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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녹색시의 접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6. 16. 18:26

현대시와 녹색시의 접점

                                    ――녹색시학의 에네르기, 그 생성력 또는 창의적 파괴력을 위하여

                                                                                                                         정 휘 립 (시인·전북대 교수)

 

1. 시 예술 작업의 녹색혁명을 위하여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볼 때, 이 땅에 사는 우리네 삶의 제반 상황과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문학예술 작업 또한 새로운 기법이나 사조에 대한 일정한 지향점을 모색하기가 쉽지 않다. 문학과 시대상황은 불가분의 함수관계 속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산업 정보화 사회에 진입하며 더욱 가속화되어 가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자본 만능의 풍조 속에서,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천을 거듭하는 신세대의 변덕을 맞이하여, 자아와 세계의 단절로 인한 불연속성이 심화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본격적인 불확실성의 시대로 돌입하는 사태가 작금의 현실이다. 더구나 영화․사진․음악․미술․건축 등이 혼합장르화 되고, 다양한 영상매체의 일반화까지 곁들이며, 미증유의 대중예술화 시대를 형성하면서, 점차 전위와 해체의 아방가르드의 조짐조차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기술의 고도 발달과 산업 자본주의의 거대화는 인간 스스로를 기계와 상품의 노예로 전락시켜왔다. 단절과 소외, 불안과 방황이 현대 인류 정신사를 위기의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불변의 가치로 여겨져 왔던 인간성의 고귀함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점차 희석되고, 대형화․획일화․상품화․기계화로 치닫는 인간 상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이 창안해온 물질문명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삶과 미래를 불안으로 몰아감으로 인간의 예속을 강화시킨다. 더욱 비극적인 사태는 인간이 그러한 굴종에 점차 순치되어 가면서, 그러한 노예화를 당연시 여기게 되고 그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망각했다는 데서 벌어진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녹색 시학은 온갖 물질문명과 상업주의의 위세와 횡포라는 인간 정신의 위기 속에서도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시켜주고, 그 인간적 위의와 존엄성을 고양시켜 나아가는 시기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뉴 웨이브New Wave의 에네르기를 변형생성해내는 창조력을 장착해야 한다는 말.

농경적 차원에서의 녹색 혁명이 그러했듯이, 녹색 시학의 요체는 <신생의 의지 및 창조적 생명성>으로 집약되지 않는가 싶다. 그리고 그 개념은 건전한 인습에 뿌리를 둔 채 새로운 창공을 향한 끊임없는 가지 뻗기의 실천으로 행위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21세기 초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로서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하며 자아의 존재가치란 진정 어디에 있는가에 더하여, 인간이 발휘해야할 생명성의 힘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모색해보는 것으로 시적 추구의 초점을 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강구는―매우 인습적인 분류이겠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화되어 나타날 수 있다.

1) 자연이나 생의 희비를 다룬 전통서정시에 바탕한 신서정의 확립

2) 시대의식에 의한 리얼리즘

3) 정서적 사유에 의한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위 세 가지는 공존하기에 애초부터 성질이 상호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취향이 다기화多岐化되고 유행이 신속하게 뒤섞이어 퓨전과 혼합장르의 대중예술이 대세를 장악해가는 판에, 이 성향들이 서로 길항하면서 상호보완적인 창의적 영역을 공집합으로 지닐 수 있으므로,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생성적인 개념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2. 자연이나 생의 비애를 다룬 전통서정시의 계열

 

물론 시의 원형은 순수서정시로써, 흔히들 전통적이고 원형적인 의미의 서정시라 하겠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바둑판 복기식의, 또는 붕어빵 찍어내듯 한 모사행위식 작품 쓰기는 탈피하고 진정한 새 물결의 서정을 실험하고 탐색해야 한다. 세계의 본질과 인간 정신의 인상적인 단면을 예리하게 섬광처럼 포착하여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근본 예술 장르 본연의 성격을 재창출해야하는 바, 이 일에는 고도의 문명사회에 버려지듯 내몰린 현대인의 내면 속에 근원적으로 자리잡은 허적虛寂을 참신하게 형상화해내는 일이 포함된다. 독특한 ‘내 마음의 세계’를 노래하는 데 있어서, 내면 정서의 지속과 변화를 섬세하게 탐구하고 새롭게 깨치거나 보고 들은 것을 개성적이고 인상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기법상의 창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흔히들, 서정시의 근본 이치를 1) 세계의 자아화, 2) 자아의 내면화, 3) 내면의 심화, 4) 음악성, 5) 창의성 등으로 분류하곤 한다. 새로울 것 없는 전통적인 분류이지만, 현대 녹색시학의 이론적인 근거는 우선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이 원칙적인 바탕에, 강력한 생명성의 에네르기로 신생 의지의 힘을 불어넣어야 하겠다.

1) 세계의 자아화 : 서정시는 세계(대상)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육화시키는 것을 본성으로 하며, 자아화의 과정을 거쳐 체득한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로 구조화시킨다. 요컨대, 먼저 외적 대상이 ‘나의 존재 내부’로 인식화 되어야 한다는 것.

2) 자아의 내면화 : 시는 시인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외적인 대상을 새로이 인식하고 개성적으로 포착하여 내적인 울림을 빚어냄으로써 정서를 환기하고 감동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시는 발견의 정신을 핵심으로 간직하여, 이제껏 남이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새로이 보아내고 들어내고 생각해내는 창의성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열어나가야 한다.

3) 내면의 심화 : 시는 깊이의 정신을 중핵으로 간직하면서 내면의 심화를 획득하고 삶의 고양을 도모한다. 자연이나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이 요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음악성 : 시는 음악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간직한다. 노래로써의 정서의 가락과 의미의 운율로 인상적인 호소력을 발휘함으로 독자와 시인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해내야 한다. 전세계에서 자기고유의 정형시가와 그 리듬을 간직한 민족은 예닐곱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네 시조이다. 시조는 희귀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셈. 근대 자유 정신을 담기엔 시조양식이 고답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시인은 “모든 예술은 음악적 상태를 동경한다”는 영국 비평가 월터 페이터의 경구를 잊지 말아야 한다.

5) 창의성 : 현대시는 창조정신을 주된 동력으로 발동을 건다. 어둠에서 빛의 세계를, 무에서 유의 존재를 도출해내는 괴력을 항상 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녹색시학은 현대서정시학의 이치를 근거 삼아, 대자연의 현상과 본질을 성찰하면서 동시에 그와 조응(correspondence)을 성취해나가려는 인간 정신의 총체적 발로로써, 변형생성을 위한 창조적 표출을 위해 매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니체는 10년 동안 산 속에서 지낸 짜라투스트라의 하산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저 찬란한 태양이여! 너의 빛은 아름답지만 네가 비춰줄 저 산하와 대지가 없다면 너의 빛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러므로 시는 대자연의 대상적 존재가치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의미 또는 존재감을 재확인한다. 대자연물을 향한 서정성이 막연한 그리움 일색이나 구태의연한 사랑타령을 벗어나, 정신주의적 경지를 추구하는 신서정의 매개원리로 작용하며 분화되어야 하는 것.

 

3. 시대의식에 의한 리얼리즘

 

일제 강점기, 해방,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 군사반란과 장기 독재집권으로 인한 군사문화의 깊은 침투, 그리고 민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학대와 압제. 이렇게 한국의 근현대사는 굴곡의 역경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란 말이 결코 과언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시대의 정신적 성숙도는 여러 유혈 투쟁을 거치면 확보해온 민주화의 높이와 관련이 없을 수가 없다. 당대는 시대적 관심사가 가장 치열한 시절인 바, 그러한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인민의 정치적․사상적 의식수준을 격상시키는 중차대한 정신의 고양을 달성해내기도 했던 것이다.

6, 70년대 이후 시민의 민권 혁명, 사상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 및 남북 정상의 만남 등의 숨가쁜 시국의 흐름 속에서, 현대시의 한 부분은 실천성․사회성․역사성을 강력히 담보해내었다. 예술성․표현성 중심의 분단시대 서정시가 실천적 투쟁과 참여적 역사의식으로 이념성을 획득하면서, 대사회적 기자제 역할을 획기적으로 담당해온 터. 그러므로 진정한 녹색시학은 현실을 외면하고 은둔하여 음풍농월이나 화류풍월로만 침거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신생의 생명력을 급속히 잃어가게 될 것이다. 현실에 참여하는 방법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진보적 역사 참여와 사회적 실천을 향한 능동적 경향성을 이단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예술인의 시대적 책무도 소홀히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부 시는 단순한 개인적 감성과 느낌에 의존하고 치중되는 기능에서 사회 현실적으로 외연을 확대되어가는 현실태의 모습을 보이면서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서, 현대 서정시는 민주화․산업화로 인한 여러 명암들을 분석하면서, 특히 농민의 고달픈 현실과 농촌의 구조적 모순을 집중적으로 다루거나, 때로는 군사독재에 동참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문학인들의 비열성을 정면으로 지적하면서, 반역에 대한 역반역의 정신과 인간 해방의 사상을 통찰해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녹색시학도 노동자 주체의 전선적 민중시를 통해 민중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살뜰한 삶의 서정과 대지적 생명의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적 저항시 계열의 민중시도 시대정신이나 시대고時代苦의 반영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성향은 결코 전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참여적 한시들을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일제강점기의 지성들은 선구적으로 참여적 고뇌를 담당해왔던 것.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을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으로 나타나 온다.

― 윤동주, 「참회록懺悔錄」에서

 

잘 알려진 이 시는 시대에 대한 감수성이 아름다운 자성自省의 서정시로 표출되면서, 약소한 자아와 낡은 역사에 대한, 또한 삶과 존재의 운명에 대한 욕됨과 부끄러움의 성찰 그리고 참회의 심사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요즘 현대시에는 이러한 본원적인 자기반성이자 자기 극복의 안간힘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성장을 확보하기 위한 동력이 상실되어 있다. 위의 경우, 참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생과 부활을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겠다. 즉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긍정하려는 정신의 암투가 펼쳐지고 있는 것. 여기에서 우리는 녹색시학의 한 가지 기법을 얻을 수 있다. 요즘 현대시는 시대에 대한 지성적 부끄러움이 거의 사라지고 있으며, 주아주위적主我主義的 자기도취 일색인 경우가 허다하다. 곧 신생을 위한 생명력의 근간이 결핍되어 있다는 말.

현실주의는 빈민층의 생활양식을 그려내면서 가난과 폭력성마저도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휴머니티와 민중성으로 감싸안는 신생의 에네르기를 간직한다. 시인들 자신이 사회문화적 지향점에 확신을 가지고 활동반경을 넓혀갈 때, 인류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천년을 기약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인류사 미래의 지향점을 확고하게 바라보는 시인들의 눈빛과 숨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안한 오늘의 삶에 위안과 희망이 된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비전과 사명감으로 인해 그 시인들의 존재가치가 월등해진다. 세속적인 권력이 없기에 세속권력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힘의 모순적 역설이야말로 현대시의 운명인 것이다.

 

4. 서정적 사유에 의한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현대에 들어, 독자적 예술장르란 점차 그 경계적 울타리를 허물어가는 것 같다. 이러한 전위적 아방가르드가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학을 강타한 적이 있다. 이는 극심한 사태를 겪은 정신적 충격의 소산이었다. 21세기에 들어 급변하는 정세와 경제적 위기의 예감 속에서 인간 내면이 겪는 충격들은 가히 핵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또 다른 아방가르드가 출현하고 실행되는 것도 결코 예측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일부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시도되기도 하는 이 성향은 조립과 해체의 놀이문화로 자라온 신세대의 소설들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장르 퓨전의 예술화로 시문학에 도입되리라는 두려운(?) 예감이 든다.

주변부 일상적 삶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시의 시각이듯이, 경계적 예술 장르에 대한 현대적 모색을 통해서도 녹색시학은 그 나름의 생명성이나 창작적 기법을 획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기능은 여느 예술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참신한 지적 감수성과 표현 감각의 모색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이 그 창작적 근거가 된다 하겠다.

 

5. 글 맺기 : 삶의 정면, 그 바라보기의 의미

 

녹색시학은 시를 통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신원을 확인하여 확립하면서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자기 극복을 성취하면서 자아실현을 이루고, 나아가서 자기 고양을 거쳐 정신의 구원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열린 지향성을 담는다. 이 점은 모든 예술적 창작 행위의 근본정신일 것이다. 다만 녹색시학은 그러한 정신에 신생의지의 생명력을 가미하여, 그 강한 기의 에네르기를 발산하는 데 경주傾注할 필요가 있다.

당대는 영원 정신과 시대정신이 길항하면서 긴장 내지는 상호 보완을 형성하거나 전개되어 온 양상을 보인다. 근현대사에 있어서 이러한 개진은 한국정신사와 예술사의 온갖 굴곡과 명암의 내질을 스펙트럼으로 하여, 현대 시사의 기복 골격을 복합적으로 형성해왔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정신의 녹색운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의 건강한 생명성, 신생의 의지, 정신 위기의 통찰과 극복을 위한 노력 등이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만행을 벗어나 인간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시켜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요인들이 녹색시학의 신형 생장 엔진으로 가동되어 인간성과 생명력을 복원시켜주는 동시에 인간 공동체의 신생을 보장해줄 터이다.

이는 거의 인간 본능적인 충동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낙원失樂園과 복낙원復樂園의 성서적 모티프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지나치게 종교적인 안목일까. 하지만, 모든 예술 행위가 그러하듯이, 시 작업 역시 고단한 현실의 비인간적 삶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며, 그러한 의혹을 극복하고 원천적 행복과 자유를 구가하기 위하여, 인간의 원형적 삶을 지향하는 부단한 희구의 정신 과정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시 예술은 인간 본연의 원형회귀의 꿈을 통해 낙원지향성의 의미에 중요성을 둔다는 것.

사실, 엄격히 말하면, 식민지 해방이나 사회 혁명이란 것들도 현실의 고충과 고통을 벗어난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 대한 공동체적 환상 때문이었다. 그 계열의 시 작업 모두가 사회적 전진의 역동성에 대한 시적 반응이자 성숙한 시민의식의 해방정신이 바탕이 되어 강렬한 시적 자장을 형성해왔다. 이 땅에서도, 망국의 비참한 피지배상태로부터의 가열찬 탈출을 모색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써, 식민지 시대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희구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의상으로 하여, 문학예술화,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식민지적 예속과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했던 것이다. 해방 후, 특히 군사독재 하에서 산업화시대를 직면하여 반독재투쟁과 노동운동을 곁들이면서 드러난 민중노동시의 참여적 기운 또한 반민주라는 억압적 통치체제의 예속과 굴종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는 절차에서, 유난히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두드러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후 어느 정도의 민주화를 성취한 뒤로, 인간 본연의 존재 가치나 삶의 정신주의적 질을 추구하면서 신서정의 선시 계열이나 환경문제를 다룬 생태주의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데, 바로 여기에 녹색시의 핵심이 자리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저변에는 경제적 난구의 돌파하기 위한 막개발로 인해 사회적 환경 파괴나 생태의식의 위기를 직면하면서 자아의 탐색을 아울러 삶과 환경의 건강한 생명성 확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시 작업이 명상과 관조를 통해 자아 존재를 예술적으로 드높이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현대녹색시학의 성취를 달성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시의 현대성과 관련하여 이러한 방향이 적절치 않을 때, 시들은 흔히 왜곡되고 불구화된다.

투쟁할 대상이 선명하고 투쟁할 방법이 단순했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그 대상이나 방법이 다각화되면서 초점이 분산되는 측면을 보이기에, 오히려 생각이 복잡해지고 핵심이 흐려져 불행이라면 불행일지도 모른다. 뚜렷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다양한 해악적 대상에 대한 각자 나름대로의 투쟁을 모색하다 보니, 다들 정신이 없게 되고 집중력이 산만해져 있다. 이런 형국에, 녹색시의 추구로 역량 집중의 대상과 의지를 단순화시킬 필요도 있겠다.

그러므로 녹색시학은 한국 서정시의 창조적 계승과 변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달성해내고자 하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신세대적 감수성의 서정을 그 축으로 하여, 시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실체로서 살아있는 총체적 언어미학의 원동력이 되면서, 그 형성과 변천이 현재진행중인 개념, 미래지향적인 열린 이념으로 거듭나야 한다.

오늘날의 기계문명과 자본 만능의 시대, 대도시의 편안한 문명적 삶과 새 것 선호사상 중심의 시대에 비인간화 또는 탈인간화의 가속화가 속행되고 있다. 이런 핀국에 녹색시학은 시대의 생명 사랑 운동이며 사랑과 평화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가장 순수한 자연의 원형성과 생명성을 탐구하고 인간의 인간성―그 근원적인 고향성을 노래한다. 더 나아가, 모든 시인은 녹색시학의 정신을 장착하면서 꿋꿋하게 자연의 본원성으로 생명력 회복을 갈망하고 그것을 인간성 회복의 명제와 연결시킴으로 초록 생명의 맑은 시학을 길어 올릴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녹색시학은 강렬한 휴머니즘의 노선에서 멀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봄」 전문

주)

 

김재홍, 「현대시의 한 성찰과 전망」,『만해축전』((재)백담사 만해마을, 2006), 446〜8쪽.

최동호 「인간 존재의 위기와 문학의 미래」,『만해축전』((재)백담사 만해마을, 2006), 443 쪽.

 

* 2009 년 6월 6일 녹색시인협회 문학포럼에 발표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