현대문명의 회오리 속에 갇힌 우리는 물질의 달콤함과 소비의 쾌락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은 그 궤도에서 이탈할 때 형벌처럼 다가올 재앙에 대해서 무서우리만큼 철저한 세뇌를 행하였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자연도 없다. 정체성도, 동일성도 찾을 수 없는 오늘이라는 세계에서 시인은 예언과 발견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이충이의 주장대로 시와 시인 속에는 수많은 타자가 들어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처럼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증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지 모른다.

  

4. 결어


 우리나라에서의 녹색시의 출현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있다. 해방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적 풍요의 반작용으로부터 비롯된 통렬한 반성과 자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녹색시가 담당해야 할 영역은 아직도 미개지로 남아 있다. 흘러가 버리는 일시적인 경향으로 끝맺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지평을 넓히는 도구로서 녹색시는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성의 품격을 유지해야 할 목표를 가지고 있다.


녹색시는 시의 원류이며 궁극적 도달점이다.!

 

주)

1) 이지엽, 21세기의 새로운 글쓰기 고요아침, 2005, 499-500쪽

2) 김지숙, 「녹색시의 연구」, 비평문학 제 14호, 2000년

3) 노철, 「녹색시」, 동양어문학 ,2000년

4) 신진은 녹색시를 생태와 환경의 개념을 포괄하는 틀로 정의한다.

5) 나호열, 「녹색시를 위한 변명,」 『시와 산문』 2004년 겨울호

6) 이충이, 「녹색시란 무엇인가」

 

 *  2009년 6월 6일 녹색시인협회 문학포럼에 발표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