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소통의 원리를 내포한 아날로그 방식의 집
정 유 화(서울시립대학교)
Ⅰ. 서정주의 시를 중심으로
1. 우주의 원리를 재현하는 그리운 옛집
인간의 몸은 소우주이다. 이것은 인간의 몸속에 대우주의 원리가 축소 응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 속에는 곧 대우주의 원리가 잠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우주화 하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인간이 거처하는 집도 소우주의 세계를 담고 있다. 집이야말로 우주에 대한 인간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집-우주’는 동일성을 이루고 있다. 가령, 생리적,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등뼈는 우주의 기둥이요, 배꼽은 우주의 중심이다. 집 또한 인간의 신체처럼 구성되어 있다. 집의 기둥은 인간의 등뼈이며, 지붕은 인간의 머리이며, 연통을 단 굴뚝의 통로는 하늘과 교섭하는 인간의 정신적 작용을 표상하는 이미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집에 거주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주에 거주한다는 뜻이며, 우주와 끊임없이 상호 교섭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집-우주’의 동일성은 신화적 세계 저 편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집을 통한 인간과 우주의 교섭 또한 상실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단적으로 아파트로 상징되는 디지털 방식의 집은 초가나 기와집으로 상징되는 아날로그 방식의 집에 비해 우주 교섭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아파트에 내장된 방이나 화장실을 보자. 여기에는 하늘, 달, 구름, 별, 혹은 나뭇가지 하나 들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다.
이에 비해 초가나 기와집에 딸린 방이나 화장실은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공간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마룻방, 토방, 마당방 등은 하늘과 교섭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써 천체적(天體的) 기호들이 사계절 살다가는 그러한 공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와 같은 방을 통해 사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직접 체감하게 된다. 또한 부엌, 마루, 방 등과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화장실, 즉 변소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지붕조차 없는 변소는 밤낮으로 천체적 기호들이 들락날락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오동나무나 감나무 등이 지붕 역할을 하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아날로그 방식의 집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집을 그리워하고 문학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인간과 우주가 소통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원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곧이어 감상할 서정주 시인의 「마당房」이나 「소망(똥깐)」은 다름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의 집이 얼마나 인간적인 가치와 우주적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정주는 이 작품을 통해서 집이 정신적(이성적) 원리에 의해 존재하기 보다는 육체적(신화적) 원리에 의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房의 우주화와 신화적 공간
디지털 방식의 집에는 방의 종류가 따로 없다. 동일한 기능을 지닌 방이기 때문이다. 흔히 큰방, 작은방, 혹은 엄마 아빠 방, 누나 방, 동생 방 등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은 기능에 따른 구분이라기보다는 거처하는 인물에 따른 명칭상의 구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날로그 방식의 집에는 방의 종류가 따로 있다. 물론 그 기능과 의미작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소망房」에는 네 종류의 방이 등장하고 있다. ‘온돌방’, ‘토방’, ‘마루방, ‘마당방’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방들은 제각기 고유한 기능과 의미작용을 한다. 이를 토대로 하여 ‘방’의 세계를 여행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옛부터 만들어 지녀 온 세 가지의 房 ― 溫突房과 마루房과 土房 중에서, 우리 都市 사람들은 거의 시방 두 가지의 房 ― 溫突房하고 마루房만 쓰고 있지만, 질마재나 그 비슷한 村마을에 가면 그 土房도 여전히 잘 쓰여집니다. 옛날엔 마당 말고 土房이 또 따로 있었지만, 요즘은 번거로워 그 따로 하는 대신 그 土房이 그리워 마당을 갖다가 代用으로 쓰고 있지요. 그리고 거기 들이는 정성이사 예나 이제나 매한가지지요.
陰 七月 七夕 무렵의 밤이면, 하늘의 銀河와 北斗七星이 우리의 살에 직접 잘 배어들게 왼 食口 모두 나와 딩굴며 노루잠도 살풋이 부치기도 하는 이 마당 土房. 봄부터 여름 가을 여기서 말리는 山과 들의 풋나무와 풀 향기는 여기 저리고, 보리 타작 콩타작 때 연거푸 연거푸 두들기고 메어 부친 도리깨질은 또 여기를 꽤나 매끄럽겐 잘도 다져서, 그렇지 廣寒樓의 石鏡 속의 春香이 낯바닥 못지않게 반드랍고 향기로운 이 마당 土房. 왜 아니야. 우리가 일년 내내 먹고 마시는 飮食들 중에서도 제일 맛좋은 풋고추 넣은 칼국수 같은 것은 으례 여기 모여 앉아 먹기 망정인 이 하늘 온전히 두루 잘 비치는 房. 우리 瘧疾 난 食口가 따가운 여름 햇살을 몽땅 받으려 홑이불에 감겨 오구라져 나자빠졌기도 하는, 일테면 病院 入院室이기까지도 한 이 마당房. 不淨한 곳을 지내온 食口가 있으면, 여기 더럼이 타지 말라고 할머니들은 하얗고 짠 소금을 여기 뿌리지만, 그건 그저 그만큼한 마음인 것이지 迷信이고 뭐고 그럴려는 것도 아니지요. - 「마당房」 전문
집이 내장하고 있는 공간 중에서 ‘방’은 인간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집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방은 인간에게 휴식과 안락의 시간을 제공해 주는 존재의 거소로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제어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집이 제공해 주는 방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인간은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산다. ‘방’이 인간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다양한 욕망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텍스트에서 ‘온돌방’, ‘마루방’, ‘토방’, ‘마당방’ 등으로 나눈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사계절이 순환하는 역동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 삶의 방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집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계절에 맞는 ‘방’을 제 각각 만들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온돌방’은 추위를 방어해 주는 방으로서, ‘마루방’이나 ‘토방’은 더위를 방어해 주는 방으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아날로그 방식의 집은 인간적 삶의 원리와 우주적 운행 원리를 합일시키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아날로그 방식의 집이 내장한 ‘마당房’의 기능과 의미작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볼 차례이다. 디지털 방식의 집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마당방’이 어떠한 방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마당방’은 본래 “土房이 그리워 마당을 갖다가 代用으로” 한 방(房)이다. ‘토방’이 마루를 놓을 수 있는 처마 밑의 공간(房)을 의미하므로, ‘마당방’은 처마 밑의 공간을 좀더 벗어나 마당에 이어진 공간(房)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토방’은 ‘마당방’과 ‘온돌방’을 이어주는 경계공간에 위치한 방인 것이다. ‘마당방’이 마당에 그 토대를 두고 있지만, 그냥 ‘마당’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엄연하게 ‘방’의 의미요소를 지니고 있어서이다. 부연하면 ‘마당’의 의미와 ‘방’의 의미를 함께 공유한 것이 예의 ‘마당방’이다. ‘마당’은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써 노동행위나 놀이를 하는 물질적․육체적 공간이고, ‘방’은 닫힌 공간으로써 휴식과 안락을 취하는 정신적 공간이다. 따라서 ‘마당방’은 이 양자(兩者)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이 되는 것이다.
먼저 ‘마당방’은 우주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으로 작용한다. “하늘의 銀河와 北斗七星이 우리의 살에 직접 잘 배어들”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작용에 의해 ‘마당방’에 모인 온 식구들은 살포시 ‘노루잠’도 잘 수가 있다. 이때의 ‘마당방’은 다름 아닌 우주화된 방이다. 다음으로는 ‘마당방’이 “반드랍고 향기로운” 매혹의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공간은 세속적 삶을 떠나 탈속의 상상적 세계로 인간을 흡입해 버리는 의미작용을 한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山과 들의 풋나무와 풀”을 말렸던 노동행위와 “콩타작 때 연거푸 연거푸 두들기고 메어 부친 도리깨질”의 노동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곧 육체적 원리에 의해 존재하는 마당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마당방”은 온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제일 맛좋은 풋고추 넣은 칼국수”를 먹는 ‘식탁’의 공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집 내부의 식탁 공간을 우주공간 밖으로 끌어내온 셈이다. 뿐만 아니라, 따가운 여름이 햇살이 있는 “마당방”은 “瘧疾 난 식구”를 치료해 주는 ‘병원 입원실’ 역할까지 한다. 인간에 의한 치료가 아니라 우주 원리에 의한 치료이다. 이때의 ‘마당방’은 신화적 공간으로 탈바꿈 한다. ‘不淨’을 타지 말라고 ‘소금’을 뿌리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미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의 ‘신화적’행위이다.
이와 같이 ‘마당방’은 우주적 순환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영역을 우주적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신화적 공간이 되고 있다. 아날로그 방식의 집에만 존재할 수 있는 ‘마당방’, 그 얼마나 인간적인 방인가.
3. 몸의 우주적 표현과 반영의 세계
인간이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육체적 행위도 우주적 원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똥, 오줌을 배설하는 행위는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어 그 가치를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육체적 원리보다 이성적 원리를 중시한 인간의 합리주의 사고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당방’을 내장한 아날로그 집은 ‘이성적 원리’를 해체하고 ‘육체적 원리’를 신성하게 여기는 ‘소망(똥깐)’을 준비해 놓고 있다.
아무리 집안이 가난하고 또 천덕구러기드래도, 조용하게 호젓이 앉아, 우리 가진 마지막껏 ― 똥하고 오줌을 누어 두는 소망 항아리만은 그래도 서너 개씩은 가져야지. 上監녀석은 宮의 각장 장판房에서 白磁의 梅花틀을 타고 누지만, 에잇, 이것까지 그게 그 까진 程度여서야 쓰겠나. 집 안에서도 가장 하늘의 해와 달이 별이 잘 비치는 외따른 곳에 큼직하고 단단한 옹기 항아리 서너 개 포근하게 땅에 잘 묻어 놓고, 이 마지막 이거라도 실천 오붓하게 自由로이 누고 지내야지.
이것에다가는 지붕도 休紙도 두지 않는 것이 좋네. 여름 暴注하는 햇빛에 日射病이 몇 千 개 들어 있거나 말거나, 내리는 쏘내기에 벼락이 몇 萬 개 들어 있거나 말거나, 비 오면 머리에 삿갓 하나로 응뎅이 드러내고 앉아 하는, 休紙 대신으로 손에 닿는 곳의 興夫 박잎사귀로나 밑 닦아 간추리는 ― 이 韓國 <소망>의 이 마지막 用便 달갑지 않나?
- 「소망(똥깐)」에서
디지털 방식의 집이 내장한 화장실은 수세식이다. 저급한 배설물을 말끔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다. 배설물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몸은 배설물과 완전 분리․단절된다. 이런 의미에서 수세식 화장실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이원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날로그 방식의 집이 내장한 ‘소망(똥깐)-변소나 화장실의 별칭’은 그렇지 않다. “집 안에서도 가장 하늘의 해와 달이 별이 잘 비치는 외따른 곳에 큼직하고 단단한 옹기 항아리”를 묻어 만든 ‘소망’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진 “마지막껏-똥하고 오줌”을 자유롭게 배설하는 육체적 공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적 배설 공간이 더럽고 저급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성한 공간이 되고 있다. 배설물의 자연스러운 반영(反影)에 의해 천체(天體)의 공간기호들이 그 속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저급한 가치로써 하방공간을 차지하던 ‘소망’공간은 신성한 가치를 생산하는 상방공간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배설의 육체적 행위는 몸과 우주를 다시 매개하는 몸의 우주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지붕도 없는 ‘소망’은 “여름 暴注하는 햇빛”, “내리는 쏘내기” 등의 자연적 현상과 몸의 배설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의미작용은 더 크다고 하겠다.
‘소망’은 한국적 문화 특히 민중문화의 표현이다. ‘소망’은 ‘상감(임금)’이 쓰던 고급스런 “白磁의 梅花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상감’이 쓰는 매화틀은 수세식 화장실과 다를 바 없다. 천체 기호가 반영될 수 없는 ‘매화틀’은 몸과 세계의 분리를 의미하며 몸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정신적 세계의 기표를 의미한다. 따라서 ‘소망’을 내장할 수 있는 아날로그 집은 몸의 자유를 구가하는 우주의 집인 셈이다.
Ⅱ. 이향지, 장석남, 배한봉의 시를 중심으로
1. 겸손하고 갸륵한 지붕
집이 집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지붕이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존재방식의 집이든 디지털 존재방식의 집이든지 간에 지붕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집이 아니다. 지붕이 없는 집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사계절 밤낮없이 자연현상의 기호들, 즉 하늘, 태양, 구름, 바람, 별, 비, 눈 등이 우리를 대신하여 집을 주인처럼 독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지붕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동시에 내부의 삶을 살지게 하는 생명의 지킴이이다. 사계절 하는 일 없이 그저 무표정한 모습으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지붕은 허공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을 정겹게 수납하면서 자애로운 눈짓으로 마당 아래를 내려다보며 산다. 한마디로 말하면 식구들을 위해 집안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처럼 모성애를 지닌 지붕인 셈이다.
지붕의 종류에는 초가지붕, 기와지붕, 슬레이트지붕, 함석지붕 등이 있는데, 이것은 아파트나 연립, 혹은 양옥의 옥상(屋上)과는 전혀 그 차원이 다르다. 물론 집을 집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지붕이라는 기호의 의미작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자(前者)는 우주공간과의 조화와 합일을 꿈꾸는 겸허한 순응의 자세로 그 시선이 하방공간을 지향하고 있지만, 후자(後者)는 이와 달리 우주공간을 공략하는 의지의 자세로 그 시선이 상방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부연하면, 전자가 펼쳐진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과 같다면, 후자는 평면으로 된 두꺼운 철판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지붕은 인간의 생명 위한 공간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하찮은 동식물의 생명을 위한 공간까지 제공해 주기도 한다. 이 지붕들은 굼벵이, 구렁이, 쥐 등을 가슴에 안아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잡초를 안아주기도 한다. 또한 단란한 서까래를 살림살이로 하고 있는 지붕은 처마공간을 연출해내어 호박벌, 제비, 거미 등에게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지붕이 연출해 내고 있는 추녀 끝은 해와 구름과 달과 별 등이 잠깐씩 쉬었다가는 우주 정거장의 기능까지도 한다. 요컨대 지붕은 우주공동체의 조화로운 공간을 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존재하는 지붕이지만, 그 의미작용만큼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이에 비해 지붕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옥상은 어떤가. 디지털 방식의 집이 지니고 있는 옥상은 우주공동체로서의 생명 공간을 결여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적 가치가 결여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날로그 방식의 집이 지니고 있는 지붕들의 넉넉한 마음과 지붕이 연출해낸 처마공간을 인간만을 위한 실용적인 공간으로 모두 환원하여 내부로 걷어간 것이 바로 옥상이다. 그래서 옥상은 인간을 위한 방호막 이상의 기능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이 아날로그 방식의 지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붕은 우주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붕은 그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위대함을 절대 뽐내지는 않는 겸손의 미학, 즉 갸륵함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지붕을 찬사(讚辭) 하지 않을 수 없다.
2. 지붕은 생명을 부화(孵化)하는 새의 날개
지붕은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지니고 있다. 자신보다는 타자(他者)를 위해서 어떠한 고역(苦役)이든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하게 감수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포기할 줄 모른다.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안락한 온돌방에서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영위할 수 있다. 이향지 시인은 이러한 지붕을 “벌서는 당신”이라고 비유함으로써 그 지붕의 헌신적인 사랑을 다음과 노래하고 있다. 함께 그 지붕에 대한 여행을 해보도록 하자.
당신의 등뼈는 몹시 굽다. 스스로 세운 기둥 위에 날개를 묶어버린 노역자. 당신은 휴식을 모른다. 당신의 사랑은 휴식을 모른다. 아랫것들…, 아랫것들…, 아랫것들에게, 천정 높은 방 한 칸씩 마련해주느라 가슴팍이 움푹 파였다. 당신의 일터는 가장 높고 춥고 뜨겁고 쓸쓸한 자리. 바람 부는 날이면 당신의 처진 날개 더욱 떨렸다. 아랫것들…, 아랫것들…, 날개 펼쳐 끌어안고 날개를 포기한 새. 당신의 날개는 우리의 지붕, 우리가 붙잡고 있다. 떠나거나 무너질 자유도 없는 당신.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일수록 굽은 등뼈 더욱 돋우며 대표로 벌서는 당신. 내가 어른 되면 추운 등을 쓸어줄게. 천둥 치고 소낙비 오는 밤 구들장을 지고 누우면 당신의 도드라진 늑골 사이로 진한 눈물 비쳤다.
― 이향지, 「나의 지붕, 당신의 날개」 전문
지붕은 인간처럼 살아 있는 고귀한 존재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지붕이지만, 그 지붕이 하는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인간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이 텍스트에서 지붕을 높임의 대상인 ‘당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아랫것들’과 달리 “스스로 세운 기둥 위에 날개를 묶”고서 휴식도 없이 노역을 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 노역이 얼마나 가혹한지 등뼈가 휘고 가슴팍이 움푹 파일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역이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노역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노역, 즉 ‘아랫것들’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의 노역이라는 데에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아랫것들은 당신의 노역을 모르고 살아간다. 아랫것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육신의 안락을 위한 ‘천정 높은 방 한 칸’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 방을 마련해 주고 나서는 그 방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있다. 물론 스스로 자청한 일이지만, 그 노역의 대가(對價)는 너무 큰 것이다. 무너지거나 비상할 수 있는 자유도 빼앗긴 채 천형(天刑)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붕과 인간은 그 의미상 대립한다. ‘당신/아랫것들’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지붕은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위대한 존재로 부각되고, 인간은 지붕의 그러한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천한 존재로 비하되고 있다.
당신의 일터는 “가장 높고 춥고 뜨겁고 쓸쓸한 자리”이며, “비 오고 바람 부는” 자리이며, ‘천둥과 소낙비’를 그대로 받는 자리이다. 때문에 인간이 지붕을 대신하여 그 일터에서 노동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이 자리는 인간의 일터와 도저히 비교될 수도 없을 정도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화적 공간이 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천상의 공간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이 일터는 지상의 세속적 공간을 벗어난 탈속적 공간, 인간의 능력이 미칠 수 없는 초월의 공간, 휴식이 없는 신성한 노동의 공간으로 탈바꿈 한다. 집 안을 공격하는 외부의 요소들, 즉 추운 겨울, 뜨거운 여름 땡볕, 비바람, 소나기, 천둥 등은 지붕의 견인적인 노동에 의해 그 위력을 상실하고 만다. 오히려 그 노동이 배가될수록 천정 높은 방안은 더더욱 인간적인 가치를 산출하는 공간이 된다. 부연하면 방안은 인간적 가치를 최대로 실현하는 생명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지붕’은 커다란 날개를 지닌 온순한 모성의 새로 그려지고 있다. ‘날개를 묶어버린’, ‘쳐진 날개 더욱 떨리는’, ‘당신의 날개’ 등의 언술이 바로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커다란 날개를 접고 있는 지붕은 알(卵)을 부화하듯이, 생명의 방을 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붕에 의해 부화되는 방이 없다면 과연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날개를 지닌 새는 그 본질상 지상에 날개를 마냥 접고 살아갈 수는 없다. 우주공간으로 비상해 날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붕인 당신의 날개는 알을 부화하고 있을 뿐, 비상하지 못하고 있다. 비상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인 우리가 그 날개를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랫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붕은 양의적(兩義的)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모순의 괴로운 존재이다. 지붕은 새의 비상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날지도 못하고, 인간의 가치를 지닌 세속적인 방을 내부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방에 거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모순의 존재이면서 자기 스스로 그것을 자청하고 있는 지붕은 지고한 선적(禪的) 수행자이다. 시적 화자가 “내가 어른이 되면 추운 등을 쓸어줄게”라고 언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도 지붕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시적 화자만은 그 지붕의 안쓰러운 육체적인 노역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위대한 지붕의 사랑을.
3. 天地의 가치가 교환되는 추녀와 기억의 보관소인 지붕
지붕은 새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주공간으로 비상하여 날아가지 않는다. 지붕은 기둥 위에 서까래를 얹어놓고 비상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욕망을 단단하게 묶어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까래는 비상하고자 하는 지붕의 욕망을 인간의 공간인 마당 아래로 흘러가게 하는 의미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까래 자체가 지붕의 비상하는 욕망을 전적으로 억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까래가 만든 단란한 공간을 처마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처마가 만든 공간 중에서 적어도 ‘추녀 끝’ 공간만은 새의 비상하는 욕망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즉 ‘추녀 끝’은 지붕의 비상하고자 하는 욕망(우주적 가치)과 낙하하고자 하는 욕망(인간적 가치)이 동시에 공존하는 경계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장석남 시인은 그 ‘추녀 끝’을 우주적 가치와 인간의 가치가 공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교환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노래하고 있다. ‘추녀 공간’을 여행해 보도록 하자.
추녀 끝에는 늘 하늘이
해변가라도 되는 듯 싱싱했다
별이 근처에 있을 때는
저녁이 아직은 젊어 푸르른 때
별은 그 속에서 소의 눈처럼 껌벅였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몰랐다
추녀는 내 방안에 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엿보아 알고 있어서
들큼한 숨결을 허공에 부비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낯이 뜨거웠다
가끔 빈혈과도 같은 비가 날리면 나는
무수한 물방울들로 추녀 끝에 매달려
수없이 영롱한 망설임들로 떨고 있었다
그때마다 방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내 기억의 두 손을
추녀 끝에까지 늘려 내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망설임은 안심을 되찾고는 하였다
추녀 끝에서 방까지, 삶까지
하얀 명주실 같은 빛이 이어지고는 하였다
- 장석남, 「밝은 방」 전문
‘추녀 끝’에서 ‘끝’이란 말에 의해, ‘추녀 끝’은 양의적(兩義的) 공간이 된다. 여기서 ‘끝’이란 말 속에는 위로 비상하고자 하는 공간적 의미와 아래로 낙하하고자 하는 공간적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뾰족한 추녀 끝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지붕이 위로 비상하는 지점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지붕이 아래로 낙하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추녀 끝’은 상승과 하강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 양의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녀 끝’은 우주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 할 수가 있다. 방 안에서 보면 ‘추녀 끝’에는 하늘과 별이 내려와 산다. 즉 천상적 존재들이 인간이 거처하는 세속의 공간까지 하강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천상적 존재들과의 상상적 대화를 통하여 세속적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의 눈처럼 껌벅이는’ 별을 오래 쳐다보는 행위가 예의 그것이다. 따라서 ‘추녀 끝’은 우주적 가치가 존재하는 신성한 긍정의 공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추녀 끝이’ 인간의 가치를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추녀는 방안에 있었던 ‘나’의 일들을 고스란히 엿보아 왔기 때문에 나의 행위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 가치를 모두 포용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녀가 존재하기에 나는 세속적 삶을 반성할 수가 있다. 그 반성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세속적 가치를 신성한 우주적 가치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추녀 끝’은 천상과 지상의 가치를 상호 교환시키는 매개적 공간으로서 신성한 공간이 된다. 장석남 시인이 ‘영롱한 물방울’로 추녀 끝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다. 세속적 삶을 초월하기 위한 욕망 때문이다.
지붕만이 가질 수 있는 추녀 끝. 그 공간은 “하얀 명주실 같은 빛”을, 다시 말해서 우주적 가치를 “방까지, 삶까지” 이어주는 우주의 신성한 통로이다. 그 통로가 있기에 우리는 우주공동체의 통합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지붕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을까.
나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을까
불임으로 엉킨 햇빛의 무게를
견디는,
때로는 고요 속에 눈과 코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서는 서러운 허공중들도
감싸 안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클레멘타인을 부르던 시간들을 아코디언처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계절이 지칠 때
꽃피는 육신으로 다시 허밍하는
그 집 지붕의 단란한 처마들
나는 걸음에 젖어서
그 갸륵함에 대해서
장석남,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전문
이 텍스트에서 지붕은 천상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지붕이다. 물론 그 지붕의 기억은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붕은 사계절 가족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해온 긴 시간의 역사를 품고 있다. 말하자면 그 지붕은 가족 전체의 삶과 흔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붕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 아득한 과거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는 원초적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지붕이 과거의 시간을 오랫동안 품속에 넣어 두었다가 시인에게 꺼내보여 준 것은 어릴 때 불렀던 ‘클레멘타인’의 노래이다. 원초적 상상력으로서의 이 노래는 유년의 자아를 행복하게 해준 유일한 기표이다. 유년의 자아에게 집은 행복한 공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년의 자아는 ‘일로 인한 가족들의 부재’로 늘 ‘적막(고요)’ 속에서 ‘외로운(서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년의 자아는 그 적막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클레멘타인’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결국 이 노래에 의해 유년의 집은 생기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하강하는 집에서 상승하는 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예의 지붕은 집안에 작용하는 천상적 가치에 대한 기억도 내포하고 있다. 이 텍스트에서 집안에 작용하는 천상적 가치는 부정적이다. “불임으로 엉긴 햇빛의 무게”를 ‘지붕’이 “견디는” 것으로 언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역시 가족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다. 가족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햇빛’은 더욱더 적막(고요)과 외로움(서러움)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붕이 그러한 ‘불임의 햇빛’을 방어해줌으로 해서 집안은 긍정적 가치를 유지하게 된다. 지붕이 갸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붕은 유년의 자아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상상적으로 만들어 제공해 주기도 한다. “고요 속에 눈과 코를 만들어” 지붕 아래로 내려준다는 언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은 “꽃피는 육신”처럼 살아 움직이는 생기의 집이 되고 있다. 이 또한 지붕의 갸륵함 중의 하나이다.
장석남 집의 지붕은 인간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자아에게 원초적 상상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시인은 이 원초적 상상력을 통해 행복한 몽상의 시간을 향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행복한 몽상을 오래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지붕을 지닌 갸륵한 집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날로그 존재방식인 ‘갸륵한 집’을 해체하여 디지털 존재방식인 ‘아파트’로 거의 다 전환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노래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도 한다. 지붕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적 가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시적 몽상의 상실인 셈이다.
4. 상처를 치유해주는 집의 심장인 방
지붕이 새의 날개에 해당한다면, 방은 새의 심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새가 날개를 펴고 잘 날기 위해서는 심장 활동이 원활한 기능을 해야 한다. 심장활동 없이는 아무리 튼튼한 날개를 지녔어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방’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인 셈이다. 비호성을 지닌 ‘방’은 휴식과 안락의 공간으로서 인간에게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기능을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기능하는 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태반이 주는 영양을 공급 받으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궁은 태아에게 세계의 중심이 된다. 마찬가지로 방 또한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방’의 기능은 사계절마다 변별적이다. 가령, 여름철의 방과 겨울철의 방을 보도록 하자. 겨울철에 비해 여름철의 방은 그 독자적인 기능(비호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여름철의 방은 더위를 극복하기 위해 주로 방문을 열어놓는다. 이에 따라 내부와 외부가 연결이 되고, 그 때문에 양항(兩項)의 가치도 균등하게 된다. 또한 온 가족들이 방에서만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각자 흩어져 마루나 들마루 등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밤잠을 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철의 방은 마루, 들마루와 변별될 수 있는 독자적인 기능이 매우 약하다. 이에 비해 겨울철의 방은 추위를 방어하기 위해 내부와 외부를 단절한다. 그리고 온 가족들은 방안에 모여 휴식과 안락을 취하며 행복한 숙면을 이루기도 한다. 더욱이 바깥의 추위가 강할수록 방의 그러한 독자적인 기능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겨울철의 방은 외부와 내부의 가치를 변별시키는 기능을 한다. 배한봉 시인은 이러한 겨울철의 방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아날로그 존재방식인 방의 기능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기억하시는지요. 한파 매서운 밤, 장작 군불을 때면 쩌글쩌글 밤새도록 끓던 아랫목. 식구들 둥글게 앉아 동치미 국물로 찐 고구마 먹던 아랫목. 이불 속 가운데 모인 발 간질이며 들썩거리던 그 뜨거운 아랫목.
기억하시다면, 그대는 아직 그때 그 온돌방 아랫목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 마음속에 아직도 그때 그 쩌글쩌글 끓던 아랫목의 온기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랫목 없는 아파트, 아랫목 없는 방은 우리 마음속의 아랫목까지 빨리 식게 했습니다. 바람 찬 오늘, 나는 온돌방 집 한 채 마련하고 싶습니다. 굴종의 상처 때문에 삶이 아픈 사람에게는 아랫목 쩌글쩌글 끓게 하는 장작불 같은 시를, 높이 오르려다 아랫목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에게는 그 시의 장작불이 쩌글쩌글 끓여놓은 아랫목을 선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배한봉, -「쩌글쩌글 끓는 아랫목」 전문
‘매서운 한파’가 몰아칠 때 아날로그 존재방식인 온돌방에 “장작 군불”을 지피면, 온돌방은 ‘쩌글쩌글 밤새도록 끓는 아랫목”을 지니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바깥이 추우면 추울수록 온돌방의 내부는 따스함과 내밀함이 더욱 증대된다. 외부와 단절되므로 해서 안락해지는 온돌방, 닫혀져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온돌방은 가장 인간적인 가치를 생성하는 실존의 공간이다. 외부와 내부의 변별적 가치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파가 몰아치는 외부는 사물들이 응축 응고되는 결빙의 공간이다. 이와 반대로 따스함이 생성되는 온돌방의 내부는 생기가 확산되는 삶의 공간이다. 그래서 온돌방은 우리에게 행복한 몽상의 드라마를 제공해 준다.
그 드라마는 “식구들 둥글게 앉아 동치미 국물로 찐 고구마 먹던” 세계이기도 하고, “이불 속 가운데 모인 발 간질이며 들썩거리던” 세계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 의해 가족들은 연대감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우주공동체의 문화를 몸에 익힐 수 있는 것이다. 한파를 극복해낼 수 있는 온돌방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디지털 존재방식인 아파트의 방도 한파를 방어해낼 수 있다. 아니, 기능면으로 보면 아날로그의 방보다 수십 배 더 한파를 방어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의 방은 행복한 몽상과 인간적 가치를 생성해 내는데 있어서는 아날로그의 방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그 이유는 아파트의 방은 아랫목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존재방식인 ‘온돌방’은 두 층위의 공간적 의미로 분절이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윗목과 아랫목이다. 동일한 공간이지만 온기의 차이에 의해 이와 같이 분절되고 있다. 윗목과 아랫목의 차이는 단순하지가 않다. 윗목과 아랫목은 가족 구성원들의 질서와 위계를 분별해 주는 문화의식으로 작용한다. 동일한 공간이지만, 방의 중심인 아랫목은 가족 구성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가 앉는 자리이다. 그리고 아랫목과 대립하는 윗목에는 서열이 낮은 가족 구성원이 앉는 자리가 된다. 물론 이 자리의 순서가 획일적이거나 부권 중심의 권력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자리가 아니다. 이 자리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의식에 의해 정해지는 가장 인간적인 자리이다. 가령, 가족 구성원 중에서 보호 받아야 할 약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먼저 아랫목을 내어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러한 약자로는 병약한 자, 큰 상처를 받고 슬픔에 처해 있는 자, 성장하고 있는 어린이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때로는 어떤 일에 성공한 자를 축하해 주기 위해 아랫목을 내어주기도 한다. 아랫목을 내어주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파를 이겨내며 멀리서 온 친지나 친척 혹은 손님이 있다면 가장 먼저 그들에게 훈훈하고 따스한 아랫목을 내어준다.
이처럼 온돌방의 아랫목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고구마’를 먹고 ‘발을 간질이며’ 노는 화목의 공간인 동시에 ‘상처나 아픔’을 치유해 주는 공간, ‘축하’를 해주는 공간, ‘한기(寒氣)’를 녹여주는 사랑의 공간, 배려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온돌방의 문화가 차츰 사라짐으로 해서 인간적인 인정의 문화도 사라져 가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삭막한 세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배한봉 시인이 “아랫목 없는 아파트, 아랫목 없는 방은 우리 마음속의 아랫목까지 빨리 식게 했습니다.”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랫목을 지닌 온돌방’과 ‘아랫목이 없는 아파트’는 ‘온정/냉정, 공동의식/개인의식, 이타심(利他心)/이기심(利己心)’ 등의 대립적인 의미를 산출한다. 그러나 아랫목이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냉정, 개인의식, 이기심’ 등이 팽배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한파에 의해 상처 입은 사람들, 혹은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에 가도 위로 받을 자리가 없다. 배한봉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아랫목을 지닌 온돌방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복원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굴종의 상처 때문에 삶이 아픈 사람에게는 아랫목 쩌글쩌글 끓게 하는 장작불 같은 시를, 높이 오르려다 아랫목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에게는 그 시의 장작불이 쩌글쩌글 끓여놓은 아랫목을 선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날로그 존재방식인 온돌방은 디지털 존재방식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구원의 공간이다. 집의 심장이기도 한 그리운 온돌방.
'시창작 도움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 ☞ 그리움의 보고, 구엄리 바닷가 (0) | 2009.12.27 |
---|---|
천혜의 운둔지, 변산반도 (0) | 2009.12.23 |
[스크랩] 난해한 문학은 시대의 산물일까 / 이윤주 기자 (0) | 2009.06.17 |
현대시와 녹색시의 접점 (0) | 2009.06.16 |
시보다 평론이 훨씬 뛰어난 역작 (0) | 2009.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