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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운둔지, 변산반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2. 23. 21:33

천혜의 운둔지, 변산반도

──부안의 여러 시인들

 

                                                                                                                                                      고성만

 

 

1. 별자리가 된 시인, 박영근

 

박영근 시인은 전북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1958년에 태어났다. 그는 거기서 마포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익산의 이모 집으로 이주했고 익산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다니던 중 자퇴,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품고 상경하였다.

박영근 시인은 현재 생존해 있어야 마땅하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하나일 뿐 아니라 써야 할 시들이 많았었을 것이므로. 그런데 시인은 48세가 되던 2006년 5월 11일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개하였다. 오랫동안 혼자 거주하면서 술로 지탱하였고 변변한 영양섭취가 없었기에 사실상 영양실조나 다름없는 병사였다. 그러나 시인은 길지 않은 기간에도 『취업공고판 앞에서』(1984), 『대열』(1987), 『김미순전傳』(1993),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2007)와 같은 주옥같은 시집을 냄으로써 빛나는 개성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시인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전북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는 변산반도국립공원 안에 있다. 내변산에는 최고봉인 의상봉을 비롯하여 신선봉, 쌍선봉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가 있고, 개암사, 내소사, 월명암 등 유서 깊은 고찰이 있으며, 직소폭포, 봉래구곡, 낙조대 등 승경이 산재하여 하늘이 내린 은둔지이다. 또 중계계곡에는 부안댐이 새로 생겨 물과 어울린 산이 신선의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가히 세상의 흙먼지를 피해 즐길만한 자연이다. 전남 강진과 함께 명품 고려자기를 생산하였고, 시인묵객들이 유람하였다. 험준하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산을 떠나 바다로 향하는 길목, 내소사에서 변산해수욕장과 격포 채석강 가는 중간에 ‘마포삼거리’가 나온다. 그 곳에 박영근 시인의 집이 있었다.

박영근 시인의 부모는 거기서 가게를 했다. 변산막걸리, 보배소주, 백화수복 같은 주류, 고무줄, 가스활명수, 라이타돌 같은 잡화, 돈부과자, 삼양라면, 아이스께끼 같은 군것질거리를 팔았다.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박영근, 「길」, 전문

 

 

박영근 시인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떠나시고 원래 살던 집은 헐리어 다른 사람의 집이 들어서서 시인의 흔적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친척들조차 거의 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박영근 시인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나이차이가 있는 관계로 어울려 노는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 큰누나와 비슷하게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박영근 시인이 고향에 내려올 때면 가게를 지키곤 했는데 1983년쯤으로 기억된다. 문학에 눈을 뜬 내가 일부러 형을 찾아갔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나요?” 이런 유의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형은 흰 고무신에 청바지 차림으로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아주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형은 성남시 철산동에 살며 많은 문인 혹은 인사들과 교류하며 멋진 여인과 연애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속으로 여간 기고만장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의 집에는 오랫동안 병으로 방을 지키던 아버지가 계셨다. 들리는 말로는 원래 천석꾼 집안 출신이었지만 6·25때 부역을 하여(부안군당위원회 간부라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

변산반도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못지않게 비극을 잉태한 땅이다. 이태가 지은 『남부군』에도 순창회문산 토벌작전에 밀려 도주한 빨치산들이 서부루트로 도주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변산반도라고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님도 1953년 12월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은 아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 유독 비극적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박영근 시인께 빚을 지고 있다.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 우리 부모님이 ‘시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황당한지, 그 예로 영근 형을 들면서, 며칠 전 밤중에 만취한 형이 서울에서 동네까지 택시를 타고 와서 택시비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일이 한두 번 아니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나는 시인이 되더라도 절대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이 유명을 달리하기 2년 전 내가 사는 광주에 갑자기 방문하였다. 그땐 나도 시인으로 등단한 무렵이었다. 형은 금남로의 어떤 다방에서 전화를 하였다. 나도 내심 반가웠으므로 형을 만나러 갔다. 술이 거나해지자 형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열두 시가 넘었는데 나와 형은 광주역 앞으로 가서 또 술을 시켰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슬슬 다음날(벌써 월요일이 되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화장실에 간 형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후로 타개할 때까지 형을 보지 못했다.

 

박영근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전북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앞 바다에는 하섬이라는 섬이 있다. 하섬은 원불교에서 사들여 휴양원으로 바꾼 작은 섬이다. 마포리의 성천 앞바다와 하섬 사이에는 조수간만의 차이에 의하여 한 달에 두어 번씩 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바다가 갈라지는 순간 하섬과 육지 사이에는 해산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어떤 사람은 소를 가지고 와서 숫제 바다를 쟁기질하였으며 집안 식구 모두 나와서 마음껏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대개 ‘비료푸대’를 가지고 와서 몇 개씩 담아내었는데 얼마나 많았는지 며칠 동안 먹고도 남았다. 영근 형도 분명 그 풍요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젠 그 곳에서 해산물이 잘 잡히지 않는다. 새만금간척사업 때문이리라. 직접적으로 간척지에 편입되지는 않았으나 물의 흐름이 바뀌면서 바다는 황폐화되었을 것이다. 유고시집이 된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2007)에서 시인은 그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지락철이 오면 온 식구들이 갯벌에 나가 살았다

 

키꼴이 선 장정들은

소를 몰고 와 쟁기를 대고 갯고랑을 갈아엎고,

거기 가마니때기로 바지락이 쌓여갔다

 

저녁물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소구루마의 어둑한 행렬 속에는

금성표 라지오와 이미자 노래가 있었다

 

수평선 자락에서부터 눈 시리게 출렁이던 물이랑을 지우고

물길을 끊어버린 방조제 공사장을 나는 바라본다

뻘길은 평지가 되고 한 도시가 들어서겠지

──박영근, 「해창에서·2」, 전문

 

 

박영근 시인에게 바다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였으며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깨어진 이상향이다. 지금 그 곳은 박영근 시인이 노래했던 대로 되어가고 있다. 물길이 끊어진 갯벌엔 머지않아 ‘한 도시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행복할까, 거기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2. 원정園丁의 시인, 신석정

 

박영근 시인과의 인연을 뒤로 하고 부안읍 쪽으로 신석정 시인을 찾아간다. 신석정 시인은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로 알려진 전우 간재 선생의 문하생인 아버지 아래에서 1907년에 태어나 부안읍 동중리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선은리 443번지 청구원으로 이사하여 중년까지 살았다. 그 곳에는 대숲이 울창했던 생가 터가 있는데 『촛불』(1939), 『슬픈 목가』(1947)를 그곳에서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집은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시인의 체취를 맡기가 어려웠다. 표지판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서 찾아가기가 매우 힘들 뿐 아니라, 앞뒤로 부지정리가 되어있지 않고, 제대로 된 유물도 없어 썰렁하기 그지없다. 선생이 생전에 사용했음직한 것이라곤 마당에 먹을 수 없는 우물뿐일 것 같다는 짐작이 들 정도였다. 가까스로 복원해놓은 그 집 앞 한 무더기의 댓잎이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신석정,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

 

 

일제 암흑기 시인은 변산반도의 수려한 풍광에 기대어 험난한 세파를 견뎌내었을 것이다. 변산반도는 예로부터 야생 난초가 많이 자생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일컬어 일명 ‘변란’이라한다. 그것은 일종의 춘란春蘭으로써, 신석정 시인에게는 난에 관계된 시가 유난히 많다.

 

그대/ 꽃을 가꿀 양이면/ 부디 난을 기르게나// 티없이 맑게 개인/ 그대 마음일랑/ 저 난에게 찾게나// 그대 이야길 하고프면/ 저 난과 나누게나// 바람과 주고받듯/ 일월日月과 주고받듯/ 성신星辰과 주고받듯

─-신석정, 「춘란春蘭」 전문

 

변산에는 내소사가 있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내소사라 하지 않고 소래사라 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이곳에 와서 시주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나 별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올 래來자에 소생할 소蘇자로 되어 있어 “모든 것이 소생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그 향긋한 냄새에 취해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소사를 나와 상서면 쪽으로 가면 개암사가 있다. 개암사는 들어가는 입구 느티나무 돌길이 매우 운치 있으며, 보물 제292호인 대웅전 내부의 용 조각이 정말 화려하고 장엄한 불국토를 연출한다. 다시 곰소 쪽으로 나와 마포삼거리를 지나면 격포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이 있는데 흔히 강을 연상하기 쉬우나 옛날 당나라의 시선 이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면서 강물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고사에서 나오는 채석강과 그 생김이 흡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적벽강 역시 중국의 당송팔대가로 일컬어지는 문장가 소동파가 술과 달을 벗하던 적벽강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채석강에 한번 온 연인은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반대로 채석강에 두 번 오게 되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고 하니 어떤 말을 믿어야할지…….

 

변산에는 곰소가 있다. 곰소라는 이름은 인근에서 천일염, 즉 소금이 많이 생산되어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닐까하고 짐작해보기도 하고, 곰소 앞 바다에 있는 웅연도熊淵島의 예를 들어 ‘곰이 사는 깊은 바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요즘도 각종 해산물과 젓갈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신석정 시인은 변산반도의 풍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기고 있다.

 

내 고향을 잊을 수 없는 것은 곰소뱅어와 해창 석화로 입맛을 돋우며 자란 탓도 아니요, 그렇다고 변산 멧돼지와 노루고기에 구미가 당기는 탓도 아니다. 멧돼지나 노루고기야 지리산에 간들 못 구하랴마는, 가난에 찌든 이웃들이 이젠 힘을 펴서 아들 손줄 중학교에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도 이젠 진상가던 뱅어와 눈발을 따내는 석화로 입맛을 돋울 수 있으려니 생각하면 여간 대견스러운게 아니다. 가난에 지쳐 한 두 끼니 넘기는 것이야 견딜 수 있지만 그 어린놈들의 까만 눈이 안쓰럽다던 뒷집 할아버지의 손주들도 이젠 대학을 나왔다니 못견디게 흐뭇한 마음에 불현듯 뛰어가고 싶은 고향이기도 하다.

──신석정,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163쪽

 

신석정 시인은 변산반도를 풍류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예찬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의식이다. 그것이 시인을 ‘목가적’ 성격으로만 머무르지 않게 하는 요인인 듯하다. 일제강점기와 박정희의 공포정치를 거치면서 시인은 그때 그때마다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고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다.

 

어둔

벌판에서는

늑대 떼가 울고 있었다.

 

대화도 앗아간 가슴에

채곡채곡 쌓이는

잃어버린 새벽의 찌꺼길 안고

무딜대로 무딘 혓바닥을 깨물면서

우리들은

역시 어둔 벌판에서 불어대는

잔인한 늑대 떼의

잔인한 울음소릴

듣고 있었다.

(…중략…)

허덕이면서

거꾸러지면서

되쳐 일어나면서

시체屍體된 대낮의 엉뚱하게 높은

그 언덕을 넘어가면서

으스스 오는 오한을

우린 사랑하면서 살아도 좋다.

──신석정, 「오한惡寒」 부분

 

이 시에 대해 신석정 시인의 제자인 허소라許素羅 교수는 “중요한 것은 ‘늑대’의 정체다. 늑대는 1941년에 발표한 「소년을 위한 목가」 속의 한 줄 “우리 양들을 노리던 승냥이 떼도 가고” 속의 ‘승냥이’와 동류로서,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타기하고픈 시대적 상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신석정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2007)라고 말하고 있다.

 

신석정 시인과 나는 간접적으로 아는 사이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누나 집에 기숙하고 있을 무렵, 전셋집 주인아저씨의 이름이 ‘신광연’이었다. 그 분이 바로 신석정 시인의 둘째 아드님이셨다. 준수한 신사스타일인 그 분은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였다가,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신군부의 탄압으로 해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이사갔을 무렵이 매우 힘든 시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분의 사모님 즉, 신석정 시인의 둘째 며느리께서는 매우 미인이셨다. 그 집에는 신석정 시인의 손자손녀들이 있었다. 나는 중학생이었던 손자와 가깝게 지냈는데, 한번은 어른들이 모두 서울에 가셨다고 하여 함께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거실과 안방에는 신석정 시인의 저서들이 죽 꽂혀있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이곳에 다녀가시곤 했다는 이야기를 손자에게서 들었다. 그 집에서 이사나온 후 소식이 끊겼지만, 내가 시인이 된 줄을 알면 그 분들도 신기해할 것 같다.

 

 

 

3. 이화우梨花雨의 시인, 매창梅窓

 

매창은 조선 선조 6년에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양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매창은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지만 얼굴은 예쁜 편이 아니었고 시와 글, 노래와 거문고 등에 능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당시 매창과 교류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천민이었으나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인해 천민에서 벗어났던 유희경이 있었고, 공주부사로 재직시 서출들과 가까이 지내다 파직당한 뒤 부안에 내려와 유람하던 허균이 있었다. 허균은 이곳에서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위도를 모델로 율도국을 창작했다고 한다. 고립되고 불우한 자가 숨어살기에 가장 적당한 땅, 변산반도. 신석정 시인은 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 삼절이라고 불렀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하얀 배꽃비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던 어느 봄날에 옷소매 부여잡고 울며 헤어진 님인데, 지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어도 한마디 소식이 없구나. 부안과 서울, 천리 밖에 떨어져 몸은 못 가고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꿈에도 그리운 님은 누구인가

그녀가 지은 수백 편의 시들 중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고, 부안읍에 조성된 ‘매창공원’에 시비로 새겨져 있다. 매창공원은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우선 ‘이매창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진 묘소가 분명히 있었고, 배나무 등 과실나무와 조경수를 심어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매창과 관련된 유물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기실 부안은 상처받은 자를 포근히 안아주는 자연이며, 미래의 이상향을 꿈꿀 수 있는 땅이고, 시를 창작하기에 적당한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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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만 /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