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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 그리움의 보고, 구엄리 바닷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2. 27. 16:46

제주도 ☞ 그리움의 보고, 구엄리 바닷가

                      - 모든 섬의 고향이요 어머니인 섬

                                                           이생진

   

 그리움의 보고, 구엄리 바닷가 걸어가고 싶다. 두 다리가 멀쩡한데 앉아 있는 것은 구속이다. 어디론가 가자. 어디로 가느냐, 왜 가느냐, 그건 내가 걷기 시작한 때부터 무의미한 질문이다. 카를 부세의 「저 산너머」를 구름처럼 이고 가자. 나는 삶의 한계를 걸을 수 있을 때까지로 본다.

 

저 산 너머 또 너머 저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기에

남을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 지으며 되돌아왔네

저 산 너머 또 너머 더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건만

           

               「저 산 너머」 (카를 부세)

 

 그렇다! 시(詩)가 인생의 다리를 놔준 것은 내가 성장한 뒤였고, 고무신을 든 채 바다로 뛰어간 것은 시도 고독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때부터 바다는 설렘이요, 살아가며 생기는 실망을 재우는 요람이었다.

  

 지금도 묻지 않는다. 어디로 가느냐, 왜 가느냐고. 터미널 직원이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것은 뱃삯을 계산하기 위해서이지 내 목적지를 알고 싶어 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표를 사들고 나면 나도 모르게 내 행방이 없어진 것처럼 외로워진다. 전에는 이 외로움을 몰랐다. 시인이란 이 외로움을 먹고사는 물고기인 줄 몰랐다.

  

 우리나라 섬 3200개 중에서 제주도만큼 풍요롭고 편안한 데가 없다. 제주도는 섬의 왕이다. 수많은 섬을 섭렵하다가도 나는 제주도로 돌아 온다. 제주도는 모든 섬의 고향이요 어머니다.

  

 오늘은 애월읍 구엄리(舊嚴里) 바닷가를 걷는다. 걸어가다가 다리가 아프면 아무 데나 앉는다. 까만 화산석에 앉아 동서로 펼쳐진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 그리움은 문서에 없는 그리움이다. 전화도 없고 주소도 없다 바다 소식을 담은 편지를 쓰고 싶다. 그런 인연을 누가 끊었을까? 저절로 끊어졌겠지. 다시 이어놓을 수 없을까.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 때부터 내 시어(詩魚)의 산란기를 맞는 것이다. 나는 산란기를 맞으러 떠돌아다니는 물고기. 바다만큼 내 몸에 익은 육체는 없다. 나는 그 육 체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편하게 눕는다

     

     밤 한시

     저 달이 어디로 가네

     이 밤에 어딜 가는 걸까

     달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네

     죽은 사람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나만 떼어놓고 어디로 가네

     혼자 가는 달도 외롭지만

     혼자 달을 보는 나도 외롭네

     밤 한시

     이 밤에 왜 집을 나왔을까

     집이 어디더라

     생각하니 달에겐 집이 없네

     그래서 낮에도 떠돌았다네

                                      「혼자 떠돌 수밖에」

   

 

 무엇인가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신다. 바다가 맥주를 권한 것이다.바다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순간순간 키스 미, 키스 미 그랬다. 키스란 우리말이 아니어서 어색했지만 '카스(CASS)'를 받아넘기는 데는 '키스'밖에 없었다. 바다가 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이 조그마한 육체에 입을 맞춘다. 바다를 보면 입맞추고 싶다. 바다는 나를 위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팔팔 뛰는 물고기. 힘과 열정의 육체. 상쾌하다. 시 를 만나는 기쁨은 그리던 여인을 만나는 기쁨이다.

    

     요즘 식품은 맛보다 고독으로 유혹한다

     카스*미

     가까운 곳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듯

     가까운 가게에서 캔 맥주 하나 사 들고

     수평선 앞을 기웃거린다

     그리고 캔에 입을 댄 채 중얼거린다

     키스 미

     키스 미

     바다는 입술에 닿자마자

     나를 알아본다

     그렇지 저를 위해 그만큼 시를 했으면

     당연하지

     바다가 날 알아보는 순간

     '아버지!' 하고 달려갔다

     하지만 '어머니!' 하고달려갈 걸 그랬다

                                                       「바다와 맥주」

 

 주제넘게 내가 바다를 유혹했다. 그건 자유다. 고독할 때의 생각은 자유에서 우러나온다. 바닷가에 오면 맨발로 걷고 싶다. 촉촉한 마음이 나룻배처럼 흔들린다. 절벽에 앉아 있으면 눈 딱 감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런 데 오면 엉뚱한 생각이 나를 새롭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오토바이 타고 달리던 사람도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수평선을본다. 나의 한숨과는 아무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내가 모르는 한숨이 있다. 나는 시를 쓰고 그는 담배를 문다. 시는 활자로 바뀌고 담배는 연기로 바뀐다. 사라지는 것은 멋이 있다. 시도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야 뛰쳐나와

      나는 뛰쳐나왔다

      가으내 뛰어들지 못한 갯쑥부쟁이

      망설이다 말았고

      파도는 거센 힘으로도

      바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욕망의 그릇일 뿐

      서로 손이 닿지 않아

      한번도 잡지 못한 그리움

      야 뛰쳐나와

      나는 뛰쳐나왔다

      서로는 손잡기 쉬운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야 뛰쳐나와

      나는 뛰쳐나왔다


   한 시대가 나를 묶어놓을 수도 있고 한 가정(家庭)이 나를 가둬둘 수도 있다. 아니, 생각지도 않게 내가 나를 잡아매는 수도 있다. 시인은 이걸 경계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우리를 뛰쳐나와야 한다. 이것이 어려우면 시도 어렵다.


   잠시 후 나는 숙소로 들어가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해 보다 일찍 일어나 바다로 나왔다. 농부가 밭에 나오듯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어제 앉았던 그 돌에 앉았다.

     

     수산봉에 숨었던 아침해

     내가 시 한 편 쓰는 사이


     산마루에 올라왔다

     멀리 수평선엔 화물선 한 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는 사이

     낚시꾼은 고기 두 마리 낚았고

     한 시간 전에 뜬 비행기는

     벌써 서울 갔겠다

                                           「시 쓰는 동안」

         1

     그가 그림을 가르쳐줄 때

     꼼꼼하게 그리지 말고

     線 두서넛으로 그려라 했다

     말하자면 간결하게 그려라 했다

     그런데 나는

     벼랑에 소나무도 그리고 수평선도 그리고 싶다

     선 두어 개로는 마음이 차지 않았다

     나머지 것들은 보는 사람에게 맡기라고 했는데

     지금 이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

     그린 만큼만이라도 보여주고 싶은데 어찌지

     이것은 바닷간데

     수평선 쪽에서 달려오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을

     세 개의 선으로는 도저히 그릴 수 없고

     그 외의 것을 보는 사람이 상상하게 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내 표현력도 부족하지만

     나와 똑같이 봐줬으면 하는 욕심

     그렇다고 포기하면 이 풍광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시도 그림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

     수평선을 보라 완벽하지

     저걸 만지러 간다는 것은 우습다

     그저 환상에 가까운 현실

     나는 지금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니라

     바다보다 깊은 환상에 빠져 있다

        2

     제일 좋은 것은 이곳에 와서 보는 일인데

     그가 올 수 있겠는가

     온다고 해도 날씨며 시간이

     지금의 그것과 동일할 수 있겠나

     그건 무리다

     그래서 네 멋대로 생각하라 하고 블을 놓는 것일까

     이 사실을 추상으로 남겨둔다면

     궁금하게 여길 것 같아서 블을 놓지 못한다

        3

     여기는 바다와 소나무가 보이는 하얀성'

     실내 가득한 색소폰 소리가

     저 파도와 섞여 눈물을 낸다

     자세히 들어보니 색소폰보다 파도가 더 운다

     그 슬픔이 눈부시다

                                            「파도의 눈물.」

  

   내겐 의자가 따로 없다. 돌도 의자요 바위도 의자다. 아무렇게나 놓 여 있는 곳에 아무렇게나 걸터앉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아무 일 않고 그저 멍하니 하루를 보내도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밀어낼 사람이 없다. 그러나 너무 자유가 많아도 외로워진다. 그걸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런 때 벌떡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태만해서는 안 된다. 태만은 소중한 고독과 자유를 갉아먹는 좀벌레다. 시인도 기업인들 처럼 부지런해야 한다. 나는 일하고 싶다. 나는 시 쓰고 싶다. 시가 있는 데로 가자. 그래서 뛰쳐나온 것이 아니냐.

   

 구엄리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사과 두 개, 달걀 두 개, 감자 두 개를 사 들고 비닐하우스를 지나 연자방아를 돌아 노인정을 지나왔다. 그리고 시금치 밭과 마늘밭, 양배추 밭을 지나서 경운기가 서 있는 돌담을 지나 티코 차 앞으로 왔다. 그 뒷집이 내가 묵고 있는 집이다. 젊은 부부의 지극한 친절은 오전으로 끝나고 빈집을 나와 바람이 지킨다. 내가 공항에서 직접 성산포로 갔으면 우도로 건너가 어느 민박집에서 머물 렀겠는데 이곳은 그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서쪽이다.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이 집 친척이라도 찾아와서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그래도 누가 와주었으면 할 정도로 조용하다. 빨랫줄에는 노란 수건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고양이는 채소밭을 돌아가고 돌담 밑엔 수선화가 한창이다. 가끔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와 서울로 가 는 비행기 소리가 창문을 흔들지만 별로 방해되지는 않는다. 책을 읽다

눈이 피로해지면 바닷가로 나간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세 번째 바다로 나왔다. 바다는 이른 아침 일수록 밝고 어른스럽다.

   식전에 앉았던 돌에 다시 앉는다 햇볕이 강할수록 물빛이 짙다. 바다도 겁이 없고 나도 겁이 없다. 도로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내게로 달려오는 여인이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집어들고는 "살았다!" 한다.

 

  바닷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절벽에서 '사람 살려 !"가 아니라 "살았다!" 한다. 집어 올린 지갑에서 두둑한 지폐와 면허증과 현금카드 와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외치는 소리다. 잔잔한 아침 바다와는 대조적이다.

   

  나보고 허리를 굽혀 고맙다고 한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자리 에 앉아 수평선에 취해 있다가 지갑을 놓고 떠났던 모양인데 돌아와 보니 그대로 있어 기쁨을 감추지 못해 터져나온 소리였다. 펄쩍펄쩍 뛰면서 야단이다. 잃었을 때의 실망과 찾았을 때의 기쁨 그 여자는 내가 그 지갑을 보관하고 있어준 것처럼 고마워했다. 그러나 바다에 넋을 잃고 앉았을 때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그녀도 넋을 잃고 앉았을 때에는 시상(詩想)이 떠올랐겠지. 그땐 돈이고 지갑이고 만사를 잊고 오직 수평선 속으로 빨려들었겠지. 그러다 가 슈퍼에 들러 음료수를 사려고 보니 지갑이 없다. 이런 때 시는 음료수를 주지 못한다. 수평선상에 떠오른 시상은 원수 같았을까? "그까짓 시상을 포기할 테니 내 지갑을 내놔라!"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 겠지. 그렇지만 그녀는 양쪽 볼에 웃음을 가득 담고 서 있다. 시상은 짧고 계산은 길다.

   

 농협으로 가는 경운기 소리는 분명 돈을 떠올리며 가는 소리인데 나에겐 시를 떠올리게 한다. 살살 첫바람이 일고 바다는 파도를 세우기 시작한다. 그녀의 지갑은 떠오르지 않아도 바윗돌에 앉아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은 영원한 시상으로 떠오른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바다를 좋아하는 여인에게

 

   승용차를 해안 도로변에 세워놓고 뛰어오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당신의 당황한 모습보다 당신의 미모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 들고 만세를 불렀죠. 그리고 몇 번이고 나를 향해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상에 잠겨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당신도 조금 전에 그런 상태로 여기에 않아 있었죠? 수평선 앞에서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을 수첩에 기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멋진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슈퍼에 들어서자마자 머리가 빙 돌았습니다. 생명 하나가 절단된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때 지갑을 잃었을 때보다 수평선과 바닷물이 진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또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수평선, 그 파도는 당신의 뇌리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정말 당신은 아름다운 시인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혹시 내가 그 지갑을 주웠다면 당신의 주민등록증에 있는 주소로 보내드렸을 겁니다. 당신이 잠시 자신도 모르게 시상에 빠졌던 것을 보상해드리기 위해 나의 시집도 한 권 넣어 보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갑을 찾았습니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시심도 찾아가길 바랍니다. 정말 아름다운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다음에 시심을 찾았을 때에도 그렇게 기뻐해주기 바랍니다. 시를 사랑해주십시오 돈보다 멋있을 때 가 있습니다.

        1

      달이 내게 술을 권한다

      달은 내게서 무엇을 얻어 갈까

      달이 책을 읽는다

      달의 책갈피에도 내가 죽은 얼굴일까

      달이 술 한잔 더 권한다

      달은 똑바로 간다

      제딴은 목적지가 있나 보다

      내가 읽는 책은 산 사람의 책

      장정일의 『서울에서 보낸 3주일』

      달이 헛보이는 시

      달도 시를 읽을까

      책 속에서 장정일은 달을 닮아간다

      孔子처럼 점잖게 죽어 있다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는 여교사 · 5」*는

      지금도 그 꿈을 꾸길 원하고

      책 읽다 달을 보는 달밤

      바다는 절 안 본다고 몸부림친다

      달 읽다가 뒤척이는 바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시 사십오 분!

      산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바닷가

      다들 어디 갔을까

      한참 있다가 또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달이 없고 별뿐이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창끝으로 찌르는 것 같다

      이에 비하면 나침반의 N은 감방에 갇힌 셈이다

      저 방향에서 북두칠성이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지리 선생님의 손가락도 그 방향이다

      그 밖에 정든 사람의 얼굴이 몇 사람 더 보인다

      쟁반은 없고 사과만 떠 있는 격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李太白」

 

   월요일 아침엔 한 명의 낚시꾼도 볼 수 없다. 수평선 하나만이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구엄리 해변에 세워진 '구엄 돌 염전' 이라는 제목 아래 새겨진 글을 읽는다.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신라 말엽 에서 고려 중엽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다. 바닷가에서의 생계가 어려워 이곳 해변의 암반을 이용해서 소금을 구웠다고 책어 있다. 그 생업은 15년 후까지 이어졌다고 하며 그들을 염장(鹽匠)이라 불렀다 한다.

   그 글을 읽고 호기심 많은 나는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여보게, 자네가 700년 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살았다면 무엇을 해 먹고 살았겠나?"

    "보나마나 이 암반에 소금을 구워 먹고 살았겠지."

   

 한여름 땀을 흘리며 갈옷 바람으로 소금을 굽고 있을 내가 떠오른다. 새끼들 일곱, 여덟? 아니, 열은 될 거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형제 자매 여섯을 낳고 서른여덟에 돌아가셨으니, 내가 그보다 훨씬 늦게까지 아이를 낳았다고 치면 열은 될걸. 그것들을 데리고 뜨거운 돌맡을 뛰어다니며 소금을 구웠을 나, 그렇다고 비참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나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험수룩한 수염, 그때의 나를 상상하면 차라리 오늘보다야 사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만족스럽다. 물른 시를 쓰지 않았으니 더 생업에 철저했을 거고, 시 읽는 욕심이 없었으니 아비 노릇도 잘했을 거다.

 

 그로부터 700년 후, 나그네 입장이지만 해변은 소금이 아니라 파도, 아니 그때의 소금기까지도 나에겐 시로 밀려오고 있다. 얼마나 태만한 짓인가 하지만 지금도 나는 만족스럽다.


    구엄리를 떠나던 날,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주인집 내외는 시 쓰는 사람을 이해했고 사진에 관심이 많은 한 편,사업을 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집이 늘 비어 있다. 내가 쓰는 독채는 아담한 사진 작업실이어서 조용한 분위기가 24시간 지속된다. 뒤뜰에는 감나무와 매화나무가 있고 온실에는 여러 개의 난초가 있다. 담 밑엔 수선화가 있고 담 너머로는 수평선이 보인다.

 

   그들 내외는 제주시에서 새벽에 돌아왔다 오후에 나간다. 그러므로 이 작업실은 날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불편이 없다. 언제든지 와서 시를 쓰라고 열쇠를 놓고 갔다. 그러나 잠글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런 친절을 고맙게 받는다고 하더라도 전기료며 수도료, 보일러 기름값, 쓰레기 수거비 이런 것까지 부담시키고 슬그머니 사라진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부인이 시 한 편 써달라는 첫인사도 있었고 해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

    무작정 수평선 따라 나선다

    돌담 밑에 수선화 열두 송이

    금잔옥대 받쳐들고

    저희들도 따라 나선다


     '그래 가자'

     넘치 는 음향(音香)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2

     내가 머물던 닷새 동안

     수선화는

     한번도 울지 않았다

                            「수선화에 수평선」

   내가 들어 있던 방에 시를 써놓고 나왔다. 돌아가는 길이 쓸쓸했다.자꾸 수평선이 뒤돌아 보였다.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느라 머뭇거렸다. 보랏빛 배낭에 빨간 등산모 그리고 등산화, 이것이 떠돌 때의 옷차림이다. 한라산엔 눈이 쌓였고 오름은 소복한 유방 같았다. 한라산 머리 위엔 해가 떠서 영봉 그대로였다. 버스가 설 자리에서 서지 않고 지나간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둘에서 셋으로 늘었는데 버스가 서지 않는다. 나는 여학생 같은 아가씨보고 여기서 버스가 서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바닷바람으로 헝클어진 긴 머리를 매만지며 선다고 했다. 아가씨는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내 착각이겠지 하면서도 나그네다운 말을 건넸다.

"여기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 했더니

"네" 하면서도 알듯 하다는 표정을 보인다.

"나는 서울 사는데 여기 바닷가가 좋기에 머물다 가는 길이지 ."

무슨 말이 나을 것 같아서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여긴 경치가 별로인데요, 무엇하시는데요?'

  '저 떠돌며 글쓰지 " 했더니

"여긴 그런 영감(靈感)이 떠오를 만한 곳이 아닌데요." 한다. 이 '영감' 이란 말 때문에 말이 이어졌다.

 "영감, 영감이란 말을 들으니 시와 관계가 많은 학생 같은데?"

 "학생은 아니고 시는 무척 좋아해요."

 "나도 시를좋아하는데…. "

 "그러세요? 그럼 시를 쓰시나요?" 나는 대답 대신에 빙그레 웃었다

또 은근히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한 것 같아서 낮이 붉어졌다.그녀는 어디서 본 듯하다는 눈치다. 그런 생각은 나의 착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젊은 여자 앞에서는 시 쓴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성산포라는 시 아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운 바다 성산포요?" 한다.

   '그렇지, 그 사람이야."

   "선생님이 정말 그분이세요?" 그러고는 활짝 열린 눈으로 내 이마의 검버섯을 확인하듯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 시 읽은 적 있어?'

   "그럼요, 진짜 팬인데요."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기뻐한다. 그리고 노란메모지 한 장을 떼어주며 사인을 부탁한다 사인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가방에서 큰 수첩을 꺼내 크게 다시 해달라고 한다.

   "하필이면 이런 날 선생님을 만날까?"

   "무슨 말이지? 친구하고 말다툼이라도?"

   "아니오. 부모님 때문이에요. 두 분이 오늘 굉장히 싸웠거든요."

   그 사이에도 서너 대의 버스가 지나갔다.

   "부부짜움이야 칼로 물 베기라는데 뭐 ."

   "아니오. 법정까지 갈 직전이에요. 선생님 , 이런 땐 어떻게 하죠?" 하며 긴 머리채를 만진다. 아버지, 어머니가 좋아하는 긴 머리인데 자르러 나왔다는 것이다.

    '영감 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길어진 대화. 아가씨는 가늘고 긴 머리채를 잘랐는지 궁금하다. 구엄리 바닷바람에 아름답게 휘날리던 머리, 아직 수평선처럼 팽팽하게 남아 있기를 빌며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네가 태워준 택시로 공항까지 잘 왔다. 너는 노란 메모지를 내놓으며 사인을 부탁했지. 메모지를 내놓는 너의 손이 떨고 있었다. 너는 못 느꼈겠지만,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이런 데서도 '영감'이 떠오르냐고 했던 말은 시인의 입을 열게 한 결정적인 요소다. 너는 늘 그곳 에서 잠자고 밥먹고 직장에 가고 하니까 구엄리 바다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일어나마자 그 바다의 신비에 끌려 어쩔 줄 몰랐단다. 돌담이며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리잡은 팽나무며 돌에 눌어붙은 담쟁이넝굴, 무덤가에 서 있는 소나무까지도 시적 영감을 자아냈단다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땐 바닷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긴 머리를 재우던 그 모습이 수평선보다도, 아니 담 밑에 선명한 수선화보다도 밝게 떠오른다 그리고 더 큰 수첩을 꺼내 들고 사인을 요구해왔을 때 너의 수첩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쓴 시가 들어 있었다. 다음부터는 바닷가를 거닐 때 그 시를 생각하며 걸어라.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를 쓰듯 말이다. 너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부모님의 불화 때문에 머리를 자르겠다고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시가 읽고 싶어질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 다시 네 수첩에 적어놓은 시가 벗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대가 밤바다로 자주 나가는 건

           가슴속에

           파도가 많은 때문이다

                                                   김순이 시집 『기억의 섬』 중에서

          

 

           그대가 밤길을 걸으며 하늘을 보는 건

           가슴속에

           그리움이 많은 때문이다

           이 밤에 어찌자고 저 별은

           내 가슴을 찌르는 걸까

           그렇지

           그도 내게

           그리움이 있어 그러겠지

                                    「밤바다와 그리움」

  

* 카스(CASS): 맥주 이름

*하얀성: 구엄리 바닷가에 있는 하얀 이층집 커피숍.  

*『서울에서 보낸 3주일』(장정일,문학과지성사. 1988)에 수록된 시의 제목. 여교사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성폭행당하는 꿈을 묘사한 내용.

 

⊙ 수록산문집 : 걸어다니는 물고기